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말이면 <씨네21>은 기자와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그해의 영화를 정리하는 설문조사를 한다. 그중 핵심은 한국영화 베스트 5편을 꼽는 일이다. 때문에 웬만한 기자들은 찬바람이 불어오면 ‘올해의 베스트는 뭐였더라’ 하고 반추하는 게 본능 수준이 됐다. 얼마 전에도 후배들과 맥주를 마시던 중 비슷한 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분위기가 팍 다운되고 말았다. 각자 몇개씩은 꼽았지만 풍성한 리스트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5편을 다 채우지 못하는 후배도 있었다.
한국 대중영화에 뭔가 이상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은 몇년 전부터 들었다. 그만그만한 영화들은 적지 않게 쏟아지지만 알싸하고 진한 맛이 있는 영화는 갈수록 줄어든다는 느낌이다. 소재나 표현양식이 각기 다른데도 요즘 한국영화들은 어딘가 비슷하다는 인상마저 준다.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감동적이며 적당히 좋은 점을 가진 영화들의 범람. 10년 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다. 2001년 한국영화의 목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 윤종찬의 <소름>, 정재은의 <고양이를 부탁해>, 송해성의 <파이란>, 김기덕의 <수취인불명>, 곽경택의 <친구>,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임상수의 <눈물>, 김대승의 <번지점프를 하다>, 김성수의 <무사>, 곽재용의 <엽기적인 그녀> 등등. 힘이 있고 자기 색깔이 뚜렷하며 확고한 입장이 있는 영화들이 주류를 누볐다. 반면 지금 한국영화계는 범작을 양산하는데다 주목할 만한 신인감독도 점점 줄고 있다.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대기업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의 이른바 ‘표준화’된 영화제작 공정이 지금처럼 밋밋한 영화들을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예비 관객을 상대로 모니터링을 하고 편집본까지 모니터링하는 이 시스템은 어느 정도 합리성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영화업에 뛰어들어 한동안 대규모 적자를 감당해야 했던 대기업으로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수익성을 평준화하는 방안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대자본으로서 갖춰야 할 필수요소인 ‘예측 가능성’ 차원에도 이런 시스템은 도움을 줬을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영화를 ‘계량화’한다는 점 그 자체라기보다 창작자를 변방에 둔 채 영화를 만든다는 점이다. 이 시스템에서 영화를 주도하는 것은 자본이다. 감독과 프로듀서의 생각과 창의력은 자본이 제시하는 수치에 맞춰 재단될 수밖에 없다. 최근 한국영화의 수익률이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이는 데는 이러한 시스템의 영향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래는 심히 걱정된다. 지지부진한 영화들에 언젠가 관객은 진저리내지 않을까. 참신한 신인이 등용되지 않는데도 한국영화는 지속 가능할까. 한국영화 특유의 역동성이 줄어드는데 해외시장이 한국영화에 여전히 관심을 가져줄까. 물론 우리는 대기업이 한국영화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적극 인정한다. 다만 그들이 영화에서 오랫동안 이윤을 얻기 위해서라도 창작자를 시스템 중심에 다시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