영상설치미술 혹은 비디오아트가 오늘날 미술계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잡은 이후, 이들과 영화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음을 논하는 것은 벌써 진부한 일로 여겨질 정도다. 두 영역을 오가며 작업하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음은 분명 주목할 만한 현상이며, 이를 반영하듯 로테르담, 베를린 그리고 토론토영화제 등은 몇년 전부터 상당한 규모의 전시프로그램을 영화제 기간 동안 마련해왔다.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만든 사뭇 영화적인 ‘작품’이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어 영화관에서 상영된다거나 영화감독들이 만든 영상설치물이 (때론 그들의 영화 자체가) 비엔날레에 초청되고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것도 이젠 흔한 일이 되었다. 가령 <24시간 사이코>(1993)의 더글러스 고든이 만든 <지단: 21세기의 초상>(2006)이나 <크리매스터>(1995~2002) 연작의 매튜 바니가 만든 <구속의 드로잉 9>(2005) 등이 칸과 베니스에서 상영되며 관심을 모았는가 하면 역으로 장 뤽 고다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페드로 코스타, 샹탈 애커만 같은 영화감독들은 전시프로그램을 위한 작업에 임하기도 했다(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런 식의 ‘횡단’이 꼭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미술계에선 상당한 주목을 받았던 스위스 작가 피필로티 리스트의 장편영화 데뷔작 <페퍼민타>(2009)처럼 재앙에 가까운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멀티 플랫폼 프로젝트 <프리미티브>(2009)의 대미를 이루는 장편영화 <엉클 분미>(2010)에 칸영화제가 황금종려상을 수여한 것은 이와 같은 동시대적 경향을 영화계가 온전히 끌어안았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올해 베니스비엔날레는 3천여편의 영화에서 시계가 보이거나 시간이 암시된 장면들을 발췌해 편집한 크리스천 마클레이의 24시간짜리 싱글채널 비디오작품 <시계>(2010)에 황금사자상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안일하게 경계의 소멸 운운하거나 이른바 ‘무빙-이미지’의 가능한 양상들에 대해 논하다보면 기원의 탐색(“이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이나 무용한 예언(“이것은 미래의 ~다”)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영화와 미술 두 영역이 만나 새로운 미학이 창조되고 있다고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개의 위기가 만나 격렬한 소용돌이를 이루는 광경으로서 이 모든 것을 바라봐야 한다.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이 끊임없는 위기의 생성과 극복의 과정으로서 진행되어왔고, 20세기의 예술인 영화는 “그 탄생의 순간부터 붕괴 전야(前夜)에 있었고 끊임없이 붕괴 전야가 생의 기저에 있다는 자각의 탐구를 스스로의 역사의 핵으로 삼아 왔다”(하스미 시게히코, <영화붕괴전야>)면 오늘날 영화와 미술간의 만남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다른 위기의 힘을 빌리는 기묘한 모양새를 띠고 있다 하겠다(영화광들과 예술영화관 경영주들은 “영화는 극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하는 것”이라는 당위로 맞서려 들지 모르지만 이는 관람이 이루어지는 어떤 공간과 시간을 특권적으로 낭만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공허하고, 그런 까닭에 위기를 사유하기엔 무력하다). 마클레이의 <시계>는 위기의 소용돌이로 이루어진 기념비적 작품이다. 개념적이고 담론적인 현대미술과 순수영화적 형식(서스펜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기의 징후들이지만 <시계>에서 각각의 위기가 다른 위기를 지탱하며 곡예를 부리는 광경은 정말이지 경이롭기 짝이 없다. 제목 그대로 하나의 시계처럼 기능하는 이 작품은 누군가의 말처럼 24시간 동안의 카운트다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카운트다운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승일까 아니면 그저 제로(0)일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