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6일
나는 짐 싸는 일에 젬병이다. 가방 꾸리기에 대략 전체 여행일정의 3/5에 해당하는 시간을 소요한다. 여정이 4박5일이면 2박3일가량 슈트케이스를 열어 놓고 물건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한다. 막판에는 슈퍼마켓 치약 진열대 앞에서 찾아오는 패닉과 유사한 마비 상태에 이른다. 바지를 한벌 더 넣을 것인가 바람막이를 넣을 것인가 하는 사소하기 짝이 없는 갈등이 엄습하고,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민에 소모한 시간만큼 그 결정이 중차대하게 느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요컨대 생활에 무엇이 긴요한지 우선순위를 가리는 판단력이 떨어진다. 그 와중에 지난 1, 2년 사이 내 여행 보따리 구색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는 전자제품의 급격한 증가다. 노트북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지만 디지털카메라, 스마트폰, 태블릿PC, 무선 키보드, 혹시 운동이라도 할까 싶어서- 결코 하게 되지 않는다- 챙기는 소형 MP3에다가 이 모든 기기에 딸린 충전기와 어댑터, 헤드폰과 USB, SD카드 리더기까지 전파상이 따로 없다. 겨우 슈트케이스를 닫고 인터넷에 접속하니 방금 가방에 눌러담은 기기 대부분을 고안한 스티브 잡스가 타계했다는 뉴스가 퍼져나가고 있다. 한참 망연했다.
10월7일
<멜랑콜리아>의 티켓을 끊느라 아침잠을 설치고 택시까지 탔는데, 극장에 도착해서야 표를 방에 두고 왔음을 깨닫다. 자못 고무적인 영화제의 시작! 결국 곧 개봉할 개막작 <오직 그대만>을 서울에서도 발 들여본 적 없는 멀티플렉스 프리미엄 상영관에서 보게 됐다. 어두운 과거를 가진 격투기 선수(소지섭)와 시력을 잃은 착한 여자(한효주)의 사랑 이야기는 <시티 라이트>(그리고 약간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전적 공식을 충실히 따르며 여성 판타지를 충족시키고자 한다. <푸른 소금>과 <통증>에 이어 올가을 한국 멜로드라마는 오천련의 피 묻은 웨딩드레스로 상징되는 80년대 홍콩 누아르식 사랑으로 회귀해가고 있다. 어김없이 누선을 건드리지만 그 눈물들은 턱 끝에 맺히기도 전에 말라버린다.
지난해 연말의 영화 시상식이 내게 남긴 가장 멋진 기억은 박철민 배우의 따뜻하고 위트 넘치는 ‘시상소감’이었다. <오직 그대만>에서 주인공의 코치로 분한 박철민의 연기는 언제나 그랬듯 관객의 호의와 웃음을 불러낸다. 즉각적으로 드라마에 기운을 불어넣고 관객의 주의를 잡아채는 데에 더없이 유능한 그의 퍼포먼스는 감독들에게 매우 유혹적인 무기일 터다. 다만 그 연기는 이따금 ‘장면도둑’의 정도를 넘어서 영화 밖으로 뛰쳐나온다. 시장에서 무엇인가를 파는 듯한 호객의 느낌이 어투에서 어렴풋이 느껴져 멈칫할 때도 있고, 배우가 본인의 대사에 실제로 어느 정도의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물론 관객은 이 안정된 배우가 보장하는 재미를 즐기지만 그 즐거움의 자리는 간혹 영화 바깥쪽이다.
이자벨 위페르 사진전의 부산 개막식에 들렀다. 위페르는 인사말에서 초상 사진의 본질을 선명하게 요약했다. “여기 전시된 작품들은 정사진들이지만 하나하나가 이야기라는 점에서 영화와 연결됩니다. 이 사진들은 포토그래퍼들이 쓴 위페르의 전기인 동시에 그들의 자서전입니다.” 지난여름 전북 부안에서 홍상수 감독과 찍은 <다른 나라에서>의 후반작업 완료를 고대하고 있다는 대배우는 전날 밤 홍 감독으로부터 부산 명물인 3500원짜리 돼지국밥을 대접받고 맛에 감명받은 상태였다. 영화제 저녁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부산 LIG아트홀에서 영화음악 공연과 함께 공개된 홍상수 감독의 새 단편 <리스트>를 보러 갔다. 빚보증이 잘못되어 서해 펜션으로 몸을 피한 윤여정, 정유미 모녀가 여행 온 영화감독(무려 천만 감독) 유준상을 만나서 보내는 하루가 30분 러닝타임에 담겨 있다. 엄마 안마하기, 맛집 가기, 배드민턴 치기, 새로운 칫솔질법 개발하기 등등 극중 정유미는 하루 동안 할 일을 빼곡히 적어내려가고 그 리스트는 마법처럼 동시에 아주 천연덕스럽게 실현된다. 파도가 다듬은 조약돌처럼 한손에 쏙 들어오는 이 단단하고 깨끗한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소박한 믿음을 귀엽게 선포한다. “하루를 잘 살아내는 일이 제일 어렵고 중요해.”
10월8일
<도가니>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완득이>를 연달아 본 지난주가 마음 아픈 아이들의 주간이었다면 린 램지 감독의 <어바웃 케빈>과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을 본 오늘은 ‘무서운- 그리고 역시 아픈- 아이들의 날’이다. 한때 영국영화 기대주였던 린 램지의 세 번째 장편 <어바웃 케빈>의 주인공 소년 케빈은 그 사악함이 <오멘>의 데미안을 압도하는데, 호러영화 속 사탄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주의 드라마의 캐릭터라는 점이 영화의 포인트이자 개봉 뒤 논쟁의 초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들의 악마성을 누구보다 일찍 알아차리고도 본인의 삶이 제물이 되어가는 양을 뜬눈으로 쳐다보는 어머니 틸다 스윈튼은 <마더>의 김혜자가 연기하는 엄마와 기묘하게 닮았다. 한편 압구정동 중학교를 모델로 삼은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익숙한 학원물과 다른 구도를 취한다. 열등생들이 주먹질을 하는 게 아니라, 돈 있는 집 자식들이 공부도 잘하고 물리적 폭력도 독점하는 이 영화는 달라진 학원 풍경을, 한국사회의 단면을 비춘다. <돼지의 왕>에서 소년 캐릭터의 목소리는 김혜나, 김꽃비, 박희본 배우가 연기했다. 더빙은 배우가 통상 관객에게 타전하는 육체적 신호를 모두 차단한 연기다. GV에 나선 김혜나 배우의 체험담이 솔깃했다. “처음엔 후시녹음 비슷한 작업 아닐까 짐작했지만 전혀 달랐어요. 조금 당황했고, 그러다 얼마 안 가 날아차기 액션을 포함해 시나리오 속 연기를 고스란히 온몸으로하며 녹음하는 저를 발견했어요. 완성된 영화를 보는 지금은 캐릭터가 완전히 제 신체처럼 느껴져요. 말하자면 <아바타>적인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한 것 같아요.”
10월9일
오늘이야말로 바다를 보게 되는 걸까? 진행을 담당한 ‘배우 장근석과 로건 레먼의 만남’이 열리는 해운대 야외무대에 도착했다. 대기실 천막에 앉아 있자니 방금 무대인사를 마친 <더 킥>팀이 우르르 들어온다. 그 선두에는 타고난 호연지기가 축제를 만나 봉인을 뚫고 나온 예지원 배우가 있다. 어제 새벽까지 이어진 H감독님과의 술자리 숙취로 가늘어진 눈을 하고도 그녀는 의욕백배다. “GV에서 격파 시범해도 돼요?” 대책없이 사랑스러운 여배우의 물음에 스탭이 당황한다. “저어 격파는 조금 곤란할지도….” 행사 시각보다 10여분 늦게 겅중겅중 천막 속으로 걸어들어온 장근석 배우는 잠시 유연하게 리듬을 타더니, 날 향해 다짜고짜 호쾌한 한마디를 날린다. “트랜슬레이터?(통역)” 엉겁결에 운을 맞춰 대답해버렸다. “모더레이터!(사회자)”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근짱의 함정인가.
신작 <기적>을 들고 부산을 찾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마스터클래스. <기적>은 클라이맥스의 기적을 향해 이야기가 달려간다는 설정이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 이미 기적이 이뤄지고 있음을 불현듯 관객이 각성하게 되는 놀라운 영화다. 몇해 전 아시아에서 가장 재미난 인물 10인에 손꼽힐 다케나카 나오토 배우의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며 관객을 졸게 만든 엄청난 전력이 있는 나로서, 이 프로그램은 솔직히 부담스러운 임무였다. 그러나 시작 5분 만에 나는 모든 근심을 까맣게 잊고 진행자가 아닌 특석의 관객이라도 된 양 입을 벌리고 몰입해버렸다. 이야기가 <기적> 현장에서 어린 배우와 함께 완성한 연출의 사례에 이르자 급기야 마음이 동요해 훌쩍이기까지 했다. 시야가 개는 느낌을 받은 건 눈물 탓만은 아니었다. 마지막 숏에서 왜 아이들을 걷지 않고 달리게 했냐고 내가 묻자 감독님은 미소지었다. “애들은… 달리잖아요?” 강연이 끝나고 여성 관객 한분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전 유치원 교사인데요. 감독님이 아까 아이들은 달린다고 표현하셨을 때 정말 공감이 됐어요. 아이들은… 정말 그렇거든요.” 나는 이렇게 또다시 영화제를 사랑하게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