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기너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월24일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오브라이언가의 요절한 둘째 아들을 연기한 소년 배우는 아버지로 분한 배우 브래드 피트와 혈연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닮았다. 확실히 연출 의도가 개입된 캐스팅이다. 외양만이 아니다. 소년은, 피아니스트를 꿈꿨으나 결국 회사원으로 주저앉은 아버지가 여가에 건반을 두드릴 때면 먼발치에서 기타로 바로 받아 변주할 만큼 음악적 재능까지 이어받았다. 오브라이언씨가 차남에게 유독 엄하고 가혹하게 굴었던 까닭은 이 소년 안에서 ‘남자’가 되기 전 여리고 어렸던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자란 열아홉의 청년이 자신이 가장 사랑받은 자식이었다는 사실도 미처 알지 못한 채 먼 곳에서 죽어갔으리라는 짐작이 <트리 오브 라이프>의 비탄을 사무치게 한다.
마이크 밀스 감독의 <비기너스>는 평생 우정어린 관계를 유지했으나 열정은 결여된 부모- 아버지는 게이였다- 사이에서 외동으로 자란 남자가, 사랑에 대한 깊은 체념을 극복하고 머뭇머뭇 한 여성과 진지한 관계를 시작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트리 오브 라이프>를 두번 떠올렸다. 한번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주인공 올리버(이완 맥그리거)가 그린 <슬픔의 역사>라는 작품이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슬픔의 역사>는 우주의 광막한 역사와 개인의 미시적 역사를 병치한 <트리 오브 라이프>의 이야기를 소박한 스케일로 옮긴 판본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두 영화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징검다리는, 부자로 분한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이완 맥그리거가 무척 닮았고- 특히 눈매와 턱- 맥그리거의 유년을 연기한 아역배우도 관객이 보자마자 아무런 설명없이 어린 올리버임을 알 수 있을 만큼 맥그리거와 닮았다는 사실이다. 한 인물의 아역과 성인 연기자 사이에서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동일성을 발견할 때면 나는 작은 희열을 느낀다. 그것이 인위임을 알아도 마찬가지다. <비기너스>에는 인상적 장면이 있다. 소년 올리버가 우울해하자, 엄마가 갑갑할 때는 힘껏 고함을 지르면 시원해진다며 아들을 방에 들여보내고 문을 닫는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소년은 방문을 열고 나와 고개를 젓는다. 그런 건 내게 소용없어요, 엄마. 이미 자기에게 맞는 고통의 해소법을 판별할 줄 아는 아이. 이완 맥그리거가 연기하는 38살의 올리버가 하는 행동과 말투 갈피갈피에는 그 소년이 살아 있다. <비기너스>의 아름다움은 그런 사소한 귀퉁이에서 피어난다.
10월25일
<비기너스>가 불가피하게 연상시키는 또 다른 텍스트는 폴 오스터의 중편소설 <고독의 발명>이다. 두 작품 모두 죽은 아버지의 유물을 정리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만 <비기너스>의 올리버는, 아버지의 유적을 통해 평생 이해할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초상을 고고학자의 태도로 재구성하는 <고독의 발명>의 폴 오스터와 다른 입장이다. 그는 임종 전에 아버지와 소통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올리버에게 주어진 과제는 아버지의 복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삶을 거울삼아 메마른 자신의 인생을 복구하는 일이다.
오늘날 영화는- 심지어 슈퍼히어로마저 포함해- 결함있는 인물들에 집중한다. 그것이 ‘현실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지배적 경향의 부작용은 실제로 우리 주변에 엄연히 존재하는 매력적인 인간형이 스크린에서 배제된다는 점이다. <비기너스>는 흉터를 가졌으나 타인에게 자기 고통의 여파를 전가하지 않는 원숙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단정하고 우아한 이 영화가 “캘리포니아 여피의 에세이”라는 일부의 경멸을 피할 길은 없을 테지만 캘리포니아 여피도 스크린에서 재현될 권리는 있다. 문제는 단지 재현의 방식이다. 실제로 마이크 밀스의 파트너이며 많은 영화적 공통점을 가진 미란다 줄라이 감독의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을 보았을 때 나 역시 주저했다. “아, 우리는 권태롭고 외로워요. 그러나 그것이 정녕 아름답지 않은가요?”라는 도취된 목소리가 어렴풋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기너스>에는 그러한 낙오자적 자축의 기운이 훨씬 덜하다. 미란다 줄라이와 마이크 밀스의 영화를 비아냥거리는 평자들은 흔히 “자기 배꼽을 응시하는 영화”라는 숙어를 쓴다. 굳이 말을 보태자면 나는 그 배꼽이 충분히 깊다면 아무런 불만이 없다. 배꼽이든 겨드랑이든 어디를 응시할지 결정하는 건 오직 예술가들의 몫이니까.
10월26일
초등학생 시절 어느 해인가 오늘은 당시 대통령이 저격당했다는 급보에 세상이 뒤집혔던 날이다. 어른들은 술렁였고 그중 일부는 통곡했으며, 꼬마였던 우리는 영문도 모르면서 두려움에 떨었더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오늘은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날이다. 오래전 그날은 나의 미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는 혼란 가운데 지나갔지만 오늘은 다르다. 나는 이제 정치와 내 사생활의 관계를 조금은 안다. 성인이 되어서 보람있는 몇 안되는 일 중 하나다. 인정하기 기껍지는 않지만 <비기너스>에 호감을 느낀 까닭도 나이와 무관하지 않다. 언젠가부터 나는 늙어가는 일을 두렵지 않게 만들어주는 영화들에 정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비기너스>에서 나를 미소짓게 한 장면 중 하나는 암에 걸려 남은 날을 헤아리는 올리버의 아버지 할이 소일거리삼아 예수의 일대기를 다시 쓰는 대목이다. 그는 노쇠하여 설교를 할 수도 멀리 걸어다닐 수도 없게 된 예수가 천수를 다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고쳐쓴다. 그리고 성경의 십자가 수난에 대해 아들을 향해 이렇게 촌평한다. “그건 너무 폭력적이야.” 베들레헴의 말구유도, 동방박사도, 갈릴리 어부의 그물도 모두 은유라면 어떨까라고 이따금 상상했던 나는 키득거렸다. 사실 정색하고 생각해보면 신약은 굉장한 이야기다. 인간의 죄를 굽어보던 신은 왜 그것을 대속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 처참하게 죽게 하는 길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을까? 기괴하기 짝이 없고 너무도 문학적이다. 어쩌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이야기다. 기독교가 발휘하는 지속적 매혹의 큰 부분은 혹시 그 이야기의 바닥 없는 불가해함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10월28일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레스트리스>(Restless)를 보고, 뒤틀린 맥락에서 영화 제목에 공감하고 말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제목 그대로 좌불안석 전전긍긍이었다. 주인공인 꽃다운 청년(헨리 호퍼)과 아가씨(미아 와시코스카)는 끊임없이 죽음을 시뮬레이션한다. 청년은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본인도 혼수상태에서 죽음을 경험한 바 있으며, 여자에겐 현재진행형의 불치병이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 장면을 재연하는 놀이를 비롯해 그들은 온갖 방식으로 죽음을 극화함으로써 공포를 완화하려고 한다. 그처럼 영화 전체가 가상의 죽음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스트리스>에는 진짜 죽음의 눅눅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인물 중 한 사람이 시한부 인생인데도 마지막 순간이 오기까지는 한없이 청결하고 아름답기만 한 숱한 멜로드라마 중 하나. 인정하기 싫지만 반 산트는 그런 영화를 필모그래피에 보탰다. 그에 대한 애정을 회복하기 위해 집에 돌아가면 <엘리펀트>나 <파라노이드 파크> DVD를 다시 보겠다는 건전한 결심을 했지만 의지박약한 나는 그저 딸기 아이스크림 반 리터를 단숨에 퍼먹는 것으로 손쉽게 욕구불만을 무마하고 자기혐오에 빠져 금요일 밤을 보내고 말았다.
10월31일
살면서 할로윈을 별난 명절로 의식한 적은 없지만 올해는 유서깊은 호러 명가 해머필름의 신작 <웨이크 우드>의 시사회가 밤 10시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하극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조명없이 깜깜했다. 만약 설정이었다면 효과 만점. 두번쯤 발목골절의 공포를 맛보았으니까. 티켓 배부처에서 반겨준 극장 프로그래머 J씨는 목에 두른 빨간 스카프를 가리키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진짜 무서워 보이려고 했는데 철이같이 됐어요.” <은하철도 999>의 철이다. 내 좌석은 C9. 상영시작을 기다리는 5분간 분위기가 제법 할로윈스럽다. 우선 옆자리 관객의 일갈. “에이, 자리번호가 C8이 뭐야!” 곧이어 옆 열에 앉은 관객이 동행에게 엄포를 놓는다. “너, 무섭다고 시끄럽게 하면 죽여버릴 거야.” 아아, 더없이 적절한 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