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영화]
그대로 멈추어라 어둠 속에 깃든 아름다운 신비여
2011-10-10
글 : 송경원
죽음을 사색하는 영상시인, 알렉산더 소쿠로프와 <파우스트>

영화는 많지만 예술은 적다. 많은 이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대신 이야기를 읽고 나온다. 때로는 이야기마저 개의치 않고 장면의 스펙터클에 머문다. 눈물과 웃음을 구걸하는 이야기, 혹은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영상의 홍수. 어느 쪽이건 영화는 그저 소비된다. 아마도 영화는 회화가 멈춘 지점부터 출발한 원죄로 인해 창조되는 대신 복제되고 팔리는 쪽의 운명으로 기울어졌으리라. 그러나 영화를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자, 이른바 스스로 작가라고 불리길 바라는 자라면 이 참담한 현실에 저항해야 마땅하다. 이에 알렉산더 소쿠로프는 주장한다. “모든 작가는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고, 탐사하고자 하는 것을 탐사할 권리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적 후계자, 예술영화의 마지막 거장, 러시아 영화의 진정하고 유일한 계승자, 아름다움의 정수를 탐닉하는 이미지의 연금술사, 20세기의 마지막 영상시인. 알렉산더 소쿠로프를 향한 헌사는 실로 화려하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하다. ‘마지막’, ‘최후’ 따위의 수사는 마치 그가 지향하는 예술세계가 이미 저물어가는 것처럼 결정짓고 그를 단지 어려운 예술영화감독 정도로 격리시킨다. 칸 영화제의 숱한 부름을 받았던 알렉산더 소쿠로프 감독은 올해 황금사자의 선택을 받은 <파우스트>를 통해 스스로의 영화세계를 다시금 탐닉, 증명, 확장하며 우리 곁에 돌아왔다. 그의 영화는 러시아 예술에 대한 자부심으로 무장한 채, 죽음과 불행의 검은 세상으로부터 빛바래지 않을 아름다움을 건져 올리며 전진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전진은 멈추지 않는다

전대미문의 완벽주의자이며 유미주의자이기도 한 소쿠로프는 절대예술의 영역에서 세계와 대면한다. 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삶과 개인의 실존적인 죽음의 경계를 사색하는 것과 같다. 역사, 여행, 죽음을 반복하는 소쿠로프의 모티브는 회화적 전통을 경유하여 단일하고 단단한 세계를 형성해나간다. 소비에트 몽타주의 엄밀함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탐미적 영상미를 한 몸에 지닌 그가 러시아 영화 최후의 계승자라는 평가를 듣는 것은 (비록 본인이 달갑게 여기지 않을지언정) 당연하다.

1951년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태어난 그는 19세에 TV 방송국에 입사하여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특유의 스타일의 밑거름이 된다. 이윽고 그는 1975년 뒤늦게 러시아 국립영화학교(VGIK)에 입학하여 타르코프스키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1978년 첫 장편영화 <인간의 외로운 목소리>를 완성한 그가 서구에 알려진 건 타르코프스키가 헌신한 결과다. 소쿠로프의 초기작들은 1987년 해금 전까지 대부분 러시아에서 상영금지 되었는데, “거장이 될 재목이 정부의 탄압으로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고 있다”는 타르코프스키의 호소를 통해 조금씩 서방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진면목을 알리기 시작한 작품은 <러시아 엘레지>(1993)를 통해서였다. 스승 타르코프스키를 따라 서구로 이주하지 않고 죽어가는 조국의 숨 막히는 현장에서 완성해낸 이 작품은 역사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다큐멘터리와 극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탐미적 영상 실험의 결과물이다. 또한 그의 뿌리가 어디까지나 러시아 역사와 전통문화사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러시아 엘레지> <여행 엘레지>(2001)가 역사와 기억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면, 이번 작품 <파우스트>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몰로흐>(1999), <타우러스>(2000), <더 선>(2004)의 독재자 4부작에서는 역사, 사회, 정치적 배경으로부터 개인을 분리해 권력의 본질을 탐구한다. 실제 역사적 인물들을 내세운 탓에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몰역사적 행위가 아닌가 하는 일부의 비난은 그의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생긴 오해다. 소쿠로프의 탐구는 어디까지나 인간 특질에 관한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탐구이며, 이는 곧 또 다른 대표작 가족 삼부작 중 <어머니와 아들>(1997)과 <아버지와 아들>(2003)에서도 꾸준히 응시해온 화두, ‘죽음’에 대한 명상과 맞닿아 있다.

미학적 정제물에 집중하는 <파우스트>

<파우스트>는 각각 히틀러, 레닌, 히로히토를 주인공으로 했던 앞선 독재자 시리즈들과는 달리 괴테의 파우스트를 원작으로 한다. 실존 인물인 독재자들과 달리 소쿠로푸의 파우스트는 전혀 위험해보이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교수이자 연금술사인 지식을 갈망하는 인간일 뿐이다. 메피스토펠레스도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대금업자에 불과한 그는 매력적이지도 쾌락주의적이지도 않다. 괴테의 익살스런 창조물과는 정반대되는 이러한 인물들을 옥죄고 있는 것은 오로지 가난과 욕망이다. 소쿠로푸가 괴테에게서 발견한 것은 “불행한 사람들은 위험하다”는 단순한 명제에 한정된다. 그렇다고 독재자 4부작이 권력 이면에 묻힌 불행하고 초라한 인물들의 정치적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하는 영화는 아니다. 소쿠로프의 <파우스트>는 차라리 여행, 죽음, 탐미라는 미학적 정제물에 집중한다. 파우스트의 말처럼, “시대정신이라 불리는 것은, 실은 시대를 반영한 너희 자신의 정신이다.”

<러시아 엘레지>(상단), <아버지와 아들>(하단 좌측), <어머니와 아들>(하단 우측)

영화는 단일 플롯에서 벗어나 소쿠로푸식으로 재해석했기에 원작의 극적 구조는 애당초 무너져 있으며, 그의 다른 영화들에서 곧잘 발견되었던 화면의 일그러진 왜곡으로 안개 같은 정서를 차분히 쌓아간다. 특수필터와 거울 등을 활용해 변형된 이미지들과 정제된 실외 풍경은 쇠락과 불행의 냄새를 풍기며 화면에 스며들어 곰팡이가 핀 케케묵고 오래된 두꺼운 책처럼 변모했다. 이러한 이미지의 통제는 인물이 아닌 도시 자체를 하나의 캐릭터로 만드는데, 공간과 시간(혹은 서사)의 뒤섞임은 그의 미학에서 꾸준히 시도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도시는 현실적인 어떤 것을 삭제해나가며, 지옥과 연옥의 요소를 갖춘 어떤 곳-카니발의 장소로 변모한다. 소쿠로프는 그의 안개에 갇힌 듯한 장면을 여전히 애호하고 있으며 제한되고 격리된 세계를 창조했다.

<파우스트>의 많은 장면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상태로 희미하게 표현되었고 그것은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인상을 준다. 영화는 표현주의적이고 연극적이다. 이미지의 연금술사답게 <파우스트> 역시 색채와 화면의 질감이 완벽히 통제되며 소쿠로푸는 이를 통해 역사, 문학, 신으로부터 모든 연결을 격리시켜 나간다. “정치적인 언어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그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한 곳에서 개인의 삶-죽음-욕망을 관찰한다. 이 같은 단절과 응시는 소쿠로프 미학의 기저에 회화에 대한 갈망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이며, 예술의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이다.

알렉산더 소쿠로푸는 죽음을 명상한다. 때론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숭고한 풍경화의 롱테이크를 통해 침묵과 정지로 회귀하기도 하고(<어머니와 아들>), 때론 교차배열로 먼 곳의 풍경을 하나로 뭉개고 가르며 소비에트 몽타주의 극한을 보여준다.(<아버지와 아들>). 심지어 <러시아 방주>의 원숏 트래킹 쇼트의 완성마저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현란한 기술과 형식 실험이 아닌 정신의 탐구였다. 예술이란 메시지를 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색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영화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그의 작업이 과거의 망령이 아니라 영화의 미래가 될 때, 영화가 우리를 사유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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