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것 <가을 소나타>
2012-03-21
글 : 송경원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는 질문이다. 예술을 예술답게 하는 절대적이고 주관적인 질문들. 그 힘겨운 몸짓은 신을 향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데 할애되었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사람들을 향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질문과 답’이 아닌 ‘질문들’에 관한 이야기다. 사색하는 구도자의 길. 의심과 고뇌 끝에 맺힌 질문은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한 성찰과 절제된 묘사를 수반한다. 사실 베리만만큼 원초적인 인간의 심리와 관계에 관한 묘사에 탁월했던 감독도 드물다. 그중에서도 1978년작 <가을 소나타>는 생의 마지막을 이 영화와 함께했던 위대한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불꽃 같은 연기가 보태져 영화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올봄, 그 불꽃은 3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스크린 위에 다시금 피어오른다.

어머니와 딸. 따스함과 원망, 미안함의 애달픈 울림이 섞여 있는 특별한 단어. 부자(父子)처럼 딱딱하거나 서먹하지도 않고 세월이 지나면 사이좋은 친구처럼 지내게 된다는 모녀관계이지만 실상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7년 만에 재회하게 된 모녀간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가을 소나타>는 사랑이란 이름의 기대와 배려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알려준다. 어느 가을날 에바(리브 울만)는 유명 피아니스트로서 전세계 순회공연 중인 어머니 샬롯(잉그리드 버그만)을 집으로 초대한다. 7년 만에 만난 모녀는 서로를 아끼고 애틋한 듯 보이지만, 에바가 숨겨두었던 속내와 사정을 하나씩 꺼내면서 갈등은 시작된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숨기지 않는 에바와 그런 딸이 두렵게 느껴지는 샬롯. 서로를 원하는 만큼 각자 자신의 아픔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상대가 원망스러운 두 사람의 다툼은 평행선을 달리고, 급기야 샬롯은 에바로부터 다시 도망친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에바는 어머니에게 용서와 화해의 편지를 보낸다.

베리만의 절제된 심리묘사야 워낙 정평이 나 있지만 <가을 소나타>에서 두 모녀가 주고받는 주옥같은 명대사들은 각별하다. 세월, 관계, 사랑, 이기심 등 친숙하지만 깊이 생각해보기 힘든 말과 감정들에 대한 차분한 응시와 성찰은 절절한 대사들을 통해 무뎌진 가슴 한가운데에 화두를 던진다. 다소 난해한 그의 작품들에 비해 훨씬 대중적이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관통하는 질문의 핵심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다. 그것은 감히 너를 이해한다는 오만함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대한 솔직한 인정을 통해 비로소 상대를 바라보게 되는 넉넉함이며, 무한한 신의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차별을 바탕에 둔 인간의 사랑이다. 세월의 흐름을 거부하는 대신 상대방의 변화와 다름을 인정하고 고민했던 베리만이었기에 도달할 수 있는 진솔함. 그것이야말로 <가을 소나타>가 오늘날까지 유의미할 수 있는 원동력이며, 영화 속 잉그리드 버그만의 주름이 여전히 아름다운 이유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