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홍상수 감독님에게서 현장의 여유를 배웠다”
2012-03-15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백종헌
이광국 감독 인터뷰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으로 작품을 여러 편 했다. 영향력이 큰 감독 아래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어쩌면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극장전>은 연출부,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는 조감독을 했다. 그렇게 너무 많이 하면 네 색깔이 없어지지 않겠냐는 주위의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막상 주위에서 걱정하는 만큼은 못 느꼈다. 막연하지만 어떻게 될 거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감독님과 일하면서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느낌도 들었다. 홍 감독님의 트리트먼트, 대본 등을 보면서 나도 같이 발전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큰 걱정은 안 했다. 게다가 감독님과 일하면서 좋은 배우들을 많이 봤고 그게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들이 말하는 그런 부담에서는 점점 더 멀어졌고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게다가 감독님의 제작방식이 큰 의지가 됐고 거기서 확신을 얻게 됐다. 이렇게도 찍을 수 있다는 걸 배웠으니까. <하하하> 끝나고 나서 이제는 내 작품에 본격적으로 매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디어는 언제 처음 떠올렸나.
=2008년 봄. 그때 트리트먼트를 썼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끝나고 시나리오를 썼다. 지금의 완성본은 방향과 구조는 남기고 압축한 모양새다. 다음 장면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하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호기심을 갖고 관객이 쫓아올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애초의 목표였다. 원래 시나리오는 지금보다 규모가 두배 정도 됐다. 등장인물도 지금은 15명이지만 원래는 30명 정도였고. 그리고 소문이라는 동기가 지금보다 좀더 중요했다.

-<로맨스 조>는 거칠게 말해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다. 어떻게 이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됐나.
=내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다음에도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감을 못 잡던 시기가 있었다. 나는 왜 이야기가 없을까 고민했는데, 어느 땐가 보니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나에서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럼 이야기가 필요한 남자에게서 시작해보자, 한 거다. 이야기가 필요한 남자인 ‘로맨스 조’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자살은 미수에 그친다, 그게 소동극으로 발전한다, 하는 거였다. 그런 중에 에셔의 판화 작품 <그리 는 손>을 다시 보게 됐는데 거기서도 영감을 얻었다. 어쨌건 이 남자를 다루려면 과거도 필요할 것 같았고 그때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이 소문이기도 했고. 그렇다면 그런 걸 이야기와 붙여보면 어떨까 싶었다.

-'로맨스 조'라는 제목은 뉘앙스가 재미있다.
=들으면 좀 허무할 거다. (웃음) 제목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시나리오 구상 초기에 인디밴드를 하는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밴드의 구성원들은 각자 애칭을 하나씩 갖고 있는데 자기 애칭은 로맨스 조라고 하더라.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그 말을 들었을 때 이번 영화와 어울릴 것 같았다. 그 말이 주는 어감과 내가 뭔가 통했던 것 같다. 이야기가 필요한 남자와 로맨스라는 단어가 뭔가 섞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영화에는 몇몇 인물 그룹이 등장한다. 그 그룹들의 배분율이랄까 조율이랄까, 그런 리듬의 문제가 이 영화의 관건이었을 수도 있다.
=시나리오를 썼을 때 그걸 가장 고민했다. 하지만 특별히 어떤 규칙을 따르지는 않았다. 이야기 순서에 맞는 리듬을 찾고자 했고, 촬영은 그룹별로 했다. 16회차 촬영했다. 그룹별로 보면 4회에서 7회씩 찍은 것 같다. 편집할 때도 장면을 새로 섞거나 위치를 바꾸는 일은 많지 않았다.

-예상보다 흡족하게 나온 장면을 꼽자면.
=라스트 시퀀스. 시나리오 모니터링을 했을 때 이 장면에 대한 이견이 많았다.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겠나, 배신감을 느끼진 않겠나 하는 의견들. 라스트신은 시나리오 구상 초기부터 그렇게 가고 싶었다. 끝까지 그 부분을 잡고 간 거다. 막상 영화를 본 사람들이 생각보다 어려워하는 것 같지 않다. 지금보다 좀더 직접적인 대사가 하나 있었는데 오히려 지금처럼 약간 뭉개놓는 지점이 있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연출하면서 짜릿한 느낌이 들었던 장면은 이다윗하고 이채은하고 뽀뽀하는 장면. 그 장면은 현장에서 처음에는 좀 헐겁게 시작했다. 하지만 몇 테이크를 가면서 디테일이 붙어서 좋아진 경우다.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게 있다. 뜬구름 잡는 디렉팅을 하지 말자는 거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하세요, 편안하게 하세요 식의 그런 디렉팅은 안 하려고 최선을 다했고 의식적으로 디렉팅을 할 때 동사를 많이 사용했다.

-등장하는 소도구로 책이 한권 나오는데, 그 쓰임새가 재미있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다.
=촬영 스케줄을 다 잡아놓고 이것저것 준비를 할 때였다. 뭔가 책을 소품으로 쓰고 싶었다. 내가 <마담 보바리>를 좋아하니까 그럼 좋아하는 그 책을 읽는 장면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담 보바리>도 형식적으로 어떤 실험이 있고 그 주인공이 지닌 성격이 어쩌면 이 영화의 다방 여종업원과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채은이 냉장고에서 책을 꺼내는 건 그 당시 현장에서 몇 테이크쯤 가고 나서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촬영감독과 스크립터와도 상의했는데 다들 오버라고 했다. (웃음) 그런데도 이상하게 한번 해보고 싶더라. 결과적으로는 잘한 것 같다.

-그런 식으로 현장에서 선택한 게 많나. 또 어떤 것들을 같은 방식으로 선택했나.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채은이 자살하려고 할 때 체육복을 펼쳐서 깔개로 쓰는 장면이 기억난다. 체육복으로 둘 사이의 연결점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이다윗이 체육복을 챙겨서 다시 전해주는 장면은 그렇게 생겼다. 책상에서 쓰는 시나리오 이외에 현장에서 최대한 발견하는 게 영화를 풍성하게 한다. 원래는 손에 쥐고 시작해야 편한 성격이었는데 홍 감독님과 일하며 그런 여유의 중요성을 본 것 같다. 단순히 미리 준비만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고 현장에서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된 거다. 어떤 장면은 현장에서 대사를 전부 바꿔버렸지만 그 장면이 잘못될까봐 겁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홍상수 영화 미학과의 어떤 차이점에 관해서 말하자면, 카메라가 움직이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인물의 움직임이 어떻게 해야 잘 어울릴지를 오래전부터 고민해왔다. 홍 감독님 영화에서도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는 건 롱테이크의 힘이 크다. 그런 걸 카메라의 움직임과 같이 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촬영감독과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인물의 동선과 잘 어우러질 수 있는 카메라의 움직임 등에 대해서. 현장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건 배우들의 동선을 만든 다음 카메라워킹을 찾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더 연구해보고 싶다. 이번 영화를 두고 장난 삼아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번 영화는 움직임 연구!”라고.

-뭐랄까, 다른 인물 그룹이 홍상수적이라면 이채은-이다윗 부분은 허진호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인상을 준다. (웃음). 그런데 그 그룹이 있는 게 이 영화에는 오히려 좋다.
=원형적인 멜로가 하나 있고 주위에서 그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았다. 그 부분은 의식적으로 일반 장르영화처럼 멜로 라인으로 쭉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방식의 멜로 라인으로 정리하기로 한 건데, 만들고 나니 좀 상투적인 건 아니었을까 걱정도 된다.

-<로맨스 조>의 의외의 재미라면 유머를 구사할 줄 안다는 것이다.
=대사를 쓸 때 그런 게 불쑥불쑥 나왔다. 내게는 소재가 무겁고 진지해도 명랑한 톤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 같다. 오히려 너무 무거운 영화들이 있는데, 저 소재를 꼭 저렇게까지 무겁게만 접근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좀 있었다. 나에게 맞는 것이 지금 이 정도의 톤이 아닐까? 어떤 무거운 소재를 다루더라도 웃음도 함께 있는 그런 쪽을 택할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은 영화 보고 뭐라던가.
=쑥스러워서 일부러 자세히 안 여쭤봤는데…. 엔딩이 귀엽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이 파이브 한번?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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