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차태현] 이 배우의 인생 공식 [2]
2011-09-05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오계옥

이젠 연기가 그냥 묻어나요, 저도 나이를 먹었나봐요

요즘 제가 이런저런 방송 프로그램에 자주 모습을 비치는 건, 9월8일 개봉하는 영화 <챔프> 때문이에요. <각설탕>의 마지막 장면에 스치듯 등장하는 ‘우박이’를 기억하시나요? 이환경 감독의 첫 영화 <각설탕>이 천둥이의 영화였다면, 차기작 <챔프>는 우박이의 영화죠. 저는 한때 유망한 기수였으나 우박이와 한날 한시에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를 잃고 시력도 점차 잃어가는 이승호를 연기합니다. 우박이는 절름발이 말이라는 장애를 딛고 부산 최고의 경주마로 명성을 떨쳤던 ‘루나’를 모델로 삼았어요. 우리는 각자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고 최고의 기수와 경주마가 되기 위해 함께 달려요. 이 여정에는 제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딸 예승이(김수정)와 우리를 믿고 지지해주는 윤 조교사(유오성)님이 함께하죠.

처음엔 <챔프>의 시나리오가 제게 왔다는 게 신기했어요. 말을 타본 적도 없고 승마장은커녕 경마장도 한번 안 가본 제가 기수를 연기한다니요! 게다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저는 고등학생 때 오른쪽 어깨를 수술해서 조금만 격한 액션장면을 찍어도 몸에 무리가 오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럼에도 이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건 눈물과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주는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고, 이 영화를 통해 좀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사실 저, 새 영화 고를 때마다 관객이 절 어떻게 바라보실지 고민 많이 합니다. ‘뭘 해도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는 걸 알아요. 틀린 말은 아니죠. 어떤 작품을 해도 수더분하고 밝은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연애소설>에서는 슬픈 견우, <첫사랑 사수궐기대회>에선 뽀글이 파마한 견우, <헬로우 고스트>는 부모를 잃은 견우고 <챔프>는 말 타는 견우죠, 하하하…. 하지만 동시에 드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관객이 제가 나와서 단 한번도 웃기지 않고 들어가면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시는 것 같았어요. 진지한 영화를 한다 해도 그 작품에 차태현이라는 배우가 나왔을 때 원하는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더라고요. 늘 변신이나 변화에 신경을 써야 하겠지만, 저의 기본적인 이미지들을 일부러 감추려고 하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같은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는 작품을 찾고 있습니다. 음악영화의 느낌이 강했던 <과속스캔들>, 귀신에게 빙의돼 1인5역을 해야 했던 <헬로우 고스트>, 스포츠영화인 <챔프>처럼요.

휴, 그런데 <챔프> 말이죠… 보통 영화가 아니었어요. 말 타는 게 그렇게 힘들 줄 미처 몰랐다니까요. 스포츠영화가 다 그런 거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요? 에이, 처음에 감독님이 그랬단 말이에요. 말 많이 안 타도 되고 못 타도 된다고. 그 말을 철석같이 믿은 내가 잘못이지…. 그런데 마사회나 사설 경마장에서 기수들의 ‘몽키 자세’를 열달 동안 연습하다 보니 되더라고요. 기수처럼 엉덩이를 높이 들고 말을 타는 자세가요. 감독님도 연습을 곧잘 하는 것 같으니 한번 타보라고 하고, 교관님도 자꾸만… 그래서 우박이를 타고 바닷가를 달리는 장면을 눈 딱 감고 찍어봤는데 한번에 성공한 거예요. 감독님이 그날 기분 최고라고 방마다 치킨 쏘시고, 저는 말에 매달렸다 죽다가 살아났죠. 그 순간 드는 생각, 아! 말렸다….

방금 한 얘긴 다 엄살인 거 아시죠? 솔직히 기수를 연기하는데 말을 잘 못 탄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연기를 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연기를 잘해야죠. 그래서 “이번 영화, 연기 정말 잘하시던데요” 하는 말을 들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하간 저는 말을 잘 타기 위해 제주도 육성목장과 마사회로 거의 매일 출근했어요. 예능에서 보여줬던 ‘뺀질이 차희빈’ 이미지가 강했던지 처음에는 교관님들이 제가 성실하게 연습할 거라 생각을 안 하시더라고요. <주몽>의 송일국 선배님이나 <그랑프리>의 김태희씨가 얼마나 말을 열심히 탔는지 아느냐며 분발하라고 하시기에 촬영이 비는 날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목장으로 출근했죠. 매일 한 시간 넘게 말을 탄 것 같아요. 나중엔 교관님들도 만족하시더라고요. 다음에 말 타러 목장 가는 배우들은 핀잔 좀 들을 거예요. 저랑 (백)도빈이가 아주 열심히 연습했거든요. 흐흐.

말 타는 연습에 정신을 쏟다보니 아쉬운 점도 있어요. 이전 작품들처럼 감정 연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챔프>는 아이와 말이 나오는 영화예요. 다시 말해 제가 먼저 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는 영화였어요. 우는 장면이 있으면 제 딸로 나오는 수정이가 다가와서 얘기해요. “삼촌, 어떻게 우실 거예요?” 그러니까 미리 잡아놓은 온갖 감정이 다 깨지는 거예요. 우박이는 언급할 필요도 없죠. 제가 준비를 하고 있더라도 그 아이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모든 촬영을 멈출 수밖에 없으니까요. 제 연기가 너무 아쉬워서 이환경 감독님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도 있어요. 그런데 의외로 감독님은 제 감정 연기가 부족하지 않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건 제가 의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죠. 그냥 묻어나는 거예요. 이젠 저도, 나이를 꽤 먹었나봐요.

올해로 제가 서른여섯이 됐네요. 스무살 때 KBS 슈퍼탤런트로 데뷔한 지 어느덧 16년이 흘렀어요. <엽기적인 그녀>처럼 사랑을 많이 받은 작품도 있고,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나 <황태자의 첫사랑> <파랑주의보>처럼 쓴소리를 들어야 했던 작품도 있었지만 20대의 저는 ‘10년 동안 잘 안 풀려도 서른살’이라고 생각하며 배우로서의 성공에 크게 조바심을 내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훌쩍 30대가 되었어요. 언제나 30대가 되고 결혼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오면 그 나이에 어울리는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어떻게 보면 <과속스캔들>의 남현수가 그런 역할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사실 그때만 해도 제가 한 아이의 아빠, 그 아이가 낳은 아이의 할아버지를 연기하는 걸 관객 여러분이 공감할 수 있을까 많이 걱정했었어요. 그때 가정과 아이가 없었더라면 저는 남현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그를 ‘연기’해야 했겠지요.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에 촬영한 <챔프>는 또 달라요. 이젠 제가 아버지 역할을 맡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결혼생활 5년째, 이제는 5살이 된 수찬이를 키우며 저도 성장하고 있는 거겠죠.

남우주연상, 언젠가는 꼭 받고싶어요

인터뷰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언급하지만, 가족은 제게 큰 힘이 돼요. 가족이라고 해봐야 아내와 아들, 그리고 9월에 태어날 둘째가 전부지만. 아내는 제가 다음 작품을 선택해야 할 때 아주 냉정한 조언자가 되어줘요. 그 친구가 재미없다고 하면 출연을 결정하기 직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아요. 배우로 16년을 살다보니 작품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거든요. 그럴 때마다 아내의 야무진 한마디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게다가 평소에는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오죽하면 제가 그런 말까지 했겠어요. “야, 나 인기 떨어지고 아무도 찾지 않는 날이 오면 그땐 우리 집에 CCTV 몇개 달아놓고 그 영상 팔아도 될 것 같아”라고. 요즘 방송에서 자꾸 자기 얘기 한다고 투덜대긴 하지만, 어쩌겠어요. 아내야말로 제 인생의 활력소인데.

제가 가는 곳마다 가족 이야기를 하니까 많은 분이 물어보시더라고요. 도대체 아빠라는 사람이 지금처럼 동안을 유지하는 비결이 뭐냐고. 솔직히 비결이 어디 있어요, 타고나는 거지. 하하하! 다만 저는 평소에 좀 많이 웃는 것 같아요. <개그콘서트> 같은 개그 프로그램이나 <런닝맨> <1박2 일> <무한도전>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꼬박꼬박 챙겨 보면서 참 많이 웃거든요. 그렇게 웃음에 관대하다는 것이 젊게 사는 비결이 아닌가 싶어요. 한편으로 개그, 예능 프로그램을 챙겨 보는 까닭은 어떤 이야기에 사람들이 반응하는지, 어떤 포인트에서 웃길 수 있을지 유머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예요. 개그맨들의 말투나 템포,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제가 밝고 재미있는 역할을 연기할 때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누군가를 웃기는 건 분명 타고나야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을 보며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중요한 것 같아요. 차희빈, 그냥 나온 게 아니라니까!

<과속스캔들>과 <헬로우 고스트>가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니, <챔프>에 대한 관심이 많은가봐요. 언론이 참 웃겨요. 이 두 작품을 하기 전까지 저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다가 <과속스캔들>이 잘되니 갑자기 ‘흥행 배우’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엽기적인 그녀>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다가 이후의 작품들이 주춤할 때도 돌변했어요. ‘차태현, <엽기적인 그녀> 이후 흥행 성적 부진…’ 같은 제목을 단 기사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더라고요. 20대 때 처음으로 이런 부침을 겪었을 때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았어요.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극도의 공포심을 느끼는 ‘공황장애’를 겪으면서 제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알게 됐죠. 그래도 언론의 그런 반응을 야속하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배우도 좋은 평가를 받느냐 아니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고 생각하거든요. 뭘 해도 잘될 때는 자신감 넘치게, 잘 풀리지 않을 때는 겸손하게 변하는 게 배우라는 사람들의 습성이겠죠. 중요한 것은 커리어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느끼고 반성하는 자세 같아요. 전 <바보>나 <복면달호> 같은 작품을 만나기 전, 안일하게 작품을 선택했던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졌거든요. 어쨌거나 <챔프>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진 상황에서, 흥행이나 평가에 신경 쓰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 옳겠지만 왠지 이 영화만큼은 정말 잘됐으면 좋겠어요. 고생한 만큼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벌써 얘기를 마칠 시간이 되었나요? 하긴 영화도 러닝타임이 있듯 지면도 제한된 페이지가 있게 마련이죠. 2010년 <헬로우 고스트>로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처음 오른 이래, 제겐 꿈이 하나 생겼어요. 죽기 전에 남우주연상을 꼭 한번 받아보는 거예요. 많은 분들이 밝은 분위기의 상업영화를 사랑해주시는데도 연말에 시상식만 하면 예술영화에 밀려 찬밥 신세가 되는 것이 안타까워요. 재밌고 유쾌한 제 트레이드마크 역할로 주연상을 받아 밝은 상업영화의 위대함을 전국에 알릴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일단은 조선판 <오션스 일레븐>을 표방하는 사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무사히 찍고 돌아오겠습니다~.

스타일리스트 엄호정·헤어 지경미(라 스텔라)·메이크업 안미경(라 스텔라)·의상협찬 Codes Combine for men, Thursday 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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