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도둑들] “지구는 여자 손으로 넘어갔다”
2012-04-30
글 : 이화정
사진 : 오계옥

“지구는 여자 손으로 넘어갔다”

-김혜수는 <타짜>의 ‘정 마담’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본인이 이번 출연을 부담스러워했을 수 있겠다 싶다.
=혜수씨는 뽀빠이와 오랫동안 손을 맞춰온 미모의 금고털이인 팹시 역할이었는데, 시나리오를 잘 못 써서 그런가. 수차례 설득해야 했다. (웃음) 처음엔 선뜻 팹시가 멋지다고 했다가 좀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배우야 그런 걱정 당연하다. 감독은 배우가 그런 걱정하면,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이 캐릭터는 정말 뭐지? 이 캐릭터의 겉과 속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전작을 같이 했던 배우들과 언제나 모든 작품을 할 수는 없다. 윤석 선배한테도 시나리오가 안 맞으면 언제든지 ‘No’를 해도 된다, 그런 것에 미안함이나 부담 갖지 말자 했다. 혜수씨와도 전화도 많이 하고 그게 시나리오를 좋은 방향으로 고쳐나가는 힘이 되기도 했다.

전설의 금고털이 팹시(김혜수)와 중국의 쥴리(이신제).

-정 마담은 <타짜>에서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도 파문을 일으키는 ‘예쁜칼’이었다. 여도둑 팹시에게도 그런 카리스마가 기대된다.
=제2의 정 마담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긴긴 인생에 똑같은 캐릭터를 왜 하나. 비슷한 건 두 여자 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란 거다. 그 캐릭터가 무엇을 욕망하는지는 알지만, 속으로는 겹을 쌓아놓은 캐릭터다. 반면 팹시는 정 마담보다 더 완숙한 이미지였으면 했다. <타짜> 때는 디테일한 연기에, 이번에는 캐릭터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 중점을 뒀다. 관객이 캐릭터에 집중할 때, ‘내가 생각하는 것과 화면 속 저 여자가 생각하는 게 맞나’라는 의문이 들게 하고 싶었다. 팹시를 보면 그래서 거의 무표정한 연기가 많다.

-전지현은 김혜수와는 대척점의 이미지를 준다. <엽기적인 그녀>를 제외하곤 <데이지> <4인용식탁> 등에서 주로 정적인 연기를 해왔다. 줄타기를 즐겨하는 섹시한 도둑으론 신선한 선택이다.
=예니콜은 줄을 타야 하고 액션도 많아서 고난이도 촬영이 많이 필요했다. 물론 지현씨가 그런 액션을 다른 배우보다 특별히 잘하지 않을까 해서 캐스팅했다기보다 기존의 그녀의 이미지와 다른 면모를 봤다. 배우들은 사석에서 만나서 같이 대화를 하다보면 상상이 간다. 이 배우가 이런 역할을 하면 재밌겠다 싶은 감이 오는 거다. <타짜> 전에 혜수씨를 만났을 때도 ‘왜 저 배우에게 지금까지 악역을 시키지 않았을까’ 싶었다. 지현씨도 시나리오 쓰러 가기 전에 만났는데 너무 잘 웃는 사람이더라. 물론 내가 이야기를 잘해서 그런데. (웃음) 지현씨가 너무 건강하고 긍정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더라.

-출중한 여성 캐릭터는 <범죄의 재구성>의 구로동 샤론 스톤(염정아)부터 정 마담까지 전문 분야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부제를 ‘여도둑들의 전쟁’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총 10명의 도둑 중 여도둑이 무려 네명이다. 수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데다 각자 파워와 기능이 모이면 어떻게 재연될지도 흥미진진하다.
=고백하는 거다. 지구는 여자 손으로 넘어갔다. (웃음) <섹스 앤 더 시티>를 좋아해서 그런지 몰라도 여자 캐릭터가 정말 매력적이다. 충무로에선 여배우가 할 시나리오가 없다고 말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여배우의 욕망과 현재진행 중인 작품과 잘 안 맞아서, 여자 캐릭터가 드라마에서 터트려주는 게 많지 않아서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서 한곳에 놓으면 거대한 불꽃이 튈 거다. 김혜수와 전지현이 서로 쳐다만 봐도 감이 온다. 둘이 한 화면에 있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여자 연기자들을 주변에 두지 않고 중심으로 끌고 가니 쓸 때도 재미있고 영화도 독특해진다. 김해숙씨가 연기하는 ‘씹던 껌’ 캐릭터도 원래는 남자 캐릭터를 머릿속에 두고 있다가, 시나리오 쓰면서 여자 캐릭터로 바꾼 경우였다.

-예니콜과 멜로라인을 형성하는 막내 도둑 잠파노역의 김수현은 현재 <해를 품은 달>을 통해 스타성으로는 다른 선배 배우들과 막상막하가 되면서 스타군단 캐스팅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잠파노는 캐스팅이 쉽지 않았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신인배우가 했으면 좋을 것 같았는데, 김수현은 막 <드림하이>가 끝난 때여서 캐스팅 때도 너무 스타였다. 만나서 ‘넌 너무 유명해서 안돼’라고 하려고 했는데 만나보니 너무너무 매력적이더라. 같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명의 도둑들이 모인 홍콩. 무더운 옥상에서의 익스트림 롱숏.

-한국과 홍콩 배우들이 출연하는 국제적 캐스팅이 이루어진 데는 결국 이 영화의 로케이션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홍콩, 마카오를 도둑들의 주무대로 활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영화를 처음 구상한 게 2년 전 홍콩영화제 갔을 때였다. 낡은 건물과 최첨단 건물이 공존하는 홍콩의 풍경이 너무 기괴하고 멋있더라. 도쿄에 갔을 때 ‘그냥 옷이나 사야지’ 했다면, 홍콩에선 ‘여기서 영화를 찍어야지’ 하는 욕망이 막 끓어올랐다. 홍콩은 아직도 가시지 않은 범죄의 냄새가 있다. 걸어다니는 사람들 뒤에 욕망의 끈이 보였다. 그 길로 배를 타고 마카오로 갔다. 한적한 시골에 앉아서 안수현 PD에게 브리핑을 했다. 10명의 도둑이 필요하다고. 홍콩과 마카오가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니 홍콩 배우들이 필연적으로 필요하게 됐다. 외국 배우들과 작업하니 마치 신인감독이 된 느낌이다.

-덕분에 홍콩영화 팬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행운이 주어졌다. 80년대 홍콩영화의 인상적 악역이자 두기봉 감독의 대표작에 출연한 임달화가 도둑들의 주일원이다.
=두기봉 감독 작품을 보면서 임달화가 무척 좋았다. 젊었을 땐 주로 악역을 많이 했다면, 두기봉 감독의 작품에선 악역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악역의 인생을 살고 있더라. 반신반의로 제안을 했는데 흔쾌히 수락해줬다. 수많은 계약서가 오갔는데, 예를 들면 계약조항이 이런 거다. 촬영할 때 묵는 호텔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중계됐으면 좋겠다. (웃음) 축구 광팬이라고 하더라. 또 다른 도둑으로 출연하는 증국상은 배우 증지위의 아들이다. 지지난해 부산영화제 때 그가 감독으로 참석해 알게 됐다.

냉정하게 뭘 찍고 싶은지 정리하면서

-10명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게 시나리오상의 난점이라면, 10명의 배우를 맞닥뜨리는 건 현장에서의 문제다.
=촬영 전에 상견례처럼 다 같이 모인 적이 있다. 문 열고 들어갔는데 ‘헉! 큰일났다’ 싶더라. 저 배우들 각자의 개 성을 살려가면서 어떻게 드라마를 만들어야 할까 두렵더라. 이 영화는 한 신이 8페이지씩 된다. 잘 찍어야 10분, 못 찍으면 15분이 되는 거다. 혼자서 10명의 도둑들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무수히 구성했다. 다행인 건 배우들이 자기 캐릭터만 고민할 줄 알았는데 상대배우와의 앙상블에 더 신경을 써준다는 거다. 그런 부분을 조금씩 수정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도둑의 행위, 몸의 사용, 즉 액션의 비중이 커졌을 것 같은데.
=<전우치>를 찍고서 생각한 게 바로 액션이었다. 액션은 긴장감이 고조되고 나서 방점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전우치>는 찍다 보니 액션이 너무 많더라. 액션도 결국은 긴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액션이 전체 드라마를 방해하지 않도록, 액션 자체가 이상하게 튀지 않고 적재적소에서 사용되길 원했다. 이번엔 전체 드라마 구조에서 뒤로 가면서 더 재밌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후반부에 클라이맥스를 강하게 뒀다. 액션도 그래서 뒤쪽으로 거의 몰았다. 애초 설계한 것보다 액션양은 줄이고 냉정하게 내가 뭘 찍고 싶은지 정리했다. 편집에서 빠질 거 아예 시나리오에서 먼저 정리해나간 거다.

한국 도둑들과 중국 도둑들의 첫 조우가 이루어진 홍콩 수상 점보레스토랑 롱숏 컷.

-해외 로케이션 때문에 오는 프로덕션상의 어려움도 컸을 것 같다.
=해외 촬영은 급류에 휩쓸리는 것과 비슷하다. 잠깐만 촬영기간이 늘어도 전체 제작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홍콩과 마카오 촬영은 준비를 많이 했다. 제작부가 한달 전에 가서 사전 준비를 했다. 비가 많이 왔는데도 손실이 크지 않았던 건 사전에 미리 스케줄 대안을 다 만들어놔서였다. 거의 쉬지 않고 촬영할 수 있는 철저한 스케줄이었다. 한달 정도 찍었는데 예정보다 이틀을 빨리 끝냈다. 확실히 해외 촬영을 할 때 준비를 많이 한다는 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시스템에 대해서 매번 고민을 하게 되는데 앞으로 다른 작업할 때도 해외 촬영인 것처럼 찍어야겠다 싶더라.

-부인인 안수현 PD와 함께 작업하는 첫 작품이란 점도 짚어봐야 한다. 함께 만든 케이퍼필름의 창립작이기도 하다. 24시간 PD 체제가 주는 장단점이 있었을 텐데.
=내가 원했던 건 무조건 프로듀서가 이 영화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아야 한다는 거였다. 주변에선 그러다가 큰 위기를 자초할 거라고 충고도 하더라. (웃음) 실은 내 인생에서 영화적으로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이 내 아내다. 영화아카데미 졸업하자마자 만났으니까. <범죄의 재구성>도 첫 번째 브리핑 대상이 안수현 PD였고 <타짜>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우치>때 안수현 PD가 <박쥐> 하느라 바빠서 이야기를 못했더니…. (웃음) 확실히 가장 완벽한 PD라고 생각한다. 프로덕션은 완전히 장악하되 작가나 연출가 같은 마인드를 가진 PD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타짜> 때 연거푸 시나리오를 고치는 걸 보더니, 딱 하나의 이미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도박하고 나와서 아주 쓸쓸하게 걸어나오는 이미지 말이다. 데이트 끝나자마자 집에 가서 그 장면을 썼다. <도둑들>에도 곳곳에 그렇게 만든 장면들이 있다. 집에서 대화의 80%가 영화 이야기고, 나머지가 어디로 이사 갈까 뭐 이런 거다. 정말 말하다보니 24시간 PD 체제다. 아내가 내 뮤즈인 셈이다.

-후반작업이 한창이다. 지금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어떤 부분인가.
=영화를 한 80번 정도 봤는데 후반작업 자체가 참 즐겁다. 최근엔 음악의 톤을 정하는 게 가장 큰 고민이다. 센티멘털한 정서를 줄 수도 있어야 하고 굉장히 묵직한 음악도 연출해야 한다. 일반적인 경우 한톤이 지속되는 신 자체가 하나의 국면인데, <도둑들>은 신 내에서도 계속 느낌이 변한다. 음악을 넣기 굉장히 사나운 영화다. <타짜> 때 같이 했던 장영규 음악감독이랑 같이 하는데 계속 만나서 서로 이야기하는 중이다.

-<도둑들>로 다시 범죄액션영화를 시작한 셈인데, 계속 브랜드화할 생각은 없나.
=누가 그러는데 모든 감독은 일생을 통틀어 계속 똑같은 영화를 찍는다더라. 내가 만든 아카데미 졸업작품을 잠깐 봤는데 중학생도 그보단 잘할 것 같더라. 근데 생각해보면 그 작품이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랑 똑같다. <전우치>도 관객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지만 내가 보기엔 똑같다. 캐릭터들이 말도 많고 시끄럽고. (웃음) 범죄액션을 피할 생각은 없다. 빌리 와일더가 그랬다. 하고 싶은 걸 하지 말고 네가 잘하는 걸 해라. 그래야 말이 되게 만들 수 있다고. 분명한 건 이 분야는 털 데가 정말 무궁무진하구나. 사람들은 한 장르를 세편쯤 만들면 크게 완결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게 어딨나. 오히려 더 만들고 싶어진다.

-네 번째 작품인데 이번 작업을 통한 변화라면.
=이제 신인에서 벗어난 거다. <도둑들> 찍고 나서 기분이 좋아진 건, 예전엔 현장에서 오케이컷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정말 심했다는 거다. 배우들한테도 왜 NG인지 설명해줘야 해서 뚫어져라 모니터를 봤다. 마치 심판관 같은 자세였다. 지금은 모니터 자체를 좀더 편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 여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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