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영화]
낯설게, 짜릿하게 장르적 상상력의 쾌감
2011-10-07
한국영화 회고전 ‘김기덕, 60년대 한국대중·장르영화의 최전선’

밀수 조직의 하수인인 고아 청년 두수와 외교관의 딸 요안나. 우주만큼 벌어진 두 계급의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곧 죽음에 이른다. 요안나의 시신이 리무진에 실려 운반되는 동안 거적에 덮여 리어카에 실려 가는 두수. 두 계급 간의 벽은 죽음으로도 낮추거나 균열을 낼 수 없는 높고 강고한 것이었다. 단언컨대 거적 밖으로 삐져나온 두수의 슬픈 맨발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대중오락으로서의 영화를 고수하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인 김기덕 감독을 설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이 영화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맨발의 청춘>은 그의 최고 흥행작이자 청춘영화의 대표작이다. 재즈 음악에 실린 대도시의 생생한 문화적 풍광은 매혹과 불안을 동시에 안겼고, 등장인물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은 하나의 트랜드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스타 아이콘(신성일과 엄앵란)의 등장!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호응은 그것이 젊은 세대의 환상을 투영한 것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60년대 청춘들에게 이것은 ‘지금 여기’의 현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지향점 없는 반항과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다소 나른한 나르시시즘과 패배주의적인 선택은 현실에 투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을 도피하는 것으로 현실에 대한 거부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극단적으로 도식화된 계급 간의 비극은 당대 일상에 치밀하게 스며있는 한국사회의 억압을 피해가는, 사적으로 내면화된 수세적 저항의 제스처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미묘한 기운은 원작인 일본영화 <진흙탕 속의 순정>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평단은 더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러거나 말거나 대중들은 열광했다.

돌이켜보면 김기덕 감독은 언제나 그랬다. 시장에서 거둔 그의 성취는 종종 과소평가되었고 그의 대중적인 장르 영화는 작가 감독들의 작품에 밀려 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하지만 이제 한국영화사 연구에서, 특히 1960년대 한국영화를 다루면서 그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일은 무척 큰 실수가 될 것이다. 그는 한국영화의 황금기라 불리었던 1960년대 흥행에서 가장 성공적인 감독이었으며, 당대 동료 감독들이 문예영화를 통해 작가라는 칭호를 얻는 동안 대중·장르영화의 영역 안에서 모험적인 실험을 거듭했으며, 여타 문화 매체 간의 통섭을 영화를 매개로 반영하여 재창조했으며 그것으로 1960년대 한국대중영화의 상을 만들었던 감독이다. 무엇보다 소수를 위한 사적 예술이 아니라 최대 다수를 위한 대중오락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신념을 굳게 지켰던 그는 이를 새로운 장르영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실현하려 했다. 요컨대 ‘장르’는 김기덕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일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1961년 <5인의 해병>으로 데뷔하여 1977년 <영광의 9회말>까지 16년 동안 66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번 회고전에서 소개되는 여덟 편의 영화는 그의 장르적 스펙트럼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것은 또한 현대 장르영화에 끼친 그의 영향을 재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장르에 도전해

공포영화와 만주활극을 빼고 나면 당대 할 수 있었던 혹은 아직 시도되지 않았던 거의 모든 장르는 그의 손을 거쳤다. 전쟁영화, 청춘영화, 멜로드라마, 코미디, 스포츠영화, 액션, 사극, 스릴러, 계몽영화, 사회성 드라마, 뮤지션 영화, 그리고 괴수영화까지. 이 중 사극과 문예영화는 상대적으로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얼핏 보기에 그의 영화들은 상업적 가능성을 타진한 후에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어 온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기준이 엄격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듯하다. 말하자면 동시대성이라는 관점. 사극과 문예영화가 뒤로 밀려난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의 장르적 여정은 전쟁영화로부터 출발했다. <5인의 해병>에서 김기덕 감독은 군대를 국가에 일체시키는 ‘모범 대본’ 같은 전쟁영화와 거리를 둔 채 전장 속의 개인을 포착하려 했다. 이 영화가 해병들의 유머러스하고 인간애 넘치는 모습과 군의 직접적인 물량공세로 가능해진 대규모 전투신의 스펙터클이 조화를 이룬 본격 전쟁영화라면, 그의 또 다른 이 장르의 영화 <남과 북>은 사실 전쟁영화라기보다는 분단멜로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동명 라디오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반공의 색채를 말끔히 걷어낸 채 남과 북의 두 남성 간의 유대감을 매우 특별한 지위에까지 올려놓았다.

무엇보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독특한 영화는 <대괴수 용가리>일 것이다. 일본 특수효과 기술진이 투입되어 당대 평균제작비의 몇 배를 들여 만든 한국 최초의 괴수영화. 여기서 재현된 파괴의 스펙터클이 현대 관객들에게 다소 우스꽝스러울지는 몰라도, 단언컨대 ‘용가리’ 이후 한국의 그 어떤 SF 괴수영화도 이 영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그런 측면에서 <내 주먹을 사라>도 주목할 만하다. 지금이나 예나 비주류 장르로 다소 낯설 법한 스포츠영화를 익숙한 멜로드라마와 결합시켰다. 당대 유명한 챔피언이었던 김기수 선수의 캐스팅도 이채롭지만 실제 경기 장면과 연출된 장면을 뒤섞어 놓은 편집과 진짜 주먹을 주고받는 경기 신이 동시대 스포츠 액션 연출과는 또 다른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당대에 ‘외설도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흥미로운 평을 받기도 한 <말띠 신부>는 말띠 해에 기획된 발군의 세태풍자 섹스 코미디.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치정-멜로 <늦어도 그날까지>와 천지풍파 끝에 신구 가부장의 세대교체를 그려낸 가부장-멜로 <오늘은 왕>에서 새로운 멜로드라마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의 요청에 따른 가장 대중적인 문화 프레임으로서 장르를 발견한 김기덕은 덜 자의식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도전적이지는 않은 태도로 그것을 다룬다. 그는 거의 모든 장르를 횡단하다시피 했지만 많은 장르를 섭렵하는 것이 그의 관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 장르 그 자체가 아니라 60년대 한국 사회라는 컨텍스트와 그 속에 놓여 있는 당대인들(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김기덕의 장르 영화가 가진 특징들 즉 새로운 관객층의 유도, 스타 시스템의 활용, 자기 복제와 리메이크, 다른 매체로부터 온 서사의 영화적 번역, 다른 국가의 영화로부터의 영향, 혼종 장르적인 성격 등은 동시대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정치문화적 컨텍스트에 대한 그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적 비전을 넘어 다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모험가 기질로 충만한 이 대중친화적인 감독에겐 장르적 무의식 같은 게 있었는지도. 당대 '흥행보증수표'로서 최대 다수의 대중과 교감을 나누기 위한 그의 노력은 이제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60년대 이 다작 장인의 장르적 상상력은 작가 감독의 예술적 의지만큼이나 인상적이다.

글 강소원 부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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