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1. <북촌방향>
공간과 시간과 기억의 기묘한 체험
<북촌방향>이 올해의 영화 1위다. 압도적인 표차였다. 3분의 2에 가까운 필진이 <북촌방향>을 1위에 올리는 진기록이 세워졌고 그로써 2위에 오른 영화와의 격차도 유례없이 컸다.
문득 북촌에 불시착한 것처럼 보이는 한 남자. 그의 불명료하며 정의하기 힘든 이 여행은 놀랄 만큼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안겨주었고 그에 상응하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근거는 여러 갈래다. 혹자는 “패턴에 대한 강박과 패턴화로부터 탈주하려는 해체의 에너지가 한몸을 이룬 기묘한 텍스트”(장병원)라고 구조적 가능성을 해명했다. “서울 강북에 애정을 혹은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한창호)라고 말할 때에는 이 영화에 담긴 공간과 시간과 기억의 기묘한 접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과 기억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축적되는 축과 매번 원점으로 돌아가는 축, 둘의 엇갈림이 팽팽하고 아름답지 않다면 모호함을 위한 모호한 술책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북촌방향>은 기적적인 균형을 지탱하며 클라이맥스에서 두 시간축을 충돌시켜 예기치 않은 파토스까지 끌어낸다”(김혜리)는 의견은 <북촌방향>의 시간감이 어떻게 충만한 감정까지도 불러오는가에 대한 꼼꼼한 설명이다. 마침내 “언어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진정 ‘영화’라는 세계의 유혹”(남다은)이라는 찬탄까지도 낳았다. 북촌의 거리와 술집과 음식점들, 그곳을 첫 방문 혹은 재방문하는 사람들, 하지만 확정지을 수 없고 다만 헤매고 유보하는 것만이 운명임을 알게 해주는 사건과 시간들, 그 느낌을 끌어올린 형식적 모험들, 덕분에 솟아나는 스산하고 두려우며 동시에 아름다운 감정들. <북촌방향>의 그것들은 눈처럼 쌓이고 쌓여 올해 많은 이들의 마음에 수북하게 남았다.
베스트2. <두만강>
장률 감독은 황량한 현실의 풍경을 거두절미하고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두만강>은 그가 부르는 고향의 노래다. 이 노래는 따뜻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대신 냉혹하고도 정직하다. 그 겨울에 두만강 인근 마을을 찾게 된 북한의 소년과 그를 맞아 친구가 된 조선족 소년의 미래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지 못했다. 그들의 현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잔혹했다. 여기에 장률 영화의 의지가 있다. 감독은 간극을 두고 허술하게 눈을 감아버리는 대신 치열하게 응시해내는 쪽을 택한다. 장률 영화의 그러한 영화적 진실함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 결과다. “때로는 삶의 부조리를 강변하는 것보다 말없이 바라보는 것이 더 큰 힘을 갖는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장률 영화의 ‘현재까지’의 최고작. 계속해서 그의 작업을 기대하게 만드는 걸작. 죽음처럼 무겁게 추락하는 삶의 현실들이 서늘하게 가슴속을 파고든다”(김지미)는 의견이 대표적이다.
베스트3. <무산일기>
“분단과 계급에 관한 지층해부도. 사실적이고 신랄한데다 슬픈 정서까지 놓치지 않았다.”(이화정) <무산일기>의 순하고 선량한 탈북자 전승철은 죄짓지 않으며 열심히 살았으나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무능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순박하고 착한 사내를 남한의 패배자가 되도록 만들었는가. <무산일기>는 말 그대로 일기처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써내려간다. 무너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고 쫓으며 또 쫓는다. 남한사회의 바퀴에 짓눌려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는 전승철의 안타까운 모습이 거기 담겨 있다.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분명하고 인물의 감성을 끌어내는 힘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올 한해 각종 세계 영화제를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신인 감독의 작품으로 급부상했는데, 국내 평단에서도 그에 걸맞은 지지를 받고 있음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베스트4. <파수꾼>
<파수꾼>은 두 가지 점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감독의 젊고 활기찬 개성이 무한하게 엿보인다는 점에서 일단 주목을 끌었고 동시에 그 신인 감독이 지금 한국영화가 그토록 목말라하는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러했다. “윤성현이라는 오래도록 위력을 발휘할 대형 신인의 등장. <파수꾼>을 위시해 올 한해 연이어 나온 독립영화 수작들은 상대적으로 충무로 주류 영화계가 얼마나 창의력이 고갈되어 있고 나태한 상태인지를 증명했다”(이동진)는 평과 “윤성현은 우리가 주목할 만한 스토리텔러다. 작은 오해가 불러일으킨 관계의 파국이라는 영화의 주제로 극적 구조를 만드는 능력이나, 이를 통해 인물이 겪는 오해의 과정을 관객 역시 경험하도록 하는 것 역시 스토리텔러로서의 그의 능력을 증명한다”(안시환)는 평은 그래서 나왔다. 올해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다.
베스트5. <황해>
“무모하고 장렬한 실패의 스펙터클.”(김영진) “납득할 수 없는 광기를 공공연하게 드러낸 마지막 한국영화.”(주성철) <황해>를 1위로 뽑은 평자들의 의견 중 대표적인 의견이다. <추격자>로 단숨에 한국 대중영화의 보물로 떠오른 나홍진 감독이다. <황해>가 그의 영화에서 좀더 본격적이고 대담한 시도가 될 것이라는 말은 일찌감치 돌았다. 말 그대로였다. 적어도 액션을 밀어붙이는 힘은 근래 동종의 어떤 한국 대중영화와 비교해도 가장 강력하다. “무모하고 장렬한 실패”라거나 “납득할 수 없는 광기”라는 표현에는 물론 이 영화의 과욕을 지적하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단점조차 끌어안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이라는 뜻이 더 강할 것이다. 부분의 실패조차 껴안게 하는 뜨거운 매력 발산의 영화가 바로 <황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