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1편 오프닝 시퀀스. 딸의 결혼식이 열리는 동안 어두운 내실에서 말론 브랜도가 분한 돈 콜레오네가 복수를 청원하는 보나세라를 면담하고 있다.)
<대부>는 제게 바이블입니다. <황해>를 찍는 동안에도 사운드트랙을 계속 들었고 <범죄와의 전쟁>의 최형배를 연기하면서도 <대부2>의 로버트 드 니로 연기를 자주 떠올렸습니다. 어떤 영화, 무슨 역인지와 무관하게 전부 대입이 가능한 교과서, 요리책이랄까요. 연기하기 전에 <대부>를 보면 어떻게 조리하고 양념을 쳐야겠다는 계획이 떠올라요. 제가 남성성 강한 영화를 많이 한 까닭도 있겠죠. 자 지금, 보나세라를 응대하면서 슬쩍 얼굴을 만지는 브랜도의 손짓을 보셨나요. <비스티 보이즈>의 재현이 동료에게 돈을 안 주려고 수 부리는 장면에서 한번 썼어요. 저만 아는 오마주? 그런 셈이죠. <범죄와의 전쟁>은 <대부> 1, 2편에서 각각 돈 콜레오네로 분한 브랜도와 드 니로의 패턴으로 연기했어요. 브랜도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으면서 소품으로 활용한다거나 포켓에 장미를 꽂고 향기를 맡는 모습, 보나세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다가 포인트마다 슬쩍 상대에게 던지는 시선, 지금 보시는 모든 것을 제 연기에 대입할 수 있어요. 똑같은 제스처를 가져다 쓴다는 게 아니라, 저 동작이 브랜도의 연기에서 했던 기능을 내 연기 속에서 발휘할 수 있는 나의 제스처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제스처는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포즈(pause 잠깐 멈춤)이기도 합니다. 상대에게 던질 결정적 한마디가 있는데 그전에 멈칫함으로써 안 그래도 솔깃해 있는 관객의 집중력을 더 높인다고 할까요.
그런가 하면 이 장면은 배우가 짓는 표정의 효과가 절반 이상 조명의 도움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대부>를 보면 장남 소니가 밥상머리에서 사업 이야기를 하니까 누이동생 코니가 “아빠는 절대 밥먹을 때 일 얘기 안 해”라고 일축하는 대사가 있어요. 다른 인물의 대사로 인해 브랜도의 캐릭터에 확 입체감이 생기는 순간이죠. 저 역시 캐릭터를 준비할 때 그런 식으로 외부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찾기도 해요. 예를 들어 <의뢰인>을 말하자면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법정스릴러란 사실 보편적이다 못해 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변호사 강성희가 곧바로 진지하게 덤벼들어선 지겨워진다고 봤어요. 그래서 초반의 연기 패턴이나 사건을 대하는 태도를 시나리오보다 사이즈를 줄여서 표현했어요. 관객을 감정이입시켜 재미있게 법정까지 데려가야 하는 임무가 우선이라고 판단했어요. 그런데 제가 나오지 않는 다른 신에 “죽어도 이번 재판은 이겨야 한다”라는 부장검사의 대사가 나와요. 그 한마디가 관객에게 이질감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판단해 재고해달라고 부탁드린 적이 있어요. (알 파치노가 분한 젊은 마이클 콜레오네와 다이앤 키튼의 케이가 데이트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넘어간다.) <베를린>을 준비하면서도 표종성과 아내 련정희가 갈등하는 대목에서 <대부2>의 마이클과 케이의 관계를 생각하곤 해요. 케이가 낙태를 알리는 장면에서 분노한 마이클이 뛰어날아 뺨을 때리는 템포, 그 땐땐함과 긴장감.
선글라스 끼고 샤워한 적 있어요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DVD를 플레이어에 건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뇌수술을 했다고 말하면서 손을 떠는 장면이다.)
고교 3학년 때 이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잘하는 연기가 무엇인가의 기준 비슷한 것을 마음에 갖게 됐습니다. 배우로서 위험한 역할이긴 합니다. 지금에 와서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저런 표 현이 과하지 않나 생각하지만 1990년대 중반 트렌드로는 적당하다고 받아들여졌을 거예요. 알 파치노도 저런 식의 연기를 했었죠. 하지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드 니로는 옛날부터 아주 심플하게 연기합니다. (라스베이거스에 온 니콜라스 케이지가 엘리자베스 슈와 카지노에 가고 거기서 만취한 케이지가 웨이트리스에게 시비를 걸며 테이블을 뒤엎는다.) 자, 테이블을 엎기까지 감정의 운용을 볼까요. 물론 취기만으로 흥분할 수도 있지만 단역 웨이트리스가 프레임 안에 들어옴으로써 케이지가 액션의 명분을 찾았어요. 만약 저기서 제가 케이지 자리에 있는데 웨이트리스가 개입하는 설정이 없다고 쳐요. 그냥 욱해서 화내는 연기를 할까? 고민하겠죠. 바로 거기가 배우로서는 위험스러운 지점이 되는 거예요. 관객이 보기에 미묘하게 그럴싸하지 않으니까. 그때는 누가 하나 들어와서 명분을 주거나 상대 여배우가 날 좀 건드려달라고 요청해야 해요. <황해>에서 구남이 맞은편 건물을 감시하다 길을 건너는 장면이 있는데 승합차 뒤로 돌아서 가는 동선이었어요. 그런데 극히 쉬운 그 동작에서 제 몸이 안 움직여지는 거예요. 그래서 고심하다 보조출연자 행인을 심고, 다가오는 그 사람을 피해서 숨는 걸로 찍었어요. 이유없는 동작. 그런 함정은 감독과 일대일 리딩을 하다가, 혹은 현장 리허설에서 마스터숏을 찍다가 발견해요. 그때 요구를 유연하게 수용해 연기를 도와주는 팀과 일하는 것이 배우에겐 큰 행복입니다. (수영장 물 밑으로 색안경 끼고 술병 들고 들어간 니콜라스 케이지가 엘리자베스 슈와 키스하는 장면) 저걸 보고 언젠가 선글라스를 끼고 샤워한 적이 있어요. (웃음) 이 시퀀스에서 수영복을 입은 엘리자베스 슈의 몸이 아름답습니다. 딱 봤을 때 여배우 같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 같은 매력. 하지원스러워요. (웃음) 하지원씨의 매력이 그거라고 생각해요.
채플린과 앙드레 김의 접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채플린>에서 채플린이 의상실에 들어가 작은 떠돌이의 옷을 갖춰 입는 장면을 플레이한다.)
어쩌면 저렇게 똑같이 연기를 하는지! 이 영화가 요즘 제작된다면 특수분장의 도움으로 더욱 완벽했겠죠? 3, 4년 이상 걸릴 거라고 예상하지만 앙드레 김 선생님에 관한 영화를 준비하고 있어요. 젊은 시절 선생님의 모습이 담긴 자료도 받았습니다. 예술가 영화는 제가 언제나 해보고 싶었던 장르의 영화기도 하죠. 채플린이 방랑자 캐릭터를 처음 창조한 <채플린>의 이 장면은, 제 생각엔 앙드레 김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와 관련이 있을 듯합니다. 선생님이 흰옷을 입기 시작하는 지점, 머리카락이 빠져서 마스카라를 이마에 칠하는 지점이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울 거라고 상상하거든요. 이 장면의 재미는 연출양식도 채플린 영화의 모드를 따르고 있다는 점이에요. 패스트 모션으로 찍어서 프레임 수가 적었던 무성영화를 흉내내고 음악도 그 시대 풍이죠. 제 영화 중에는 <멋진 하루>의 연기에 채플린이 들어 있어요. 제가 전도연 누나랑 견인된 차를 찾으러가는 뒷모습 장면에서 카메라가 틸트다운하면 제가 걸어가며 하얀 장우산으로 장난을 치고 있는 동작이 보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키드>의 채플린과 소년 같은 면이 마침 있기도 했고요. 최상호 촬영감독님이 리허설에서 제가 하는 장난을 보시고 카메라를 움직여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