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이 영화들 무한 RT 해주세요 (2)
2011-12-09
글 : 이영진
'서울독립영화제2011' 추천작 12편
<구천리 마을잔치>

<구천리 마을잔치>

감독 강진아 | 극영화 | HD | 38분 | 2011년
개량 파프리카 시범 재배 마을로 선정되어 떠들썩한 구천리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이장과 마을 청년들은 목없는 여인의 사체가 며칠 전 종적을 감춘 신애의 것이라고 단정한다. 스릴러의 문법을 끌어들였지만, 누가 죽였을까보다 누가 죽었는가에 관심이 쏠린다. 흥미로운 건 죽은 신애가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장과 병재에게 신애는 탐스러운 몸을 가졌던 ‘그녀’이고, 숙행과 형근 엄마에게 신애는 표독하기 짝이 없는 ‘그년’이다. 마을 사람들의 엇갈리는 진술 속에서 신애는 구천리 구미호가 된다. 장면마다 모습을 바꾸어 등장하는(심지어 배우도 바뀐다) 신애가 마을 사람들의 욕망과 죄의식이 투사된 희생물임이 드러날 때, (오프닝의) 잔칫날 곡소리가 전하는 음산함도 곱절이 된다.

<요세미티와 나>

<요세미티와 나>

감독 김지현 | 극영화 | 디-시네마 | 43분49초 | 2011년
캘리포니아에 있는 산을 연상하는 건 좋지만, 산악영화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요세미티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복귀해 만든 첫 번째 매킨토시다(스티브 잡스가 요세미티산에서 결혼식을 올리긴 했다). 김지현 감독이 요세미티를 손에 넣은 건 9년 전. 직접 편집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기쁨도 잠시, 그녀는 출시된 지 1년 만에 고물이 되어버린 요세미티를 붙잡고 씨름해야 한다. 재연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온 <요세미티와 나>는 독립영화감독 김지현의 악전고투 다이어리이자 컴퓨터와의 요상한 연애담이다. 자투리 일상을 특유의 농담과 구성진 수다로 엮어 ‘네버 엔딩 스토리’를 빚어내는 김지현 감독의 재주는 여전하다.

<이어도>

<이어도>

감독 오멸 | 극영화 | HD | 86분23초 | 2011년
머리에 흰 광목을 두른 앳된 얼굴의 여자가 망부석처럼 초가집에 앉아 있다. 미동도 않던 그녀는 어느새 가파른 절벽에 올라서 포대기에 싼 아이를 던지려 하지만 이내 포기한다. 돌아오는 길에 갈대밭에서 여자는 한참을 운다. 누군가를 원망하며 서럽게 운다. 이청준의 동명 소설이 전하듯, 제주도 사람들에게 이어도는 고통없는 낙원이자 구원의 이상향이었다. 바람의 섬에 살던 여인들은 배 타고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면 죽었다고 여기지 않고 이어도로 떠났다고 믿었다. <이어도>의 여자도 그러하다. 이어도로 훌쩍 가버린 무정한 남편을 가슴에 묻고 아내는 아이를 어르고, 힘찬 자맥질을 한다. <어이그, 저 귓것> <뽕똘> 등을 연달아 관객 앞에 내놓으며 제주 독립영화의 존재를 알렸던 오멸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전에 그는 <이어도>에 대해 “우리를 위한 영화를 만들면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길 바랐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풍경으로서의 제주도가 아니라 실체로서의 제주도를 담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이어도>는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더 나아가 흐느낌으로 점철된 섬의 역사를 모티브로 삼은 진혼가다. 느린 카메라에 담긴 섬은 그래서 아름답기보다 처연하다. 극중 여자의 말은 소거되어 있는데, 자신의 말을 들어줄 누구도 없는 여자(섬)를 위한 항변처럼 보인다. 여자의 말을 대신하는 건 끊임없이 반복되는 구슬픈 선율과 마지막 대목에 사투리로 낭독되는 시다. 미술, 공연예술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감독의 이력을 눈치챌 수 있는 장면들도 눈에 띈다. 섬의 공간들은 연극무대처럼 열리고 닫히고, 여자의 몸을 노려보는 군인들의 모습은 섬뜩한 역사화 같다. “섬이 묻어둔 이야기를 찾아본다. 그리고 섬의 이야기를 듣고 섬의 이야기를 본다. 수십여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말을 걸어준 섬에게 감사하다.”(오멸)

<어머니>

<어머니>

감독 태준식 | 다큐멘터리 | HD | 100분 | 2011년
“우리 전태일이는 안 보이네.” 이소선은 전태일 열사 40주기 기념 연극 <엄마, 안녕>의 포스터에 새겨진, 노동현장에서 죽어간 넋들의 이름을 하나씩 곱씹더니 한참 뒤에야 자신의 큰아들 얼굴이 없다고 타박한다. 포스터에 가장 크고 또 선명하게 찍혀 있는 큰아들 전태일의 얼굴을 이소선은 왜 단박에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어머니>는 생전에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얼마 전 고인이 된 이소선에 관한 인물다큐멘터리다. 제 몸을 불사른 아들을 대신해 투사가 됐던 어머니 이소선은 어느새 당뇨와 협심증으로 고생하며 혼자서 거동조차 어려운 할머니 이소선이 됐다. 기약없이 고공농성을 벌이는 김진숙을 걱정하고, 4대강 삽질에 가시돋힌 말을 날리지만, 이소선은 더이상 예전처럼 집회에 나가 구호를 외치지 못한다. “내일부터 싸우러 댕기믄 안될까?” 피가 돌지 않는 저린 발을 매만지며, 한숨 대신 담배연기를 뿜는 이소선의 갑갑한 마음을 태준식 감독의 카메라는 오랜 친구처럼 금세 알아차린다. 감독이 이소선과 화투판을 벌이면 카메라는 뒤로 물러나고, 감독이 이소선의 발톱을 깎아주는 동안에 카메라는 딴청을 피운다. <어머니>는 죽음을 예지한 이소선의 긴 작별인사이기도 하다. 모조리 빠져버린 아랫니 때문에 발음이 분명치 않지만, “권력없으면 사람 아니냐”고 거듭 평등을 외치는 이소선의 신념은 또렷하다. <어머니>에서 가장 뜨끔한 순간들은 팔팔한 이소선을 담은 과거의 기록들이 흐를 때다. 매년 11월이 되면 전태일의 무덤 곁에서 이소선에게 꽃다발을 안기고 기념사진을 찍었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돼야 삽니다. 하나가 돼야 이깁니다”라고 이소선이 마이크 들고 외칠 때, 환호성을 질렀던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나를 낮춰야” 세상이 바로 보인다는 이소선의 마지막 신신당부가 장면마다 도장처럼 꾹꾹 새겨져 있다.

<낙원>

<낙원>

감독 김경진, 정민영 | 애니메이션 | HD | 13분 | 2011년
모든 생명이 말라죽은 사막. 모래에 파묻힌 통조림을 캐서 가까스로 배를 채우던 펭귄은 죽은 고래를 발견한다. 한동안 양식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고래는 큰 몸집을 가졌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펭귄이 고래의 등짝에 도끼를 찍자 죽은 줄 알았던 고래가 눈을 끔뻑인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인 <낙원>은 생명에 관한, 윤리에 관한, 무엇보다 연대에 관한 우화다. 냉혈한 킬러의 모습을 한 펭귄이 결국 고래를 푸른 바다에 놓아주는 건, 고래가 꿈꿨던 낙원과 자신이 품었던 낙원이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서다. 또한 펭귄이 다시 사막으로 돌아오는 건 낙원이 더이상 허상의 신기루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막도시 서울에 관한 김영근, 김예영 감독의 애니메이션 <도시>도 추천한다.

<리코더 시험>

<리코더 시험>

감독 김보라 | 극영화 | HD | 28분30초 | 2011년
은희는 외톨이다. 가족 누구도 막내 은희를 돌보지 않는다. 리코더 시험을 앞두고 은희는 투정을 부려보지만 별반 소용이 없다. ‘나, 그때 정말이지 너무 아팠어.’ 종종 과장의 어법으로 이입을 요구하는 성장담과 달리 <리코더 시험>은 주인공과 적절한 거리두기를 선택했다. 은희가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사랑해’라고 중얼거리거나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지친 엄마에게 사랑을 재촉하는 장면들이 오래 잔상을 남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햇살로 가득한 은희의 유년의 뜰에 가족의 차가운 침묵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순간들 역시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1988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단지 복고의 장치로만 활용하지 않은 것도 <리코더 시험>의 매력이자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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