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필만 빛난다?
1995년 / <젊은이의 양지>
방송사에 견학 왔다 해도 의심받지 않을 만한 앳된 외모의 청년이 KBS에 출근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1995년 처음으로 열린 KBS 슈퍼탤런트 공채에서 은상을 수상한 신인배우 차태현이다.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서 전도연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잠시 등장한 그는, “나이가 너무 어려 보인다”는 지적에 드라마 중도 하차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배우로서의 당찬 포부를 밝혔지만, 아직까진 KBS 효과담당자였던 아버지와 애니메이션 <영심이>의 ‘영심이’(성우)였던 어머니를 뒀다는 가족 프로필이 더 주목 받았던 시절.
2. 코믹 콤비 출동!
1999년 / <해바라기>
“수염이라도 길러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지금은 미덕으로 칭송 받는 ‘동안’은 10년 전만 해도 신인배우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젊은이의 양지> 이후 차태현은 3년간 <파파> <레디고> <할렐루야> 등의 드라마,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앳된 얼굴이 관객의 감정이입을 가로막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는 오는 법. 1999년 드라마 <해바라기>에서 차태현은 어리어리한 신경외과 레지던트 ‘허재봉’을 맡아 삭발한 정신과 환자 김정은과 함께 멋진 콤비 플레이를 선보였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김정은과 함께 출연한 018 광고 ‘묻지마, 다쳐’ 시리즈가 국민 CF가 되며 차태현은 수많은 매체에서 ‘올해의 배우’로 선정되기도.
3. 인생 최고의 순간
2001년 / <엽기적인 그녀>
차태현, 운명의 캐릭터와 조우하다.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는 배우로서 승승장구하던 차태현, 신인배우 전지현을 단숨에 톱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긴 때리면 맞아주고, 발이 아프다고 하면 하이힐을 대신 신어주는 이 남자를 누가 거부할 수 있었을까. 소개팅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학생, 옆집 오빠같이 수더분한 ‘견우’는 이후 배우 차태현을 설명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이 영화를 능가하는 작품을 하나만 더 찍을 수 있다면 나는 성공한 배우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아직까진 그 이상의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4. 그를 울린 슬럼프
2003~2004년 /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투 가이즈> <황태자의 첫사랑>
<엽기적인 그녀>로 ‘국민 남친’이 된 차태현은 2003~2004년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점령했다. 영화 <첫사랑 사수궐기대회>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투 가이즈>, 드라마 <황태자의 첫사랑>이 당시의 출연작이다. 그러나 높아진 기대치 때문이었을까. 그가 출연한 모든 작품에는 ‘견우’와의 비교가 앞섰고, 작품에 대한 평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엽기적인 그녀>가 자신의 정점이었고, 이제 내려오는 일만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였지만 언론의 비판과 스스로 느끼는 압박감을 감당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황장애’라는 병이 찾아온 것도 이맘때다.
5. 변화를 꿈꾸다
2007년 / <복면달호> <바보>
‘정체기 이후’를 고민하던 차태현에게 <복면달호>와 <바보>는 흥행을 떠나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준 고마운 작품이다. 록스타를 꿈꿨지만 엉뚱하게도 ‘트로트계의 황태자’가 되어버린 <복면달호>의 봉달호는 차태현에게 음악영화의 가능성을 열어줬고, 만화가 강풀 원작의 <바보>는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세상 바깥으로 꺼내오고 싶다는 그의 바람을 실현케 해준 작품이었다. 어느덧 삼십대가 된 차태현은 그렇게 ‘제2의 전성기’를 꿈꾸며 차분히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6. 화려한 재기
2008년 / <과속스캔들>
이렇게 빨리 재기할 줄은 며느리도 몰랐다. 소싯적 낳은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까지 떠맡게 된 <과속스캔들>의 ‘남현수’는 차태현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다시금 관객에게 각인시킨 영화다. 극적으로 상봉한 딸에게 당장 떠나라고 소리지르고, 손자에게 고스톱 한판 내어주지 않는 쪼잔한 남자를 800만 관객이 사랑하게 만든 건 전적으로 차태현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7. 가족처럼 친근하게
2010~2011년 / <헬로우 고스트> <챔프>
<헬로우 고스트>와 <챔프>는 그가 가족적이고 친근한 이미지로 다시 한번 승부수를 던지는 영화다. 13년의 연애 끝에 웨딩마치를 울린 아내와 다섯살 난 아들을 둔 ‘가장’ 차태현은 이제 같은 코미디라도 더 깊은 울림을 담아낼 줄 안다. 가족 관객이 손잡고 자신의 영화를 보러 오는 게 그렇게 기쁘고 축복으로 느껴질 수 없다는 차태현의 말을 들으니, ‘이미지 변신’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싶다. 이렇게 변함없이 친근하고 다정한 배우 한명쯤 오래오래 곁에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