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포커스] 함께 경험하는 영화를 위하여
2011-11-08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배리어프리영화설립추진위원회 <술이 깨면 집에 가자> <블라인드> 상영
(왼쪽부터) 안상훈 감독, 오오고치 나오유키 박사, 이은경 대표, 야마가미 데쓰지로 대표, 양익준 감독, 히가시 요이치 감독, 오성윤 감독이 배리어프리영화 심포지엄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극장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았다. 곧 극장 불이 꺼진 듯 주위가 어두워진 느낌이 들었다. 내레이터 배우 엄지원의 목소리가 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오로지 그 내레이션에 의지해 <술이 깨면 집에 가자>의 첫 장면 속 선술집으로 들어섰다. 한쪽 구석에서 한 사내가 혼자 빈 맥주잔을 흔들며 “한잔 더”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배배 꼬인 사내의 말투로 미루어 한두잔째가 아닌 듯했다. 갑자기 ‘쿵’ 하는 굉음이 났다. 무슨 소리지? 궁금증도 잠시, 엄지원의 내레이션이 사내가 바닥에 넘어져 있다고 전해주었다. 앓는 사내의 목소리 뒤로 난데없이 그를 ‘아빠’라 부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를 ‘여보’라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들은 또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금세 또 방금 등장한 가족은 남자의 상상이었다며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영화를 본다’가 아니라 ‘영화를 듣는다’는 게 가능할까? 히가시 요이치 감독이 연출한 <술이 깨면 집에 가자>의 배리어프리(barrier-free) 버전은 가능하다. ‘장벽 없는 영화’라는 뜻의 배리어프리 영화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 가이드와 청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자막이 포함되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영화다.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은 귀로 들으면 되고,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영화다. 직접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체험해보니 답답한 구석도 없지 않았지만 청각적 정보로만 따진다면 대체적으로 영상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한 사운드였다.

배리어프리영화설립추진위원회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10월28일부터 31일까지 배리어프리 영화 심포지엄을 열어 두편의 배리어프리 영화를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술이 깨면 집에 가자>와 함께 상영된 또 한편의 배리어프리 영화는 안상훈 감독의 <블라인드>였다. 물론 시각장애인이 ‘들은’ 영화, 청각장애인이 ‘본’ 영화, 비장애인이 ‘보고 들은’ 영화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시각장애인이 본 영화에는 사운드트랙만 존재한다. 청각장애인에게 영화는 언제나 무성영화다. 둘을 합친다고 비장애인이 본 영화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번 심포지엄은 차라리 그들의 동상이몽에 더 의미를 둔 행사였다. “앞으로 시행착오를 겪어야겠지만 우선은 장애인과 장애인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영화를 공유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리고 싶었다”는 것이 추진위원회 이은경 대표의 뜻이다.

배리어프리 영화, ‘장벽 없는 영화’라는 뜻

비슷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미디어접근성센터 황덕경 센터장이 상기한 바대로 “장애인을 위한 영화 해설은 이미 2001년 제1회 장애인영화제에서 <공동경비구역 JSA>가 상영된 이후 계속되어온 과제”다. 인권영화제도 비슷한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그간의 시도와 이번 행사에서 상영된 배리어프리 영화에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 번째로 외화든 국내작이든 이어폰 라디오 등의 부가 장비를 통해 해설을 참조할 필요가 없도록 한편의 영화 안에 음성 가이드와 자막을 모두 녹여냈다는 점, 두 번째로 실제 영화감독이 배리어프리 버전을 책임지고 연출했다는 점이다. <술이 깨면 집에 가자>는 원작의 감독인 히가시 요이치 감독이 만든 배리어프리 일본어 버전을 양익준 감독이 약간의 수정을 거쳐 한국어 버전으로 탄생시킨 것이고, <블라인드>의 배리어프리 버전은 원래대로 안상훈 감독이 맡았다. 그 결과 나온 두편은 감독의 연출의도를 그대로 살린 해설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오리지널 버전의 감독이 만들었다고 해서 훌륭한 배리어프리 영화는 아니다. 핵심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모두 고려한 균형이다. 어느 쪽의 눈높이에 맞춰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 묻는다면 아직 정답은 없다. <술이 깨면 집에 가자>의 히가시 요이치 감독과 같은 영화의 한국어 버전의 양익준 감독, <블라인드>의 안상훈 감독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배리어프리 버전이 “새로운 창작물”로서 비장애인에게 “재미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시각장애인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황덕경 센터장은 반대 의견을 갖고 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은 소리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제2의 창작보다는 정확한 해설을 원한다. 가령 한 TV드라마에서 남녀주인공이 싸운 뒤 말없이 삼겹살을 구워먹는 장면을 두고 비 오는 장면으로 오해한 시각장애인도 많았다. 그런 순간이 정말 해설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사실 영화 제작자들은 대부분 비장애인이다. 그들이 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 영화의 모법 답안을 정리하려다보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시각장애인인 오오고치 나오유키 박사의 다소 파격적인 견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쿄대에서 배리어프리 영화를 연구 중인 그는 장애인을 위한 정보 보장을 두 차원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점자, 수화에 대한 정보 보장은 필요하다. 장애인에게 중요한 언어니까. 하지만 오락 장르에서의 장애인만을 위한 정보 보장은 반대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감독의 것이라 생각한다. 객관적안 해설이란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감독님들은 각자 자신의 영화를 열심히 만들면 되고, 우리 장애인들은 ‘이 감독은 좋아, 저 감독은 싫어’ 열심히 논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웃음)” 그것이 일반 관객이고 싶은 장애인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배리어프리 영화가 극복해야 할 배리어가 무엇인지 점검하는 일이다. 시각장애나 청각장애 같은 신체적 장애, 상영관 주변의 문턱이나 계단 같은 물리적 장애만이 장애물은 아니다. 진짜 장애물은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동정적 시혜의식이다. “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 영화가 반대로 비장애인에게 배리어가 될 수도 있다. 비장애인 관객이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영화니까 해설이나 자막이 거슬려도 말하면 안되겠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보이고 들리는 입장에서 어떤 문제점을 느꼈는지 솔직히 말해주어야 논의가 진전될 수 있다”는 것이 오오고치 박사의 지적이다.

정부와 기업이 함께 움직여야

안타깝지만 한국의 환경은 시혜마저 아쉬운 상황이다. 일본은 그나마 장애인 복지를 담당하는 후생성에서 나오는 지원금과 대기업의 사회적 공헌사업 투자를 통해 매년 꾸준히 4∼5편씩 배리어프리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정부는 물론 대기업의 관심을 끌기마저 쉽지 않다. 황덕경 센터장은 근본적 의식변화 없이는 배리어프리가 “상징적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우려를 표한다. 그의 말대로 “배리어프리 버전도 상영 권리를 둘러싸고 저작권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겠지만 시청각 장애인들이 영화를 볼 권리가 저작권보다 상위 개념이다. 제작사, 배급사의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 추진위원회는 11월2일 국회 상영도 준비 중이다. “정부가 먼저 움직여주고 기업들도 따라 움직여주면 좋겠다”는 것이 이은경 대표의 바람인다. 과연 새바람이 불지 신중하게 지켜볼 일이다.

내년엔 에로영화를 배리어프리로…

배리어프리영화설립추진위원회의 이은경 대표 인터뷰

이은경 대표(맨 왼쪽).

-배리어프리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라면.
=<워낭소리> 일본 에이전트를 하던 당시 일본 배급사였던 시그로의 야마가미 데쓰지로 대표가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운 좋게 <워낭소리>가 제1회 사가배리어프리영화제에 초청돼 영화사 식구들이랑 다 같이 가서 봤더니 너무 신선하고 재밌더라.

-이번에 아쉬웠던 부분이 있다면.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분들께 모니터링을 못 받은 것이 제일 안타깝다. 여러 단체로부터 용어 사용, 자막 배열 등에 관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지적을 받았다. 시행착오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배우고 있다.

-직접 보니 아무 영화나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만들긴 어렵겠더라.
=사운드가 너무 많고 빠른 영화는 해설을 넣기 힘들다. 우선 잔잔한 가족용 영화 위주로 진행할 생각이다. 시각장애인이 주인공인 영화, 공동체 상영에 적합한 영화도 찾고 있다.

-다양한 배급 전략을 구상 중이겠다.
=내년 가을에 영화제도 열 생각이라 지방자치단체와 접촉 중이다. 에로 배리어프리 영화, 일명 ‘에로 바리’도 보여드리면서 색다른 축제를 만들어보고 싶다.

-<마당을 나온 암탉> <마이 백 페이지> 외에 제작 중인 영화는.
=<달팽이의 별>이라고 시청각 중복장애를 겪고 있는 인물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다. 오리지널 버전과 배리어프리 버전을 동시개봉할 생각이다.

사진제공 영화사 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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