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형인지 수비형인지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김윤석 배우와 두 작품을 했습니다. 전 이런 게 궁금합니다. 함께 신을 만들 때 두 배우의 장면 해석이 일치할 필요가 있나요? 아니면 현실의 인간이 그렇듯 주고받으면서 속으로 다른 그림을 그리는 건 상관없나요.
=서로 확인하진 않아요. 장면의 큰 목표에 관해선 대화하지만 연기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해요. “우리 지금 맞게 가고 있는 거니?”그런 문답은 오가죠. 예컨대 구남을 잡으려고 갑판에서 면정학이 직접 바다로 몸을 던지는 장면에서 “형, 그래도 두목인데 여기서 면가가 배에서 뛰어내리는 게 말이 돼요?” 하면 “그치?” 하면서 감독한테 이야기해보는 거죠. 그럼 나홍진 감독은 농담으로 그러죠. “뛰기 싫으세요?”(좌중 폭소) <황해>에서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면 형이 “구남이, 밥 먹었니?” 물어보는데 저는 거기서 예인지 아니오인지 애매하게 말을 뭉뚱그려서 대답해버렸어요. 그건 상대배우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돋보이려는 것도 아니 초면인 사람이 대뜸 밥 먹었냐고 반말로 묻는데 순간 확 대답하기 싫다는 감정이 온 거죠. 그러면 윤석 형은 “가자” 한번 끌었다가 또 내가 안 가고 버티면 “안 가니?” 또 툭 질러줘요. 우리 둘만 느끼는 장난일 수도 있고…. (웃음)
-거기서 필요한 건 상대배우가 이 장면을 독점하려든다고 오해하지 않는 기본적 상호신뢰겠네요. 주고받는 연기에 있어서 하정우씨는 웬만하면 던지는 입장이 아닌가요? 본인이 리시브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낀 적도 있습니까.
=제가 공격형인지 수비형인지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받고 주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야 계속되는 거니까요. 솔직히 <의뢰인>에서는 공격을 많이 한 것 같아 보면서 과한 것 아니었나 조금 민망했어요. 그렇지만 <범죄와의 전쟁>에선 확실히 받는 연기 위주로 하지 않았나요.
-그렇죠. 투톱영화일 거라는 예상을 벗어나면서 낳은 의외성에다가 적은 분량의 적확한 연기가 더해져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결과가 됐어요. 하정우씨의 팬들은 어떤 작품의 연기를 좋아하나요?
=천차만별인데 관객이 많이 든 <국가대표>가 팬들의 베스트 중에 끼지 않는다는 점이 의외예요. 캐릭터가 덜 도드라져서겠죠. 저를 좋아하는 관객은 취향이 확실한 영화 마니아층인가 싶기도 하고. “이제 상업영화 그만 찍어라. 예전 모습 보고 싶다”는 메시지를 받은 적도 있어요. (웃음) <국가대표>를 850만명이 봤다고 하면 놀라는 분들도 있어요. <의뢰인>도 <황해>보다 관객이 많이 들었고 최근작인데도 의외로 별로 이야기되지 않는 편이에요.
-성공한 작품들이지만 그 이전과 이후 하정우가 다르게 보인다는 느낌은 확실히 없죠.
=말씀하신 기준으로 보면 <추격자> <황해> <비스티 보이즈> <멋진 하루>, 그리고 <범죄와의 전쟁>을 꼽을 수 있겠네요.
-우정 출연은 많지만 단편은 찍지 않는 편이었는데 지난연말 강형철, 장훈, 이재용 감독과 ‘시네노트’라는 기획의 단편 세편에서 주연을 하셨죠. 원래는 CF를 찍는 줄 아셨는데 세 감독 모두 너무나 공들여 단편영화를 찍어서 당황하진 않았나요.
=3일씩 9일 동안 어떤 날은 12시간, 어떤 날은 20시간을 찍었어요. 촬영기사님도 미술감독님도 놀라시더라고요. (웃음) 살다살다 처음 보는 스케줄이었습니다.
-그중 강형철 감독의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보다 불현듯 하정우씨가 한번도 사극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제안은 꾸준히 들어왔어요, 사극 장르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는데 그때마다 우연히도 더 마음이 끌리는 시나리오가 있었기 때문에 안 한 것뿐이죠. 단편을 찍으면서도 그리 다르다는 느낌은 없었어요.
-<10분 안에 사랑에 빠지는 법>에서는 이재용 감독과 비슷한 외모를 설정했습니다. 예전에 임수정 배우가 극중 인물의 습관이나 말투가 감독 본인에게 비롯된 경우가 종종 있어서 감독을 관찰하기도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이번 단편은 영화의 내용 자체가 촬영현장 이야기라는 극적 요구가 있었지만 다른 영화에서도 그런 예가 있었나요.
=<러브픽션>을 찍을 때 전계수 감독의 연애관이 궁금해 인터뷰해본 적은 있어요. 물론 인터뷰라는 사실은 중간 지나서 말씀드렸고요. (웃음) 그 밖에는 전혀 없어요. 시나리오에 그런 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배우에게 건네진 다음에는 배우가 알아서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먹는 신의 목표는, 무엇보다 먹는 일 아닌가요?
-<범죄와의 전쟁>을 본 관객의 하정우씨 연기에 대한 감상 중 가장 우세한 내용이 “섹시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미를 뽐내는 인물을 너무 안 했나?” 하는 생각은 했어요. (폭소) 멋있게 보이려는 역을 한 적이 없어서 오히려 새로웠구나 느꼈죠. 근데 또 <러브픽션>으로 (멋있는 이미지가) 와장창창창 깨질 거니까요. 하하. 그러고는, 다시 1년 뒤에 <베를린>이 나오고요. (미소)
-배우에게 섹시함이라는 자질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떤 면에서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자신감하고 연결된 것이라고 봐요. 그 자신감은, 내가 정당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고 그 결과로 성취감을 돌려받고 살아가는 패턴의 정직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부끄러운 일 없이 정당하게 취하고 어디 가서 무릎 꿇을 일도 없고, 그때 자신감이 나오고 섹시함도 그것과 연관돼 있지 않나 싶어요.
-<황해>도 그랬지만 하정우씨의 먹는 연기는 예전부터 많이 회자됐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을 보고 일부러 중국음식을 먹으러 가는 사람도 있고 “입맛이 없으면 내가 하정우라고 생각하자”라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웃음)
=뜻밖이에요. 아무 느낌이 없거든요. 먹는 척하지 않고 그냥 다 먹어요. 맛이 없더라도 맛있게 먹자는 의식조차 없어요. 먹는 행위에서 그 신의 목표는, 무엇보다 먹는 일 아닌가요? <황해>에서도 우물우물 감자 먹으면서 식으면 뜨거운 감자로 바꿔가며 연신 먹었고요.
-식품 CF도 많이 들어올 텐데 배우로서 CF 출연의 기준이 따로 있습니까.
=특히 치킨업계는 모든 브랜드가…. (웃음) 영화배우치고는 많이 하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스포츠용품은 스포츠를 좋아하니까 꾸준히 하게 되고요. CF는 조심스런 분야 중 하나예요. 과연 광고 속 제 모습을 보면서 관객이 내가 궁금해 영화를 보러올까 하는 생각을 하죠. 까다롭게 고르는 편이라기보다 당장 뭔가를 얻는다면 결국 장기적으로 대가를 치르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안 하는 쪽이 맞다고 생각해요.
-<러브픽션>은 출연을 결정하고 우여곡절이 길어서 크랭크인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는데 다른 영화로 선회하지 않았고 저예산영화라 개런티도 많이 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재미있다는 판단이 있었나요, 아니면 한번 한 약속은 되도록 지킨다는 입장인가요.
=후자가 큽니다. 또, 코미디 코드가 제 취향과 맞았고 프로덕션이 지체되니 중간중간 오기가 발동하기도 했어요. 끝까지 다른 작품 찾지 않은 제작자, 다른 배우 구하지 않은 감독을 보면서 저분들이 나를 진짜 원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있고 여러 감정이 있었습니다. 2007년 미쟝센영화제에서 제안받았어요. 드라마 <히트> 직후 <추격자>가 개봉하기도 전이었는데 신인배우의 무엇을 보고 그러셨을까 놀라기도 했고요.
-전계수 감독은 구주월을 쓰면서 하정우씨를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추격자>의 지영민이 가진 어린이 같은 면모가 미숙한 남자상과 맞았다고. 그러나 얼핏 글쓰는 남자, 사랑에 목매는 남자가 하정우씨에게서 대번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닌데요.
=이 영화의 연애담보다는 구주월의 유머가 마음을 더 많이 움직였어요. “여름은 멜로의 계절이죠.” 전 그 말이 왜 그렇게 웃긴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기껏 보러 간 멜로영화가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과거가 없는 남자>죠. (웃음)
=그것도 묘한 인연이에요. <과거가 없는 남자>가 핀란드영화인데 극중 알래스카 장면을 핀란드에서 찍었거든요. 그리고 주월이 베를린 여행을 가는데 제 다음 작품이 <베를린>이죠.
-하지만 어떻게 해도 하정우씨는 채식주의자로 보이진 않았어요. 연기를 보고도 못 믿겠다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웃음)
=(진지) 채식주의자처럼 보이려면 외양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초식동물도 몸집은 크잖아요. 동그란 안경을 써야 할까요?
-숫자에 집착하는 구주월의 성격은 배우 본인과 비슷하군요.
=알랭 드 보통 작가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도 처음 애인과 비행기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수에 대한 집착이 나오죠. 여객기 평면도도 나오고요. 저도 그런 면이 있어요. 한국에서는 박민규 작가의 문체를 생각했어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같은 작품요.
<범죄와의 전쟁> 2편이라면
-감독이 배우한테 해줄 수 있는 제일 좋은 일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자는 감독은 배우로부터 알맞은 거리에 카메라를 놓을 줄만 알면 된다는 극단적 표현을 하기도 하지만….
=배우 각자의 연기 스타일에 따라 다르겠죠. 제 경우엔 배우가 아이디어를 이야기했을 때 그것을 배우 특유의 피해의식이나 돋보이려는 생각의 발로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많은 감독들이 배우를 잘 몰라요. 배우가 어떤 제안을 했을 때 감독이 “분량 때문인가? 화면에 멋있게 안 나와서 그런가?”를 1번, 2번으로 떠올리면 작업이 힘들어져요. 그래서 무엇보다 제대로 소통되는 감독을 좋아해요. 두편 이상 함께하는 감독들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고요.
-소통을 말씀하셨는데 영화의 촬영기간이 길다보니 배우에 따라서는 당신이 잘하고 있다는 신호를 자주 보내주기를 바라는 배우도 있죠. 하정우씨는 기본적 소통만 성사되면 그런 확인은 필요없습니까.
=잘하고 있나는 제가 알아서 체크하는 편입니다. 물론 사기를 북돋워주면 신나겠지만 그 말이 껍질뿐이라면 금방 진실을 알아차리게 돼요. 한편 저는 제가 심리적으로 그 장면에서 시원하게 해소가 되어야 연기에 만족하는 유형도 아니에요. 그럴 경우 오히려 거기서 에너지가 다 소비돼버렸다는 느낌이 들죠. 그러니까 현장편집본을 체크해 (감정의 수위를) 신들에 분배하면서 감독한테 확인을 청해요. “이렇게 생각하고 왔는데 내일 찍을 장면이 그러하니 맞는 거죠?”라고. 그런데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작업하기 시작한 건 나홍진 감독님의 <추격자> 이후였어요. 말이 통했던 것이죠.
-지루한 걸 싫어하는 성격인데 가정입니다만 본인이 출연한 성공적인 작품 가운데 속편이 나온다면 합류할 의사가 있나요.
=(생각) <범죄와의 전쟁> 2편을 찍는다면 생각이 있습니다. <대부> 1, 2편을 보면 이야기의 중심이 다르잖아요? 제가 혼자 생각하는 속편은 1편에서 잡혀들어간 형배의 시선을 따라가는 거예요. 첫 장면을 체포되어 얼굴이 눌린 모습으로 할지 교도소에서 복역 뒤 출소하는 장면으로 할지는 모르겠어요. 익현의 스토리와 별개로 출감한 형배가 서울로 상경해 전국구가 되는 거죠.
-확실히 <범죄와의 전쟁>은 정확히 투톱도 아니면서 완전히 한 사람 중심도 아니라는 점에서 가능성이 있겠네요. 원경에 있던 형배와 근경의 익현이 위치를 바꾸는 식으로….
=가만, 제 말씀 좀 더 들어보세요. (웃음) 상경을 한 형배에겐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배신당한 트라우마가 있는 거죠. 그래서 메인 스토리는 형배가 서울을 정복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가운데 서브 스토리로 창호나 다른 제3자를 시켜 익현을 추적하는 거죠.
-프리퀄을 부분적으로 도입할 수도 있겠는데요? 형배가 슬쩍 언급한 삼청교육대 경험이나 더 이전의 어린 시절을 포함해서요.
=음, 그건 너무 <대부2>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약 5년 뒤 제가 마흔쯤 됐을 때 얼굴에 주름이 패어 세월의 깊이가 새겨지면 그 얼굴로 출소하는 모습을 찍는 거죠. “나의 마지막 목표는 최익현을 담그는 것이다” 하면서. (좌중 폭소) 서울의 암흑가 역사와 연관해 새로운 인물들도 등장시키고요. 윤종빈 감독이 연출해야 더 의미가 있겠죠.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왜 이즈음에 배우 생활의 한 단락을 돌아볼 마음이 들었는지 이유가 선명해졌나요.
=살아오면서 거의 처음으로 요즘 들어 영화 말고 나를 가슴 뛰게 하고 내가 재미있어하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인 것 같아요. <베를린>을 찍고 나면 다른 데에도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공부가 될 수도 있고 긴 여행이 될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