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김상호] 자전거 탄 광대, 정상을 향해
2011-10-20
글 : 신두영
사진 : 최성열
<완득이>의 김상호

김상호는 산악자전거 타는 게 취미라고 했다. “한계령을 넘어보는 게 꿈입니다. 안개가 자욱한 한계령 길을 혼자서 넘어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페달을 밟고 있는 그 모습에 반해 그때부터 자전거를 타게 됐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봤다. 김상호가 자전거를 타고 한계령을 넘어가고 있다. 그가 봤던 그 사람처럼 말이다. 누군가 지나가다가 ‘힘내라’고 말을 건다. 그러면 그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상황 속에서도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네에~ 고맙습니다”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인다.

이 상상을 그의 연기 인생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지금 배우 김상호는 묵묵히 페달을 밟고 있다. 극단 청우의 배우로서 <남자충동> <인류 최초의 키스>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김상호는 실질적인 영화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그때 그사람들> <너는 내 운명> <타짜>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식객> <즐거운 인생> <전우치> <이끼> 등 지난 10여년 동안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지금까지 꽤 많이 온 것 같지만 그가 생각하는 정상에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욕쟁이 캐릭터가 이토록 사랑스럽다니

어느 배우든지 자신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려가겠지만 굳이 한계령 고갯길을 상상해본 것은 김상호라는 배우가 지금 어떤 도약의 시기 혹은 배우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올해 그는 MBC 주말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과 SBS 드라마 <시티 헌터>로 자신의 얼굴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그전까지 “도박 좋아하게 생긴 50대 이상 어르신들이 ‘왜 <타짜> 있잖아’” 하며 수군거렸다면 지금은 아주머니나 할머니가 먼저 알아본다. “동네 냉면집에서 후줄근하게 입고 냉면을 먹고 있으면 할머니들이 다가와 ‘좋다. 그래 좋아~’ 하면서 털이 난 얼굴에 뽀뽀를 할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이런 인기를 바탕으로 김상호는 케이블 드라마라는 새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11월 방영 예정인 정통 수사극 <텐>에서 김상호는 미결 사건 전담반의 일원으로 “연륜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감이 좋은 형사”를 연기한다.

올해 김상호가 드라마에서 재미를 보고 새로운 도약의 바탕을 마련했다면 그가 출연한 영화의 성적은 초라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미 3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바쁜 한해를 보냈다. <적과의 동침>에서는 한국전쟁 중 남쪽에 붙었다 북쪽에 붙었다 하는 백씨를 코믹하게 연기했다. <모비딕>에서는 알 수 없는 권력에 맞서 진실을 캐내는 기자 역을 맡아 오버하지 않는 연기를 선보였다. 말도 제대로 못 타는 기마경찰대원으로 나온 <챔프>에서는 능청스러운 연기로 웃음을 선사했다. 2011년 개봉영화들이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 못해서 그는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 이한 감독의 <완득이>에서 그는 쌍욕을 입에 달고 사는 ‘앞집 아저씨’로 등장해 웃음을 빵빵 터뜨린다.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인지 군용 ‘깔깔이’(방상내피)만 입고 다니는 앞집 아저씨는 입만 열었다 하면 걸쭉한 욕을 내뱉지만 비호감형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어떻게 시도 때도 없이 욕을 하는 캐릭터를 사랑할 수 있을까. “겸손을 떨어보자면 원작이나 대본에 다 나와 있는 거였습니다. 사랑스럽다는 반응이 나와서 다행인데 현장에서는 대사가 과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혹시나 과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앞집 아저씨가 나오는 장면이 고통스러울 수 있거든요. 그건 완벽한 사실이에요. 그렇게되면 작품이 망가지는 거니까 많이 조심했어요.” 조심을 한다고는 했지만 입에 붙지 않는 욕은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욕을 자신에 맞게 세심하게 바꿨다. 원작에 나와 있는 ‘씨불놈’의 ‘씨불’이 가짜 욕 같고 입에 맞지 않아서 ‘씨발’이 됐다. 그러면서 걱정하는 프로듀서와 감독에게 김상호는 이렇게 말했다. “대신 ‘씨불’ 같은 ‘씨발’ 할게요. 하하.”

<완득이>의 앞집 아저씨를 만들기 위해 김상호는 고향 경주의 시골을 떠올렸다. “<이끼>의 전석만 같은 캐릭터는 멱살 잡고 데려오려고 해도 못합니다. 그가 벌이면 저는 꽃입니다. <완득이>는 좀 쉬웠습니다. 제가 살아왔던 과정이 도움이 됐는데, 시골에 가면 꼭 욕하고 다니는 까탈스러운 사람들 있잖습니까. 그런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늘 욕을 하지만) <완득이>의 앞집 아저씨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그 사람에게도 가슴에 꽃이 있습니다. 향기가 독특하고 예쁘지 않을 수 있지만요.” 김상호는 욕쟁이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가 출연한 허진호 감독의 <호우시절>을 떠올려보자. 중국 지사장을 연기한 김상호가 한국에서 온 박동하(정우성) 팀장에게 “저녁에 소주 한잔?” 하면서 씨익 웃는다. 그때 그 미소가 그가 연기한 모든 캐릭터에 녹아 있다.

명품조연보다 기분 좋은 배우로

‘사람 좋은 웃음의 배우’라는 표현을 그는 좋아했다. 대신 ‘명품 조연’이라는 수식어를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배우에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형용사와 수식어가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그 수식어가 입맛에 맞다 안 맞다고 하는 건 좀 그렇지만 ‘명품’이라는 말이 조연에 붙었을 때 상대적인 박탈감이 컸어요. 내 이름 석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아직 내가 못났구나 싶은 거죠.” 혹시 ‘명품조연’이라는 표현을 꺼리는 이유가 ‘명품’에 방점이 있지 않고 ‘조연’에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싶어 주연에 대한 욕심은 없는지 물었다. “주연이 제 꿈은 아닙니다. 그건 제 꿈을 지나가는 간이역일 뿐입니다. 간이역도 사람이 사니까 기차가 서줘야죠.” 배우로서 얼마나 큰 꿈을 가지고 있기에 ‘명품조연’도 마음에 들지 않고, 주연도 간이역이라고 말하나 싶지만 진짜 그가 꾸는 꿈은 의외로 소박하다. 어쩌면 그것이 배우로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제 꿈은 현실적입니다. 어쨌거나 저의 모든 작품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억만년 남을 겁니다. 제 아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관객에게 ‘아~ 저놈 보면 기분이 좋다. 어~ 좋다. 힘난다’ 그런 느낌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다시 산악자전거를 타고 한계령을 묵묵히 오르는 김상호를 상상해본다. 그를 본 사람들이 ‘힘내라’고 응원할 때 김상호가 보이는 사람 좋은 웃음이 그가 연기한 영화 속 캐릭터가 관객에게 전하는 기분 좋은 웃음과 꼭 닮지 않았을까. 김상호는 “도약기라는 말이 와 닿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더 높은 목표가 있어서 행복하다”며 큰소리로 웃는다. 그의 웃는 모습은 마치 분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광대 같다. 자전거 탄 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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