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의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의 생물학적 불쾌감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그 이후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되살아났고 나는 이성의 힘으로 그것을 누르기 위해 애쓴다(이것은 현재형이다). <섬>을 보고 나서 나는 ‘눈과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었으나 이해하는 시늉밖에 할 수 없었던 ‘거세 공포’를 여성적으로 재현한다면 바로 저것일까?’라고 잠시 생각했다. 10년 전 <나쁜 남자>를 부산에서 처음 보고 밤새 비난했던 나는 며칠 뒤 친구가 던진 한마디 때문에 모든 비판을 유보했다. 너무 오래되어 문장 자체는 잊었지만 요지는 ‘우리나라 영화에서 김기덕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세계를 대변한 이들이 있어?’였던 것 같다. 그는 한국영화에서 한번도 자신의 세계를 보여줄 수 ‘없었던’ 계층의 인물을 스크린으로 불러들였고 그들의 욕망을 거칠게 형상화했다. 그 인물들은 문화적 ‘상징 자본’을 가져보지 못했던 감독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었으며, 세련되지 않은 화법은 다른 방식의 진정성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가 불러일으키는 불쾌감의 근원을 찾아서
나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나의 불쾌감은 ‘세련된 문화’에 대한 강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여성의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과 폭력적인 성(性)의 성(聖)스러운 전이 과정을 상징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사회적으로 여전히 약자이며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온전히 목소리 내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던 여성으로서의 ‘나’와 현금 자본은 없지만 제도권 교육 안에서 배울 만큼 배웠기에 상징 자본을 누렸다고 할 수 있는 ‘나’가 무한 분열되었다. 거울로 거울을 비추는 것처럼 두 질문은 서로를 정반대로 반사하며 끝없이 반복되었다. 두 질문을 단순하게 요약하면 ‘그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 폭력적일까?’와 ‘내가 그의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폭력적일까?’였다. 이때 ‘나’라는 주체의 자리에는 김기덕의 언어와 영상에 대한 거부감을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지식 체계/ 문화 권력의 계열체들에 대한, 그리고 그 판을 좌지우지할 권력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들과 공모하고 있으며 제도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주체로서의 비루한 죄의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머무를 것 같았던 김기덕은 유럽을 경유해 한국 ‘예술영화의 메인 스트림’이 되었다. 이 형용모순 같은 존재 방식은 영화에서 예술의 인장을 찍어주는 최고의 권위를 지닌 ‘유럽’의 지역성과 역사성 그리고 자국 내 일반 관객과 영화산업의 외면이 결합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아리랑>에서 감독은 명백히 유럽의 영화인들을 향해 발화하며 그들을 위해 폐인 생활 혹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접고 감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가 대한민국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자본에 관한 것이고 상심한 그를 위무할 수 있는 것은 유럽의 상징 자본이다(이에 관해서는 <씨네21> 832호 김영진의 글에서 상세하게 논하고 있다). 자신을 ‘작가’로 호명해준 유럽의 영화제를 상기하며 황홀경에 젖고 자신에게 등돌렸던 한국의 감독과 제작자를 저주하며 이제는 절대 복귀할 수 없는 ‘야생인’ 김기덕을 복기하며 연기한다.
<아리랑>에서 김기덕은 지긋지긋할 만큼 ‘아리랑’을 부른다. 영화를 만들 수 없는 객관적인 상황과 정신적 고갈을 ‘한’과 연결시키고 이를 즉각적으로 ‘아리랑’으로 치환하는 이 단순한 공식은 김기덕 영화의 전형적 화법이다. 이 전형성이 자국에서는 ‘단순성’으로, 해외에서는 ‘초월성’으로 해석되었던 것은 아닐까? 김기덕의 영화적 언어는 ‘번역’의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생성되는 거리감과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번역될 때 생산될 수 있는 신비감이 그의 영화를 유럽에서 유통시킨 문화자본을 형성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을 것이다. <아리랑>의 ‘아리랑’은 기묘하게도 그가 자국에서 영화를 만들 수 없게 만든 데 일조한 한국 관객으로서의 죄의식을 ‘사하여 준다’. 김기덕은 ‘아리랑’을 통하여 ‘한국적인 것’을 소비하는 감독 김기덕을 전면에 내세웠고 이 문화상품의 내포 구매자는 한국 관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기덕식 비디오 저널인 <아리랑>은 분열된 감상 체험에 기이한 면죄부를 주는 작품이다.
<아리랑>을 거쳐 <아멘>을 보고 난 뒤 나는 변성찬 평론가의 안도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화해의 몸짓 또는 미래에의 약속’을 읽는 데는 동의할 수 없었다. 영화 속 여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헤매며 ‘이명수’를 찾다가 방독면을 쓴 사내에게 강간을 당하고 낙태를 하려다가 그의 말에 설복당해 포기한다. 그녀를 설득한 방독면 사내의 간청은 여성의 입장에서 읽으면 소름끼친다. ‘이 세상에 내 아기가 나오게 해주세요. 나를 위해서.’ 이처럼 지독하게 남성중심주의적인 강요가 있을까? 그것은 ‘경찰에 자수해서 벌을 받을게요’라는 사법적 차원의 응징과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감정적 차원의 호소로 무마되지 않는 것임에도 이 영화는 ‘용서’와 ‘구원’이라는 기독교적인 상징과 그녀가 찾던 ‘이명수’는 결국 방독면 사내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불교적 깨달음을 접합함으로써 봉합해 버린다.
변성찬은 그녀가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영화가 <나쁜 남자>로부터 벗어났다고 했지만, 그녀는 정말 자유로웠는가? 그녀를 움직이는 최초의 동인은 ‘이명수’의 흔적이며, 그녀로부터 이동의 자유를 빼앗거나 다시 선사하는 것은 방독면 사내다. 그녀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방독면 사내에게 감시당하고 있으며,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분명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신발부터 승차 요금까지 적선을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행보는 진정 자유로운가? 모든 사건은 그녀의 육체에서 일어났음에도 그녀는 자신의 육체에 대해 한번도 자기 결정권을 가진 적이 없다. 그녀는 약에 취해 강간의 순간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며, 자신의 돈과 물건들을 천천히 돌려받으며 ‘사육’당하고 낙태를 결심하는 순간 다시 납치되어 설득당하며 강간범을 붙잡고도 그를 고발하지 못한다. 그리고 경찰서 앞에서 방독면 사내를 ‘이명수’로 호명함으로써 범죄 자체를 무화해버린다. 그럼으로써 방독면 사내가 벌을 받든 안 받든 그것은 여성의 선택이 아니라 온전히 사내의 선택으로 남게 된다.
<아멘>이 진정한 깨달음을 주는 순간은…
강간범의 아이를 낳는 여성의 실제 멘털리티는 두 가지가 아닐까? 하나는 정신적 패닉 상태에서 낙태에 대한 선택권을 갖지 못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범인의 아이가 아니라 나의 아이라는 결단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 방독면 사내는 ‘나의 아이’를 ‘나를 위해’ 낳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앙증맞은 아기 양말을 그녀의 가방에 밀어넣는다. 그녀가 두 번째 병원에 갔을 때 자발적으로 돌아선 것은 그의 말을 이해해서였을까? 이 부분이 모호해지는 것은 방독면 사내의 편지가 불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왜 한국 여자에게 불어로 편지를 썼을까? 그것은 <아리랑>과 마찬가지로 <아멘>이 수화자로 삼고 있는 상징 세계의 국적을 밝혀준다. 동시에 영화 속의 한국 여성과의 명료한 의사소통을 방해한다. 불어는커녕 영어조차 더듬거렸던 그녀가 그의 편지를 이해했을까? 그녀는 오히려 편지의 내용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편지의 수신자는 육체의 주인인 여성이 아니라 그녀의 육체를 경유해 도달해야만 하는 유럽(파리, 베니스, 아비뇽)이므로.
<아멘>이 진정한 깨달음을 주는 순간은 여자가 현실적인 법의 체계를 초월한 지점도, 강자와 약자의 룰을 무화한 지점도, 자신의 행로를 좌우하던 이명수로부터 벗어나 다른 이명수를 호명하기 시작한 지점도 아니다. 그녀가 성당으로 들어가 미사를 훔쳐보는 순간이다. 그녀가 마리아의 살아 있는 현현임을, 그녀의 몸에서 일어난 폭력이 용서와 구원의 상징으로 전이되는 기적을 강변하기 위해 선택된 이 단순 화법은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낳는다. 그녀가 마리아상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에게 가해졌던 폭력의 순응 과정과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태어난 아기 예수의 기적이 오버랩되면서 그 모든 것이 결국 강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마련된 신화가 아닐까라는 의심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이해하려는 그 강박 자체가 결국 잘못된 문화 체계 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는지 회의하게 된다. 아! ‘하늘엔 영광, 땅에는 축복’이 가득한 아기 예수의 생일이 있는 이달에 이토록 불경스러운 해석을 선사하신, 그리고 그것이 기대고 있는 문화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 <아멘>의 우연한 깨달음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