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류의 미래가 궁금하십니까?
2012-04-19
글 : 김도훈
6년 만에 완성된 김지운, 임필성 감독의 SF 옴니버스 <인류멸망보고서>

무려 6년 만에 완성된 프로젝트다. <인류멸망보고서>는 김지운, 임필성 감독이 연출한 세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SF 옴니버스영화다. 광우병 좀비는 서울을 잠식하고, 로봇은 열반에 이르고, 지구는 당구공과 부딪혀 멸망한다.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냐고? 지금 충무로에서 가장 시네필적인 두 감독은 충무로에서 거의 멸종된 장르를 각자의 방식으로 되살려냈다.

SF 장르문학에서 앤솔러지(Anthology: 단편모음집)는 꽤 인기있는 형식이다. 호러나 스릴러 장르문학에서도 앤솔러지는 차고 넘친다만 한국 SF 문학팬들에게 앤솔러지는 단순히 좋은 단편들을 모아놓은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건 단편 하나에도 장편으로 상승시킬 수 있을 만한 아이디어를 쏟아붓는 SF문학의 특징 덕분이기도 할 것이고, 다른 장르문학과 비교해도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온 SF문학의 입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 SF 단편집 <크로스로드>는 “장르문학시장에서조차 소외되고 있는 SF의 발전을 위해 기획한”이라는 문구를 달고 있다. 장편 SF에 친근함을 느끼지 못하는 대중에게 앤솔러지는 부담이 덜하고 접근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면 SF 장르영화는? 김지운, 임필성, 봉준호, 박찬욱 등 90년대 이후 한국 상업영화계를 이끌어온 감독들은 종종 SF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고백하곤 했다. 그러나 국산 SF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경우는 봉준호의 <괴물>을 제외하면 전무하다(비평적으로 말하자면 이응일의 <불청객>을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SF영화가 만들어진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지난 20여년간의 비극적 리스트를 나열하며 애도하리라. <내츄럴 시티>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예스터데이>라는 이름의 비극들 말이다. 혹은, 많은 SF 장르팬들은 앨프리드 베스터의 걸작 <타이거! 타이거!>가 박찬욱의 <올드보이>에 끼친 은은한 영향력을 상기하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해피 버스데이>

김지운과 임필성 감독이 6년 전에 시작해 마침내 완성한 <인류멸망보고서>는 충무로에서 보기 드문 SF 장르영화다. <인류멸망보고서>는 모두 세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임필성 감독의 좀비물 <멋진 신세계>로 막을 열고, 김지운 감독의 로봇물 <천상의 피조물>을 거쳐 임필성의 종말론영화 <해피 버스데이>로 막을 닫는다. 이들이 굳이 옴니버스 형식을 도입한 이유는 국내 장르문학 편집자들이 앤솔러지의 출간에 공을 들이는 이유와도 비슷할 것이다. SF 장르의 고정팬이 많지 않은 국내에서 앤솔러지 스타일의 SF영화는 이 장르에 대한 관객의 오랜 경계심을 쉬이 누그러뜨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서구 SF 장르의 충무로식 변주

<천상의 피조물>

<인류멸망보고서>를 구성하고 있는 세 단편은 할리우드가 오랫동안 파고들어온 SF의 세부 장르들에 대한 충무로식 변주라고 할 만하다. <멋진 신세계>는 한국형 좀비물 제작의 가능성에 대한 임필성의 답변이다. 연구원 윤석우(류승범)는 가족이 해외여행을 떠나고 홀로 남은 집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임무를 맡는다. 문제는 그가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하지 않고 버리면서 시작된다. 윤석우가 버린 썩은 사과는 재활용 과정을 거쳐 축산농가의 사료로 재생되고, 그 사료를 먹은 소의 고기를 사람들이 먹고, 그로 인해 알 수 없는 좀비 바이러스가 서울을 뒤덮는다. 매스컴이 괴바이러스의 정체를 두고 정치적 논쟁을 거듭하는 가운데 인류는 점차 멸망으로 치닫는다. 어떤 면에서 <멋진 신세계>는 광우병, 조류 인플루엔자, 구제역 시대에 대한 임필성 감독의 정치적 풍자라고 할 법하다. 특히 봉준호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TV토론 장면은 <멋진 신세계>의 백미다. 그에 반해 좀비물로서의 장르적 쾌감이 덜한 것이 이 단편의 약점이지만, 도심을 무대로 펼쳐지는 몇몇 시퀀스로부터 <워킹데드>처럼 본격적인 한국형 좀비물의 출현을 상상해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

김지운의 <천상의 피조물>은 열반에 이른 로봇을 둘러싼 아이작 아시모프 스타일의 단편이다. 천상사라는 절에 가이드용으로 배치된 로봇 RU-4가 ‘인명 스님’이란 이름으로 설법을 하기 시작한다. 이를 조사하러 간 로봇 제조사의 엔지니어 박도원(김강우)은 단순한 고장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RU-4의 깨달음을 믿는 스님들의 주장에 이끌린다. 그러나 이를 인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제조사는 결국 RU-4의 해체를 결정한다. <천상의 피조물>은 로봇이 등장하는 서구 SF 장르문학과 영화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온 주제를 다시 한번 곱씹는 영화다. 다만 아시모프의 작품들과 이를 영화화한 <아이, 로봇> <바이센테니얼맨>이 ‘로 봇 3원칙’의 여러 가지 해석을 통해 인간의 경계를 이야기했다면, 김지운은 거기에 가히 동양적이라 할 만한 불교의 철학을 삽입한다. 사실 <천상의 피조물>은 장편으로 만드는 것이 더 좋았을 법한 작품이다. 김지운 감독은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쏟아내는 엄청난 양의 대사를 통해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고 있는데, 만약 <천상의 피조물>이 장편이었더라면 보다 장르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해피 버스데이>

<해피 버스데이>는 <인류멸망보고서>의 대단원에 어울리는 단편이다. 아빠의 8번 당구공을 실수로 잃어버린 초등학생 박민서(진지희)는 괴상한 사이트에 접속해서 8번 당구공을 주문한다. 2년 뒤 거대한 혜성이 지구로 돌진하며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 민서 가족은 과학자 삼촌(송새벽)이 만든 지하 방공호로 대피했다가, 뉴스를 통해 이 혜성이 8번 당구공 모양으로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해피 버스데이>는 이미 6여년 전에 촬영을 종료한 <멋진 신세계> <천상의 피조물>과 달리 최근에 새로 연출한 단편이다. 기술적으로 다른 두편보다 훨씬 부드러운 건 물론이거니와 <멋진 신세계>와 <해피 버스데이> 사이에 놓인 6년이라는 세월 동안 임필성 감독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읽어내는 즐거움도 있다. 주인공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악몽 속으로 몰아붙였던 <남극일기> <헨젤과 그레텔>과 달리 <해피 버스데이>는 종말을 눈앞에 두고도 희망을 잃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또한 임필성은 <멋진 신세계>와 <해피 버스데이>를 통해 절묘한 유머감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시네필적인 유희정신과 새롭게 발견한 코미디의 재능이 어떤 방식으로 차기작에서 융합될지 기대해볼 만하다.

<멋진 신세계>

<인류멸망보고서>는 완벽한 옴니버스는 아니다. 세 영화의 연결고리는 조금 미약하고, 몇몇 단편은 장편의 아이디어를 강박적으로 짧은 시간 속에 밀어넣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두 감독들이 애초에 꿈꾸었을 각각의 장편영화를 상상하며 <인류멸망보고서>를 보는 건 꽤 흥미로운 경험이다. 김지운 감독은 제작보고회에서 “어제 기획했던 영화가 내일 제작되는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기획된 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아이디어만 재미있다면 언제든지 영화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시대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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