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다른 건 모르겠고 할리우드는 심상치 않단 말이지…
2012-01-25
글 : 김도훈
<2012>

마야만 2012년을 지구 종말의 해로 낙점한 건 아닙니다. 종말론자들에 따르면 파푸아뉴기니의 후리족 전설에도 2012년이 지구 종말의 해로 기록돼 있으며, 중국의 <주역> 역시 2012년을 지구 종말의 해로 점찍었다고 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도 재해석을 할 필요가 있답니다. 이 프랑스 예언자가 남긴 문서를 잘 해석해보면 지구 종말의 해는 1999년이 아니라 2012년이라는 거지요. 믿거나 말거나, 문제는 이 모든 역사적 기록이 하필 2012년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저는 이 모든 종말의 비밀을 알기 위해 책장에 꽂혀 있는 종말론 관련 책들을 하나씩 끄집어냈습니다. <종말론: 최후의 날에 관한 12편의 에세이> <2012 신들의 귀환> <마야의 달력: 마야 문명 최대의 수수께끼에 얽힌 진실> <아포칼립스 2012: 최고의 시간과학자 마야가 예언한 문명 종말 보고서> <2012 아마겟돈인가, 제2의 에덴인가?: 고대마야와 현대과학이 밝힌 최고의 비전> <종말론: 2012 마야력부터 노스트라다무스, 에드가 케이시까지>. 왜 이 따위 책들을 사모았는지를 물어보신다면… 솔직히 밝히겠습니다. 저는 1999년 종말론을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고향집에 꽂혀 있을 온갖 노스트라다무스 관련 책자가 그걸 증명합니다. 하지만 누군들 안 그랬답니까. Y2K로 인한 컴퓨터 오작동 따위로도 종말이 올 거라고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이었잖아요. Y2K가 남긴 건 일본인 형제 두명과 한국인 메인 보컬을 억지춘향으로 묶어서 만들어낸 동명의 아이돌 그룹뿐이었습니다. 사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지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건 분명하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종말론 관련 책들을 모조리 읽어봐도 왜 2012년에 지구가 종말에 이른다는 건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긴 그걸 알면 저 사람들이 저런 책들을 썼겠습니까. 그 시간에 대피용 땅굴을 파고 있었겠죠. 아… 혹시 종말론 책으로 돈을 벌어 티타늄으로 된 지하 대피소를 지으려는 의도였을까요? 그러던 중 저는 <씨네21>에서 지구가 종말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2012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리스트입니다. 마블 캐릭터들을 모조리 끌어모은 <어벤져스>, 리들리 스콧이 <블레이드 러너> 이후 처음으로 SF장르로 돌아오는 <프로메테우스>, 크리스토퍼 놀란의 마지막 <배트맨> 시리즈가 될 <다크 나이트 라이즈>, 피터 잭슨의 <호빗> 등, 2012년 개봉하는 블록버스터의 양과 질은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뭔가 심상찮은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11년의 어느 날 할리우드의 한 사무실에서 이런 대화가 오간 걸 한번 상상해보시죠. “NASA에서 만든 지구 탈출선에 탑승하려면 한 2억달러 정도가 더 필요한데 말이야…. 12월21일이 되기 전에 한몫 단단히 챙겨야 해!” “마블 놈들은 드디어 <어벤져스>를 만들고 워너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만든다는군. 피터 잭슨 이 빌어먹을 놈은 <호빗>을 다시 만들다니! 탑승권 획득에 아주 눈이 멀었구 먼. 우린 어쩌지?” “도박이 필요한 시점이야. 리들리 스콧을 불러들여! 우리 손에 남은 쓸 만한 프랜차이즈는 <에이리언>밖에 없잖아. 속편은 가망이 없어. 프리퀄을 만들어! 리부트를 하자고!”

<씨네21>에서 찾은 2012년 지구 종말의 또 다른 증거는 테렌스 맬릭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위대하게 게으른 은둔자적 거장은 <트리 오브 라이프>에 이어 2012년에만 무려 두편의 신작을 내놓을 예정입니다. 테렌스 맬릭이 전례없이 2년 연속으로, 그것도 2012년 한해에만 두편의 영화를 만들려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이 영감님에게는 어차피 탑승권을 획득할 만한 돈도, 종말을 피해서 살아남겠다는 범인적 욕망도 없을 게 틀림없습니다. 예술적 힘을 모조리 쏟아내어 한편의 영화라도 더 만드는 게 테렌스 맬릭다운 종말의 대처법이겠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트리 오브 라이프> 역시 지구 종말을 앞둔 철학자가 마지막으로 심은 사과나무에 가까운 영화였잖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마지막 장면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그 뜬금없는 영화적 살풀이는 어떻게 해석하라고요….

통제할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더 로드>

그런데 우리는 왜 21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세기말적 종말론에 또다시 집착하는 걸까요? 어쩌면 2012 종말론은 지금 세계가 품고 있는 불안의 발현일지도 모릅니다. 냉전이 끝나고 21세기가 찾아오자 모든 것은 희망적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세계는 더욱 압도적인 불안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전쟁은 민족, 종교의 전쟁으로 변하면서 더욱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됐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경 재앙은 이제 몇몇 극성 환경주의자들의 과장된 경고가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질병들, 광우병, 신종플루와 조류독감은 21세기에도 얼마든지 스페인독감으로 인한 전세계적 절멸이 재연될 수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영원히 우리에게 경제적 안식을 가져다줄 것 같았던 자본주의의 신화는 몇번의 금융 위기로 거의 완벽하게 무너졌습니다. 2012년의 인류는 지구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이 지금처럼 어울리는 시기는 없을 겁니다.

영화는 언제나 종말론을 이야기해왔습니다. 소행성이 떨어지고, 핵전쟁이 발발하고, 태양 폭풍이 지구를 불태우고, 지구 자기장이 격변하고, 화산이 분출하고, 심지어 개미가 지능을 얻고… 혹은 토끼 가면을 쓴 남자가 “종말이 28일 6시간 42분 12초 남았다”고 꿈속에서 선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경고가 아니라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일지도 모릅니다. 코맥 매카시의 종말론 소설을 각색한 영화 <더 로드>에서 주인공 남자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만약 네가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는 꿈을 꾼다면, 그건 네가 여전히 살아 있고 또 싸울 힘이 남았다는 뜻이야. 네가 좋은 꿈만 꾸기 시작한다면, 그땐 정말로 걱정을 해야 해.” 그러니 2012년 12월21일에 우리가 할 일은 각자에게 가장 무시무시한 공포를 안겨주는 종말론 영화를 다시 감상하며 종말의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겁니다. 종말론의 악몽은 우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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