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다시 시작하라
2011-11-10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 영화적 명상인가 영화적 허세인가

과작의 감독 테렌스 맬릭의 다섯 번째 장편 <트리 오브 라이프>가 무성한 소문 속에 베일을 벗었다. 칸영화제는 황금종려상을 안겨주었고, 개봉을 앞두고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영화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시적인 영상과 음악, 삶과 죽음, 인간과 신에 대한 맬릭 특유의 통찰이 장엄하게 확장되었다는 견해들이다. 조금의 불평이라면, 이 영화의 초시공간적인 맥락이 이해하기 다소 어렵다는 반응 정도다. 지금까지 읽어본 평 중에서는 정한석만이 이 영화를 맬릭의 변증법이 “적극적이고 복잡하게 제시되고 시도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조직되고 활동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실패작이라고 보았다(<씨네21> 826호, “우린 아직 ‘생명의 나무’의 실체를 보지 못했다”). 일단 나는 이 영화가 맬릭의 실패작이라는 그의 결론에 동의한다. 이 영화에 매혹된 많은 이들이 <트리 오브 라이프>를 무언가 심오한 철학의 영화로 여길 때, 그건 철학적으로 보이는 인상을 철학적 궤적으로 착각한 결과라고 나는 의심한다. 말하자면 유려한 이미지의 움직임과 배열, 풍요로운 음악과 양극의 세계관에 대한 과감하고 심오한 접근 같은, 맬릭을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한 영화적 인장이 이번 작품에서만큼은 결정적인 함정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혹은 그런 인장들을 제대로 작동시키던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것 같다. 그동안 맬릭의 세계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관념이 이 영화에서 하는 역할은

표면적으로 <트리 오브 라이프>는 크게 두 줄기로 지탱된다. 한쪽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세 아들로 이루어진 미국의 어느 가정 내부의 이야기가 있다. 십대가 된 둘째아들의 죽음에서 시작한 영화는 중년이 된 큰아들(숀 펜)이 회상하는 어린 시절을 보여준다. 완고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자비롭지만 힘이 없는 어머니와 살던 그의 어린 날은 나약하고 불행하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유구한 불화의 역사, 이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다른 한쪽에서는 현실계의 개인들이 아닌 우주의 활동이 펼쳐진다.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가 생겨나고 그곳에 생명들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이 있다. 한편의 영화에서 남자-인류의 영원히 풀리지 않는 궁지와 우주의 기원, 창조의 비밀과 같이 인류가 감히 풀 수 없는 궁지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더없이 상투적인 질문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인류 한가운데에서 언제나 미답인 채, 우리를(실은 남자들을) 사로잡고 구속하는 본질적인 한편 실존적인, 관념적이고 신화적인 한편 구체적인 두개의 문제의식. 맬릭은 지금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대담하고 거대하며 어려운 작업에 도전하고 있는 중인데, 우리가 궁금한 건, 이 두 비밀의 해답이 아니라 이들이 영화적으로 어떤 활동을 통해 서로를 건드리는지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개인사와 우주적 질서를 포괄한 영화적 범위의 스케일이기보다는 충돌이든, 조화든, 둘을 서로에게로 끌어당기는 영화적 활동의 구조, 그 매듭의 짜임새여야 한다. 그때 <트리 오브 라이프>가 때때로 우리 눈을 황홀하게 만들 만큼 방대한 건 사실이나,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고 엉성하게 그 방대함을 유지해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빈약함과 엉성함에 관해서라면 영화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낀 몇몇 지점들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트리 오브 라이프>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영화가 아니라, 이미지로 묵상하는 영화로 받아들여지는 탓에, 사람들은 이 영화의 서사적 진행이 매끄럽지 않고 각 시퀀스 혹은 신에 구멍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중요하게 다루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대부분의 장면들은 세 가지 전제들-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어머니는 자애롭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억압에 고통스러워 한다, 어느 날 동생이 죽어 가족 전체가 상실의 슬픔에 시달린다, 이들은 신에게 절박하게 기도한다- 의 작동하에서 이해된다. 문제는 개별 장면의 구체적인 사연들이 그런 전제 안에서 중층적으로 맞물리며 또 다른 사유의 유기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영화 초반 이미 주어진 그 불변의 전제가 장면들 안에서 반복적으로, 그리고 분절적으로 이미지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인물들 사이를, 우주와 현실 사이를, 과거와 현재 사이를 미끄러지듯 흐르는 촬영과 편집이 그 헐거운 틈과 분절의 지점들을 가리고 있을 따름이다. 숏이 모여 신이 쌓이고 시퀀스가 되는 게 아니라, 마치 시퀀스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장면들이, 혹은 신을 대표하는 숏들이 선택되어 이어붙여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어떤 유기적인 세계를 창조하려고 할 때, 그 세계를 구조화하는 순서와 방식이 여기서는 뭔가 반대로 가고 있다는 걸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걸 결국은 관념으로 세계를 조직한 탓이라고 잘라 비판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맬릭에게 관념이 중요하지 않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초점은 관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에 맞춰져야 보다 적절하다.

<트리 오브 라이프>의 시간관을 들여다보니

나는 지금 이 영화가 직접적인 장면으로도 공들여 형상화하고 전체적으로 매혹되어 있는 우주적인 것의 쓰임새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중이다. 앞서 언급했듯, 인물을 중심으로 한 현실계가 이야기로 풀어지지 않고 이미지로 나열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 때, 그 이미지를 배열하는 유일한 기준, 혹은 동력은 이 우주적인 것에 있다. 잭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내재적 논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대신, 시종일관 화면 밖, 현실 너머의 원리에 지배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위에서 언급한 전제들은 현실의 이야기를 거치지 않고 곧장 우주적인 질문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우리 눈에 보이는 숏들의 세계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거나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숏 바깥 어딘가의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질문, 기도, 사운드, 음악, 추상적인 시간이 이 숏들을 자동적으로 밀고 나아가는 것 같다. 이렇게 그 자체로는 부실하기 짝이 없지만, 관념으로 환원되며 이어지는 숏들의 과정을 <트리 오브 라이프>는, 혹은 이 영화를 옹호하는 자들은, 숏들의 명상이라고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지만, 의외로 당연시되며 지나가버리는 질문 하나를 꺼낼 수 있다. 중년의 잭, 즉 숀 펜은 왜 존재하는가. 8시간가량의 완성본을 2시간대로 줄이면서 생긴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짐작해볼 수는 있지만, 영화의 중심이 온통 과거에 쏠려 있다고 해도, 어쨌든 이 영화가 중년의 잭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면, 숀 펜의 영화적 비중이 이렇게 턱없이 작다는 건 제기해볼 만한 문제다. 중년의 잭이 여전히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뿐, 우리는 그의 현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 영화는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구조를 취하면서도, 정작 인물들이 놓인 현실의 시간적 층위를 무화해도 상관없다는 듯한 이상한 태도를 보인다. 잭의 내레이션이 영화를 가로지를 때, 중년의 잭이 과거를 회상하는 것인지, 어린 잭이 현재의 자리에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인지, 어느 순간 종종 헷갈린다. 이 영화가 시간적 실험을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현실적 층위에서의 시간의 구체적인 변화에 무심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정한석의 말대로 <트리 오브 라이프>가 ‘실패한 변증법’의 영화라면, 나는 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영화의 시간관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맬릭의 전작들처럼 이원화된 세계관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주목할 것은 영화가 앞세우는 진화론, 창조론, 그리고 인간 남자(잭)의 역사 모두 결국은 변화하는 시간적 활동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을 하나의 영화에서 함께 다룬다는 건, 그 각자의 시간적 활동이 어떤 식으로든 포개지고 또 다른 층위로 갈라질 가능성을 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건 세계관의 이분화를 파열하는 시공간적인 활동이며, 그런 의미에서 만약 이 영화가 성공했다면, 맬릭의 필모그래피에서 세계관에 시간적 층위가 더해진, 가장 복잡한 영화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트리 오브 라이프>는 그런 기대를 따르지 않는다. 여기에는 오직 두개의 시간만이 있다. 추상화된 우주의 시간, 그리고 인간의 시간. 중요한 건 이 추상화된 시간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의 시간은 시간적 층위가 없어진 시간, 즉 자기 동일적인 시간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잭의 과거와 현재, 미래는 실은 이미지의 변화 그 이상이 아닌 동질적인 배경에 불과하다. 소년 잭과 성년 잭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

그동안 맬릭의 작품들이 대립되는 세계관을 품을 때, 그는 하나를 다른 하나의 구원으로 섣불리 설정하지 않았고, 둘을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게 가능했던 건, 영화가 양극의 세계를 끌고 와서 세계관을 대립시키는 대신, 그 둘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곳, 그 경계 위에 개인을 세워두었기 때문이다. 그 경계에서 전쟁이 터지기도 하고, 멜로가 피어나기도 했다. <황무지>가 사회/반사회를, <천국의 나날들>이 에덴/지옥을, <씬 레드 라인>이 문명, 전쟁/원시, 평화 등을 영화의 주요 틀로 삼으면서도 도식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세계가 겹쳐진 지점에서 그 모순의 시공간을 관찰하거나 직접 체현하는 인물들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전작들에서는 관념적인 것의 대립으로서의 개인적인 것이 중요했던 게 아니라, 그 관념적인 것들 사이에서 싸우는 개인의 구체성이 중요했다. 맬릭이 초기작에서부터 자신의 영화적 인장처럼 삽입한 빛과 불의 강렬한 이미지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만하다. 그 불과 빛은 무언가를 환하게 비추는 희망의 이미지이기보다는 충돌과 폭발을 의미할 때가 더 많았다. <황무지>에서 제임스 딘을 닮은 소년은 소녀의 아버지를 죽인 다음, 집에 불을 지르고, 활활 타오르는 집을 뒤로하고 둘은 ‘아버지가 없는 세상’으로 도망친다. 둘은 아무런 문명의 구속도 없는 숲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점차 무법의 세계로 빠져든다. <천국의 나날들>에서 에덴의 평화를 만끽하던 두 남자와 한 여인의 비밀이 밝혀지던 밤, 풍요로운 들판은 무시무시한 곤충 떼로 뒤덮이고, 불길이 치솟는다. 평화와 사랑과 기름진 자연은 모두 잿더미가 된다. <씬 레드 라인>에서 불은 원주민 아이들이 유영하는 투명하고 푸른 물빛에 대비되는 파괴적인 전쟁의 이미지 그 자체다. 말하자면 이 작품들에서 타오르는 불빛은 위태롭게 유지되던 경계의 무너짐이며 개인이 그 어떤 보호도, 억압도 잠시 제거된 상태에서 내던져지는 것이다. 폭발한 다음, 완전히 다 부서진 다음,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살아남게 될 것인가. 이 영화들에서 맬릭의 세계관은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지만, 그 세계를 사는 인물들의 내면과 행위는 사뭇 복잡했다.

여기에는 질문이 없다

그런데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사정은 좀 다르다. 여기서는 두개의 세계관 사이에 놓인 인물이라는 구도보다는, 우주론이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에 인물의 세계가 있는 것 같다. 우주론은 진화론과 창조론으로 섞여 있고, 인물의 내면은 (잭의 고백대로) 어머니의 세계와 아버지의 세계로 갈등한다. 즉, 이 영화는 대립하는 두 항이 아니라, 대립하는 여러 세트의 두 항들, 그리고 대립이라는 단어로 수렴되지 않는 항들로 얽혀 있다. 굳이 ‘변증법’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변증법 속의 변증법 속의 변증법… 그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정한석이 표현한 “열린 변증법”이라는 말이 필요한 영화다. 문제는 이 영화의 세계관은 전에 없이 복잡하게 공존해야 하지만, 맬릭의 전작들과 달리 그 안의 인물들의 내면과 행위는 지나치게 표피적이어서 그 세계관들을 단선적으로 병렬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물들은 관찰하는 자도, 체현하는 자도 아니라, 열려야 하는 변증법을, 개념을 고체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트리 오브 라이프>에 등장하는 불빛은 폭발하고 혼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혼돈을 삼켜버리는 빛이다. 불이 지나간 다음의 현실의 잿더미가 이 영화에는 없고, 태초의 빛이 모든 걸 환원한 다음의 신비로움,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는 위대한 가치들만 남는다.

맬릭의 지난 영화들은 화해를 말한 적이 없다. <씬 레드 라인>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우리는 그의 영화를 너무 쉽게 명상의 영화라고 단정해왔는데, 그의 작품들은 시적인 과격함을 통해 질문하는 영화들에 더 가깝다. 살아남은 자들, 살아야 하는 자들은 언제나 더 어려운 사태 속에 남겨졌다. 그때, <황무지>와 <천국의 나날들>에서 무법한 남자들은 죽어버리고, 천국을 지나 삶의 지옥에 홀로 남은 소녀들은 냉소적이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담담하고 그래서 신랄한 관찰자로서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내뱉었다. 20여년이 흘러 <씬 레드 라인>으로 돌아온 맬릭의 남자들은 참혹한 세계의 관찰자이자 당면자로서 이제는 세계가 아니라 신에게 처절하게 질문한다. 여기에 세상에 침을 뱉는 것만 같던 과거의 신랄한 소녀는 더이상 없다. 십여년이 지난 뒤 찾아온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인간은 개인적 고통에 휘청거리며 더 기도에 매달린다. 그 기도는 삶이 아닌 삶 너머가 더 가까운 곳에서, 인간 육체의 울부짖음보다는 ‘신적인’ 목소리로 울려 퍼진다. 그 어느 때보다 본질적인 질문이 영화 속 세계를 활동하게 하지도, 스스로 그 세계에서 활동하지도 못할 때, 우리가 두 시간이 넘는 동안 본 이미지들이 그 질문의 요란한 동어반복일 때, 이것을 영화적 명상이라고 말할 것인가, 영화적 허세에 다름 아니라고 볼 것인가. <씬 레드 라인>의 철학이 맬릭을 성공적으로 복귀시킨 뒤, 거기서 그의 세계가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나쁘게 퇴행한 예의 하나로 <뉴 월드>가 꼽혔다면, 안타깝게도 나는 이제 그 목록에 <트리 오브 라이프>를 넣는다. 감히 말하자면, 테렌스 맬릭의 세계는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시점에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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