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우주라는 휴머니티
2011-11-24
글 : 김효선 (영화평론가)
테렌스 맬릭의 낙원상실기 <트리 오브 라이프>

<실낙원>의 집필 당시, 시인 존 밀턴은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생을 헌신했던 정치적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미 여러 명의 자식들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양쪽 눈마저 완전히 실명한 상태에서, 그는 천지창조와 인류의 타락에 대한 장대한 서사시를 구술하기 시작한다. 태고의 신화를 통해 현실의 질곡을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밀턴처럼 고통은 때로 범우주적인 시간관을 요한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영겁의 시간 속에 현재를 하나의 점으로 위치시킴으로써 비로소 비극적 현실을 마주할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트리 오브 라이프>가 담아낸 우주적 시간도 이 맥락에 닿아 있다. 아들을 잃은 오브라이언 부부의 슬픔과 중년의 잭이 느끼는 염증은 곧 우주의 빅뱅과 생명체의 탄생에 대한 숭고한 이미지들로 이어진다. 마치 영화의 서두에 쓰인 욥기의 한 구절(“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을 화면에 옮긴 듯, 일차적으로 이 이미지들은 신이 어디에 있으며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묻는 내레이션에 대한 절대자의 답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 답변을 얻기 위한 간절한 기도 자체의 현현이기도 하다. 불길이 치솟고 땅이 요동하며 장엄한 음악이 울려퍼지는 동안 무너져 내리는 삶을 붙잡고자 하는 격렬한 기도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이 우주적 비전의 핵심은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그 절대적인 힘을 향해 재차 질문을 던지도록 만드는 가혹한 삶의 조건에 있는지도 모른다.

비일상적인 세계로의 초대

영화는 오브라이언 부인의 기도를 뜨거운 우주 이미지로 대체하고, 중년의 잭이 빠져든 상념들을 초시간적인 공간 속에 배치한다. 그리고는 정작 오브라이언 부부가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의 과정과 잭이 죽은 동생을 떠올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고 있다. 잭의 경우는 아마도 러닝타임을 대폭 줄인 편집의 탓이 클 것이고, 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간혹 묵은 상처가 갑자기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다. 오브라이언 부부의 경우는 훨씬 더 의도적인 생략으로 보인다. 만약 이 대목이 좀더 상세하게 그려졌다면 우주적인 이미지들은 현실의 이야기와 정서적으로 긴밀히 공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맬릭은 드라마적인 취약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과정들을 생략했다. 그리고는 흥미롭게도, 그 생략된 시간의 자리에 잭의 유년기를 확장해 채워넣고 있다. 바로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이면 회상의 중심이 유년기여야 했을까?

유년의 잭은 이른바 ‘순수’에서 ‘경험’으로의 이행기를 거치고 있다.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어두운 실체들과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중이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무력감으로 괴로워하고, 부모에게 첫 불복종을 범하며, 비밀스러운 죄를 짓고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친구의 익사를 목격한 뒤 죽음의 의미를 인지하고, 스스로 제어하기 힘든 강렬한 감정 속에서 방황을 이어가기도 한다. 맬릭은 잭이 삶의 여러 부조리를 감지해나가는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며, 선과 악의 구분 이전 무지와 순수의 세계로부터 그 구분이 초래한 모순과 갈등의 세계로의 편입 과정을 보여준다. 잭을 중심으로 일종의 ‘낙원 상실기’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에덴에서의 추방을 암시하듯, 이 유년기의 회상은 잭의 가족들이 원치 않은 이사를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선과 악의 모태와 ‘순수’의 문제는 맬릭이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주제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서 자연은 인간의 타락 이전, 순수의 상태에 가까웠다. 문명의 규준에서 벗어난 <황무지>의 숲이나, 탐미적인 <천국의 나날들>의 대지, 아름답고도 무정한 <씬 레드 라인>의 전장, 그리고 <뉴 월드>의 원시는 인물들의 사랑과 배신, 삶과 죽음의 배경이자 인간사적 비극의 대조항으로서,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내적 원리를 갖고 있었다. 맬릭의 인물들은 자연의 상태를 열망했고, 또한 그것에 좌절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연과 인간 세계와의 낙차를 경험할수록 내레이션은 절대자를 향한 직접적인 질문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씬 레드 라인>의 인물들은 “이 어둠도 당신에게서 나온 것인지” 혹은 “이 끔찍한 죄악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와 같은 질문을 읊조리며 내적 전투를 이어간 바 있다. “선과 악이 하나”였던 원시적 순수에 대한 향수는 결국 최초의 타락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졌고, 이는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어떻게 당신을 (처음) 잃게 되었는지”라는 잭의 내레이션으로 발현된다. 영화 속의 유년기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트리 오브 라이프>는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처절했던 어떤 시작 지점을 향해 간다.

<천국의 나날들> 이후 맬릭은 독특한 편집 리듬을 고수해왔다. 일반적인 재현 방식에서 벗어난 숏의 연결, 화면을 가득 채운 음악과 화려한 카메라워크는 관객을 어떤 비일상적인 세계로 초대했다. 맬릭은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이 편집 스타일을 극대화한다. 점프 컷과 인서트는 반복되고, 신과 신은 물론 한신 내의 숏과 숏도 맥락없이 연결될 때가 많다. 회상이라는 틀은 아마도 이러한 편집 방식의 일차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기억의 조직은 불완전하며 균열되어 있고, 그 조각들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급작스럽게 부딪히며 도약한다. 유년기의 기억을 구성하는 것은 완결된 서사 단위가 아니라, 그저 강렬한 감정을 유발시켰던 순간들, 광각렌즈로 찍힌 왜곡된 이미지들처럼 필시 주관적인 심리에 의해서 과장되었을 어떤 인상적인 이미지들이다. 그 기억 속에서 엄마는 귀밑머리를 날리며 천사처럼 하늘을 날고, 아버지는 잔디를 움켜쥐거나 피아노를 치는 두터운 손 혹은 그저 벌건 목덜미로 남는다.

우리는 이렇게 간절해본 적이 있는가

회상신의 이미지들은 소년 잭이 느끼는 환희, 불안, 호기심, 두려움 등의 심리적 기제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감정들이 인과관계를 따라 고양되는 것은 아니다. 잭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억압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영화는 이 두 인물을 하나의 전형에 고정시키지 않는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잭의 보이스 오버는 종종 아들들과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오브라이언의 모습 위로 흐르며, 그가 아이들을 벌주는 장면과 다독이는 장면은 매우 짧은 호흡으로 교차된다. 이 같은 편집점들은 잭이 느끼는 사소한 감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의 진통을 좀더 거리를 두고 지켜보도록 만든다. 그 결과 화면에 남는 것은, 성공을 꿈꾸지만 결국 “먼지 같은” 현재에 주저앉고 마는 아버지 오브라이언과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무력감을 느끼는 오브라이언 부인, 살부(殺父)의 욕구 속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놓지 못하는 잭, 그리고 이들 가족을 둘러싼 중층의 긴장이다.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온몸으로 그 긴장을 겪어내는 동안, 눈부시게 아름답던 시절은 지나가고, 잭은 ‘순수’를 잃는다. 그러나 순수의 상실이 절망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금기를 넘고 가혹한 삶의 조건들을 체감하는 동안 화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의 순간들도 산발적인 이미지들과 함께 스쳐지나간다. <뉴 월드>의 대사를 빌리자면 “상처를 입고서도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급격한 추락의 자리에서도 기도와 연대는 이어지고, 그 기도는 때로 우주만큼 자란다. 그 우주야말로 휴머니티가 아닐까.

<트리 오브 라이프>에는 앙각으로 찍힌 숏이 많다. 아이들이 잔디밭에서 뛰어놀고, 여인들이 빨래를 널며, 오브라이언 부인이 기도를 할 때, 태양은 늘 나뭇가지 틈새로 화면 한쪽에 걸쳐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인간의 시점이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태양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해바라기에 대한 영화다. 맬릭은 영화의 시작과 끝, 두번에 걸쳐서 해바라기 이미지를 삽입한다. 좀 상투적인 비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맬릭의 비유는 노골적일 때가 많았다. <황무지>는 신선하고도 강력했고, 이후 맬릭의 영화는 점진적으로 나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트리 오브 라이프>는 이러한 판단을 늦추고, 나를 돌아보도록 만든다. 어지러운 삶의 조건 속에서, 과연 우리는 우주를 품을 만큼 간절히 씨름한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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