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2011’(이하 서독제)이 12월8일부터 16일까지 서울 CGV압구정에서 열린다. 국내에서 가장 큰 독립영화 축제지만, 올해 서독제는 어느 해보다 힘든 상황을 맞았다. 11월 초까지 영화제를 치를 돈도, 상영관도 마련하지 못해서다. 그럼에도 영화제를 차질없이 치를 수 있는 건 역대 가장 많은 출품작 685편(장편 65편) 중 엄선한 48편(단편 37편, 장편 11편)의 경쟁작과 31편(국내 27편, 해외 4편)의 초청작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한알티: 내멋대로 해라’라는 슬로건 아래 촘촘하게 배치된 약 80편의 상영작 중 시놉시스만으로도 구미가 당기는 12편의 작품을 골랐다.
<피로>
감독 김동명 | 극영화 | DV | 81분 | 2011년
아이가 운다. 매미도 운다. 세탁기가 울자 TV가 운다. 샤워기도 운다. 비행기가 울고 나니 뒤질세라 하늘도 운다. <피로>는 지친 울음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어떤 소음도 아영의 ‘권태’와 두성의 ‘태만’을 깨우지 못한다. 아영과 두성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건설사의 하급업체 관리자로 일하는 두성은 몇달째 월급을 받지 못했다. 아영은 아파트 내 세탁소에 취직하지만 두성은 직장마저 잃고 만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아영의 물음에 두성은 묵묵부답이다. 장마가 시작된 어느 날, 아영은 세탁물에서 돈뭉치를 발견하지만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집으로 가져와 식탁 위에 올려둔다. 두성은 아영이 훔쳐온 돈뭉치를 들고서야 집 밖으로 나간다. 무거운 침묵의 공기가 지배하는 <피로>는 두 남녀의 지루한 공생기다. 두성과 아영 사이에 대화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두성의 태만은 자신을 내팽개친 결과이고, 아영의 권태는 곁에 누군가가 없음을 확인하는 행위일 뿐이다. 권태와 태만에 사로잡힌 두 남녀의 지지부진한 섹스를 몇 차례 보여주면서, <피로>는 두성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 유령이고 아영이 더이상 내줄 것 없는 숙주임을 넌지시 일러준다(아영이 칼을 휘두르지만 두성이 좀처럼 죽지 않을 때, 두성은 살아 있는 유령이다. 두성이 아이처럼 아영의 젖가슴을 빨지만 쾌감을 들이켜진 못할 때, 아영은 말라 죽어가는 숙주다). 일상의 중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탄성을 잃어버린 채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잉여인간’으로 연명해야 하는 두성과 아영은 그저 서로에게 배설구로만 기능한다. <이상한 나라의 바툼바>(2008)에 이은 김동명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김동명 감독의 오랜 파트너이자 무용가이기도 한 정아영이 아영 역을 맡았는데 그녀의 핏기 없는 무표정은 오랜 잔상을 남긴다.
<애드벌룬>
감독 이우정 | 극영화 | 디지베타 | 24분 | 2011년
여고생 효정은 우연히 초등학교 친구인 은미를 만난다. 밤에 만나자는 단짝 지연에게 거짓말하고, 효정은 은미를 따라 한 아파트 옥상의 술자리에 참석한다. <애드벌룬>의 주된 정서는 ‘들뜸’이다. 교복 입은 소녀들은 ‘화장실의 똥’을 보면서도 아이돌 스타라도 만난 것처럼 ‘꺅꺅’댄다. 공기보다 가벼운 소녀들의 웃음엔 욕구도, 불안도 담겨 있다. ‘도돌이표’ 같은 일상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소녀들의 예고없는 일탈은 어이없는 결과를 낳고, 밑도 끝도 없는 뜬소문의 진원이 되고 만다. 하늘을 나는 애드벌룬엔 비활성 기체가 가득하다. 비활성이란 다른 원소와 섞이지 못하는 성질을 뜻한다. 그 많던 애드벌룬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어느 쌀쌀한 보름밤>
감독 김태엽 | 극영화 | HD | 9분26초 | 2010년
그 남자가 그 여자와 마주한 건 버스 정류장이었다. 버스가 끊긴 것 같다며 함께 택시를 타자는 그 여자. 조금 더 버스를 기다려보자고 주저하는 그 남자, 두 남녀의 우연한 만남은 어떻게 끝이 날까. <어느 쌀쌀한 보름밤>은 이를테면, 스트리트 부킹 스토리다. “감리교와 장로교의 차이는 뭘까요” “그게 다 정치예요” 느닷없이 동행하게 된 두 남녀가 실없는 대화를 나누고, 어이없는 장난을 벌이고, 그러다 헤어진 뒤 몇번을 뒤돌아보는 건 모두 어느 쌀쌀한 보름밤 탓이라고 해야 하나. ‘뭔지 모를 벅참, 이 기분을 뭐라 불러야 할까.’ 극중 삽입된 노래처럼, 반달 두쪽은 ‘슬그머니’ 서로에게 이끌린다. 마법에 걸린 듯이.
<야간비행>
감독 손태겸 | 극영화 | HD | 21분14초 | 2011년
소년은 낯선 남자와 만나 동침한다. 애초 약속받은 돈을 다 받지 못하자 소년은 다음날 남자를 찾아가는데 이번엔 사랑을 요구한다. 소년의 사랑이 비행(非行)이든, 비행(飛行)이든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소년의 야간비행은 절대로 누군가의 눈에 띄어선 안된다. 동성애와 원조교제를 다룬 <야간비행>의 매력은 자극적인 소재에 있지 않다. 카메라는 두 남자의 성행위를 보여줄 땐 직접적으로 다가서지만, 그들의 마음을 들을 때는 자꾸 머뭇거린다. 소년이 들키고 싶지 않은 건, 남자가 들키고 싶지 않은 건, 그러니까 그들의 위험한 섹스가 아니라 그들의 흥분된 감정이다. 소년 역할의 조민호에게 끌리는 관객도 분명 있을 듯. 올해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서 3등상을 수상했다.
<레드마리아>
감독 경순 | 다큐멘터리 | HD | 98분 | 2011년
누군가의 엄마는 위안부였다. 누군가의 엄마는 창녀라고 했다. 누군가의 엄마는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불렸으며, 누군가의 엄마는 이주노동자라는 딱지를 떼지 못했다.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누군가의 엄마는 한국에도, 일본에도, 필리핀에도 있었다. <레드마리아>는 가난하고 부끄럽고 무지한 엄마들을 찾아다닌다. 마닐라에서 평택으로, 정읍에서 가와사키로, 오사카에서 올롱가포로. 화대로 아이들을 키우는 필리핀의 매춘 여성들, 1천일 넘게 텐트를 치고 복직투쟁을 벌이는 한국의 비정규직 여성들, 유급휴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일해온 일본의 이주노동 여성들,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해왔던 그들의 노동은 더럽고 무가치하다며 이제 폐기처분될 위기에 처해 있다. 피부색이 다르고, 말이 달라도, 3국 여성들의 아픔은 똑같이 붉은색이다. 그렇다고 <레드마리아>가 통증만을 호소하는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과거를 암세포처럼 몸에 지니고 살던 여성들은 카메라를 편지 삼아 얼굴도 모르는 서로를 다독이기까지 한다. 사토가 한국말로 부르는 <철의 노동자>를 들어보라. 한국의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을 향한 연대의 노래가 아닌가. “한국과 일본이 친했으면 좋겠다. (정부) 대신 사죄한다”는 마짱의 전언은 한국을 거쳐, 60여년 전 일본 군인들에게 집단 성폭행당한 필리핀의 할머니들에게도 건네진다. <레드마리아>는 그러니까 고통만큼 치유를 기록하고픈 희망엽서다. 절망보다 희망,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됐던 가편집 버전과 가장 다른 부분이기도 하다.
<줄탁동시>
감독 김경묵 | 극영화 | HD | 117분 | 2011년
주유소에서 일하는 준은 함께 일하는 순희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 순희에게 추근거리다 준에게 발각당한 사장은 며칠 뒤 준을 해고한다. 현은 고급 아파트에서 30대 남자 성훈과 동거하고 있다. 성훈은 현과의 관계를 못 미더워하고 버거워한다. <줄탁동시>의 영어 제목은 ‘국적 없는(stateless) 것들’이다. 두만강 건너 탈북해 남한에 정착한 준이나 중국을 떠나 남한에 불법체류 중인 조선족 순희나 똑같은 처지다. ‘국적 없는’을 ‘경계 없는’이라고 바꿔 불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현과 성훈의 사랑 역시 주어진 경계를 위반함으로써만 성립한다. 도망다니는 준과 갇혀 사는 현은 뿌리내리지 못하고 혼란의 바다에서 부유하는 청춘이라는 점에서 일란성쌍둥이다. 줄탁동시는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면 제힘만으론 불가능하고, 어미 닭이 동시에 밖에서 알을 쪼아야 한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그러나 이 10대 소년들 곁에 어미 닭은 없다. 준과 현이 만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극단적인 의식을 감행할 때 그들은 체념 상태다. 물론 그들은 끝까지 바둥거린다. 백일몽 같은 준과 현의 섹스는 부화를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폭력을 관객에게 투척했던 김경묵 감독의 전작 <얼굴없는 것들> <청계천의 개>를 떠올리고, 몸을 사릴 것까진 없다. <줄탁동시>는 충격 효과보다는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데 더 공을 들인 영화니까. 능란하지 않으나 낯선 방식으로 진심을 전하는 배우들, 불규칙적인 감정의 굴곡을 되레 리듬 삼아 인물들을 묘사하는 카메라, 모두 감각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