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하정우] 프로파일러형 배우, 하정우
2012-01-23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황해> <의뢰인>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 <러브픽션> 촬영, 그리고 백상예술대상에서 내건 약조를 완수하기 위한 국토대장정과 9일간 세편의 단편영화를 릴레이로 찍는 프로젝트. 2009년 12월부터 최근까지 두해 동안 하정우가 일과 일 사이에 가졌던 가장 긴 휴식은 보름 남짓에 불과했다. “해보니까, 부작용이 있더군요.” 실험 결과를 보고하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의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이 근면한 배우가 안타까워 속엣말로 물었다. 저, 그걸 꼭… 해봐야만 아나요? 윤종빈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 <범죄와의 전쟁>에서 부산 폭력 조직의 젊은 보스 최형배로 분한 하정우는 꼭 필요한 장면에만 나와 정확한 점에다 바둑돌을 놓아 집을 짓고 슬쩍 물러나는 연기를 한다. 조금 말하고, 가만있다 느닷없이 몰아서 움직인다. 러닝타임의 상당량을 거의 무성영화처럼 대사도 없이 상대도 없이 몸만으로 연기했던 <황해>의 구남과도, 프레젠테이션하듯 줄곧 유창한 <의뢰인>의 강성희 변호사와도 접점이 없다.

엄밀히 말해 <범죄와의 전쟁>은 최민식이 연기한 지극히 한국적인 갱스터 최익현의 영화다. 가진 실력과 내용이 없어도 연줄을 이리저리 당겨 그럭저럭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가능한 오묘한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내의 일대기다. 최형배는 세관원 익현이 최초의 마약 암거래를 시도하는 지점에서 드라마 속으로 입장한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최형배의 신조는 익현한테도 예외가 없지만 “집안 종친이시다!”라는 아버지의 일갈에 대뜸 예의를 갖추는 광경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또 한번 극히 한국적이다. 암흑가의 거물로 서서히 성장하는 익현이 형배에게 품는 감정이 동경과 뒤섞인 오기라면 형배는 어떤 심정으로 익현을 바라보는 걸까? “카바레에서 형배가 익현을 자기 사람으로 받아주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자마자 익현은 그 자리에서 마주친 과거 직장상사에게 위세를 떤다. 곧장 호가호위하는 그 모습에 형배는 익현이 아이처럼 순수한 자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다가 유치장에서 익현이 자기를 빼주는 사건을 겪으면서 유용하기도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신뢰를 갖게 된다.”

하정우는 근본적으로 프로파일러다. 새로운 인물을 연기할 때마다 기존 작품의 유사한 캐릭터를 수집하고 상통하는 면을 가진 실제 주변인물의 습벽을 채집하는. 부산 로케이션 촬영 3개월 동안 윤종빈 감독은 하정우를 부산 고향친구들에게 맡겼다. 그들에게서 하정우는 부산에서 나고 자라 사업하는 남자들의 품새를 포착했다. “24시간 중 23시간은 대화할 때 눈도 잘 안 맞추는데 술이라도 취하면 마구 애교를 부린다. 캐릭터의 비약이 엄청 심하더라. (웃음)” 70, 80년대 영화를 보며 요즘보다 각이 크고 절도있는 남자들의 몸가짐도 익혔다. 형배가 영역을 확보하듯 양팔을 테이블에 펼쳐놓고 혼자 밥을 먹는 중국집 신은 그 관찰의 소산이다. 한편 윤종빈 감독과 하정우가 마틴 스코시즈와 로버트 드 니로 커플을 오랫동안 전범으로 삼고 있음을 아는 관객이라면, <범죄와의 전쟁>에서 <카지노>나 <좋은 친구들>의 흔적을 자연히 탐색할 터다. 조직원들이 몰려다니며 일을 모의하는 광경에는 <좋은 친구들>의 뉘앙스가 있고 주인공들의 관계에선 <도니 브래스코>에서 알 파치노와 조니 뎁의 그것과 유사점이 있다. <범죄와의 전쟁> 시나리오는 최형배를 ‘너무 건방지지도, 그렇다고 주눅 들지도 않는 남자’로 소개한다. 하정우의 최형배는 결코 먼저 굽히고 들어가진 않으나 상대가 예를 갖추면 바로 깍듯이 악수로 답례하고 즉시 다시 상체를 느긋이 젖힌다. “최형배의 외양은 <대부2>의 드 니로를 많이 참조했고 성격을 만드는 데에는 <카지노>의 한 장면이 중요한 영감을 줬다. 드 니로가 사무실에서 팬티 바람에 셔츠와 넥타이만 매고 있다가 손님이 왔다고 하니 비서한테 3분 있다가 들여보내라고 하고 구겨질까봐 걸어놨던 바지를 꿰입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형배가 깁스를 하고서도 롤렉스 시계와 금목걸이는 한사코 차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요컨대 최형배는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관리하려들기 때문에 언행의 톤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그러다 궁지에 몰릴 때 한두번 폭발하는데 그 순간에는 영화도 어김없이 끓어오른다.

1월 현재 유일하게 확정된 하정우의 2012년 계획은 한석규, 류승범과 공연하는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이다. “<황해> 촬영 4개월째 비로소 옌볜에 갔을 때 그곳의 모든 기운이 구남을 채워주는 느낌을 받았다. 왜 진작 여기서 촬영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안타까웠다. <베를린>에서 내가 분한 표종성도 그 도시에 밀착된 인물이다. 베를린 거리에 서 있고 걷고 뛰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연기할 건 하나도 없다. (웃음)”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다고, 이 모범생 배우의 책장에는 이미 두터운 ‘베를린 리포트’가 꽂혀 있을 거라고 넘겨짚는데, 자리를 뜨던 하정우가 꼼꼼히 덧붙인다. “아, 그전에 한달 뒤 <러브픽션> 보시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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