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_혹시 주변에서 지칠 만도 한데 매번 같은 대목에서 화를 낸다고 하지 않아? (웃음) 어쩌면 현장에서 여배우한테 사람들이 바라는 건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평소 촬영장에서 자리 양보하고 예의 바르게 대해도 나중에 보면 내게 원하는 것이 그게 아니었나 싶을 때가 있으니까.
배두나_어느 날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내가 인간적으로 잘하는 것보다 못되게 굴고 건방져도 같이 일한 사람들한테 내가 저 사람이랑 일했다는 자부심 비슷한 걸 주는 게 더 좋은 건가? 조금 더 도도하게 있어주고 ‘여배우틱’하게 굴어야 나 저 배우랑 일했다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걸까.
고현정_촬영하는 100일 동안 어리광부리고 폐를 끼쳤어도 VIP 시사나 연예정보 프로그램에서 옆에 앉아 있을 때 상냥하게 구는 걸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지. 왜냐하면 그건 다수가 보니까. 대중이 보지 않는 시간에 아무리 존중해도, 만천하가 보는 시사회에서 활짝 웃어주지 않으면 결국은 “저 애는 제 스타일대로만 일하고 갔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배두나_여배우에게는 기대하는 바가 좀 다른 것 같아요. 저는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한 걸 제일 싫어하거든요. 투자사나 제작사 윗분들이 현장에 오는 날엔 정중히 인사한 다음 막내 스탭들과 가서 어울리는데 저 같은 사람은 사회생활하기 힘들겠죠.
고현정_응, 해보니까 힘들더라, 두나야. (웃음) 하지 마. 너만 다쳐. 높은 사람들이야 나중에라도 함께할 자리가 있을 테고, 현장에는 당장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몰라라 하고 그늘에서 높은 사람들과 한담 나누는 건 안 내킬뿐더러 영화 전체에 도움도 안되는 거라고 생각해. 근데 어떨 때는 다 소용없어요.
배두나_하하. 차라리 제작사나 투자사 분들에게 싹싹하게 굴어 야식 하나를 더 얻어오는 게 나은?
고현정_오히려 그런 영리함을 원하더라고. 진상을 한번 부려서 좀 촬영을 일찍 접든가. (웃음)
배두나_저, 쓰러져달라는 말 진짜 많이 들었어요. 우하하.
고현정_강인한 체력, 이런 걸 별로 원하지 않아요. 몇시에 촬영이라고 해서 당연히 시각 엄수했는데 나중에 회식자리에서 들어보면 그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늘 늦는 사람하고 별로 달리 보지 않는구나 싶으면 왜 내가 그리 열심히 서둘렀나 싶지.
배두나_그렇지만 <코리아> 하면서도 느꼈지만 아는 사람은 알아주잖아요. 문제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직 힘이 없다는 거지. 그분들에게 힘이 생길 때가 오겠죠?
고현정_언제 생길까? 엉뚱한 곳에 물 떠놓고 제 지내는 기분이야. (좌중 폭소) 그러니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더 연예인스럽게 구는 법을 배워야 하나 싶기도 해. 예를 들어 분장실에선 집중하고 싶으니 조심해서 들어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할 경우, 그쪽에서 필요할 때 마구 들어오다가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돌려보내면 백발백중 화살이 날아와. 그럴 거면 처음부터 분장실은 아예 오지 말아달라고 딱 잘라 양해를 구해두는 쪽이 낫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지. 어쩌면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같은 배우가 오히려 헷갈리는 애인가봐.
배두나_그럴 수 있죠. 기본은 서로 매너를 지키는 선에서 털털하게 마음을 나누자는 건데 막상 털털하게 하면 선을 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가 제가 “아, 그건 저 오케이 아니에요” 하면 실망하고.
고현정_그런 일 있지 않니? 세상에 알려진 내용, 자기가 접한 정보만 취합해서 내가 이런 사람일 거다 상을 그려놓고 같이 일을 하는 입장이 돼서 “그런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면은 이런 겁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어머, 저를 어쩌면 그렇게 잘 아세요?” 하는 리액션을 안 해줬다고 무안해하고 토라지는 분들이 있어요. 하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나에 관한 잘못된 생각에 대충 리액션을 할 수는 없잖아? 특히 작업을 같이 한 사람이 오해하면 그 오해가 막 퍼질 테니까. 그런 일에 마음 상하는 건 본인들이 평생 약자라고 여겨서인데, 어떤 사안을 놓고 의견을 말하는데 약자, 강자가 어디 있어. 연예계에서 계약하거나 할 때 편의상 연예인에게 얼마짜리다 매기는 비즈니스적 가치를,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날 때도 갖다대는 셈이잖아.
배두나_일하다보면 사람들이 이쪽에서 건드리지 않았는데 먼저 방어를 해서 답답하곤 해요. 접점이 이쯤이라면 (손으로 그 점을 뛰어넘어) 항상 여기까지 넘어온 다음에 내가 그건 못하겠다고 해서 접점까지 다시 후퇴하는 수순에 익숙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이쪽 업계에서는 본인이 먼저 세게 나가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손해볼 거라고 예측하고 먼저 치고 들어와 상처 주는 경우를 많이 봐요.
고현정_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가면 안 불안할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3명을 만나건 300명을 만나건 3천명 대중을 만나건 웬만해선 중심을 잃지 말자고 마음을 먹어. 그런데 예를 들어 무슨 행사에 갔다고 쳐. 거기서 아는 사람들이 인사하면 오랜만이니까 “어, 아무개야 안녕?”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표정) 하고 솔직히 반가워해요. 그러면 그 얼굴이 다 ‘굴욕사진’으로 나와요.
배두나_푸하하. 언니도 그런 거 신경써요?
고현정_원래 신경 안 썼는데 결국은 그것만 남더라고? (좌중 폭소) 그래서 이래선 안되겠다, 더이상 기 빨리지 말자 맘먹고 약간 가식적으로 행동한 날은 또 무난하게 넘어가요. 그런데 그런 날은 집에 오면서 마음이 불편한 거야. “아까 그 친구를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는데 그도 이제 나를 사석에선 살갑게 굴다가 남들 앞에서는 우아하게 고개 까닥하는 사람들 축에 넣겠구나.” 결론적으로 굴욕사진 많이 찍힌 날이 집에 돌아와서 덜 허전하더라고. 어떻게 할지 항상 기로에 서 있는 거지. 그럴 때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자문을 해. 넌 왜 컴백을 했지? 왜 다시 이곳에 나왔어? 여기 나온 이상 감수해야 하는 것이 있겠지? 그게 뭘까? A, B, C는 감수하자. 그런데 D,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몸짓과 뗄 수 없는 언어
고현정_<코리아>에서 북한 사투리 연기는 어떻게 했어요?
배두나_음… 근데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사투리 연기가 힘들지만 달리 보면 기대서 가는 구석도 있지 않나요? 사람들이 나보고 탁구선수, 양궁선수, 인형, 부산 사투리, 영어, 일어, 수화 왜 이런 힘든 것만 하냐고 묻는데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인물을 생짜로 연기하는 게 훨씬 힘들잖아요. 탁구선수라는 옷을 입고 있는 게 좀더 편안해요.
고현정_어디 나갈 때 의상 하나 챙겨주는 거죠. 진짜 배우다운 말이다.
배두나_그래서 난 오히려 너무 쉽게 캐릭터에 기대서 가려고 하는 거 아닌가 자책해요. 사람들 생각이랑 반대인 거죠. 양궁에 기대고 탁구에 기대고 북한 말에 기대는 게 부끄러워요.
고현정_모 아니면 도죠. 그걸 잘하면 의지할 수 있지만, 잘 못하면 깨니까. 그런데 영화를 보면 사투리가 처음엔 어색하게 들려도 20분쯤 지나면 그냥 적응해서 보기도 하지 않나?
배두나_그런데 또 욕심은 많아서 완벽하게 하고 싶어요. 일본어 연기할 때도 그랬고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는 영어 연기를 했는데 사람들이 듣고 웃는 건 싫은 거예요. 한국계 복제인간 역이라 유창할 필요는 없지만 영국식 영어를 새로 배웠죠.
고현정_두나씨는 모험하다가 끝날 것 같아. (웃음)
배두나_으아아, 나 시집은 언제 가?
고현정_어, 결혼 생각 있어요?
배두나_언니, 왜 갑자기 MC를 봐요. (웃음) 결혼은 남들 다 하는데 한번 해봐야 하지 않나. 그리고 나는 딸이 갖고 싶어요.
고현정_영국식 영어는 악센트를 새로 익힌 건가요?
배두나_<클라우드 아틀라스> 배우들은 영국 출신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는 휴 그랜트처럼 옥스퍼드 잉글리시를 구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랑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전부 런던 사투리, 코크니 악센트를 써서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저로선 (멍하니 느릿느릿) “뭐-라-고?” 계속 반문할 수밖에 없으니 자연히 배우고 싶어졌어요. 제가 느낀 건 일본어도 영어도 특유의 애티튜드를 알아야 말이 나온다는 거였어요. 영어로 말할 땐 나도 모르게 이렇게 어깨가 움직이고(어깨 제스처), 일어를 할 때는 이렇게(상냥하게 목례를 반복한다) 해야 말이 나오더라고.
고현정_다 해보고 나니 서울말의 태도는 무엇인 것 같아요? 나는 영어도 일어도 못하지만 추임새는 물론이고 발성법도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은 받았거든요.
배두나_서울말 할 때 목소리가 제일 낮아져요. 가장 편하고 자신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제일 밑에 있는 발성이 나오는 거죠. 자신이 없는 외국어나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할 때 몸이 움직이는 것과 반대로.
고현정_나는 요즘 꽂힌 북한 말이 있는데. “이리 오라” 이런 말, 웃기지 않아? 사실 다정한 표현인데…. (웃음)
배두나_<코리아>에서도 후배한테 기를 북돋워준다고 “긴장하지 말라” 그래요. 이게 뭐 따뜻한 건지 만 건지? 푸하하. 그러면서 되게 멋있어.
고현정_단 음식이 몸에 안 좋듯이 상냥한 말과 달리 툭툭 건드리는데 어딘가 변치 않을 거 같은?
배두나_음, 그러고 보면 언니는 북한 말 같은 사람이에요. 이게 말이 되나? 하하. 예전에 내가 박찬욱 감독님이 내 연극을 엄청 혹평했다고 언니한테 투정 부린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언니가 날 위로하지 않고 따끔히 충고해줬는데 그때부터 언니한테 기대게 됐어요. 아니 아니, 상처 준 건 아니고요. 언니가 “아유, 두나야, 그랬구나” 받아줬으면 못 기댔을 것 같아요.
고현정_박찬욱 감독님은 너랑 함께 작품을 하신 분인데 내가 감히 그분보다 너를 더 위한다는 착각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남들이 못 본 구석을 찾아 칭찬하면서 편승해가는 건, 나쁜 이야기를 해주는 것에 비하면 쉬운 일이거든.
배두나_언니가 그때 날 딱 잡아주는 느낌이었어. 그런데 박찬욱 감독님 원래 가슴에 비수 꽂는 말 잘해요. 하하.
고현정_그래? 아니, 왜 그러신대? 난 또 아닌 줄 알고 그랬지. (좌중 웃음)
배두나_이쪽 일이 도마 위에 오르는 직업이다 보니 우리 주변 사람들은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기도 할 거예요.
고현정_그러니까 이율배반적이야. 도마 위에 오를 때는 난도질당하려고 올라간 건데 막상 난도질당하면 막 아프다고 하잖아. 그게 싫으면 아예 도마 위에 올라가지 말아야지. 그러니까 내가 도마에 오를 때도 그렇지만 남이 도마 위에 올라갈 때도 책임감있게 난도질을 해줘야 해.
배두나_그게 무슨 말이에요?
고현정_어설픈 난도질을 하면 피도 못 흘려보고 괜히 조그만 상처 갖고 내가 이런 칼도 맞아봤네, 그런 도마에도 올라봤네 내용 없는 전적(戰績)만 생기는 거지. 게임의 질이나 집중도는 없이.
배두나_와 오늘 나, 깨닫는 게 있는 것 같아. 지금까지 한번도 내가 도마 위에 자진해서 올라갔다는 생각을 안 해봤어요.
고현정_(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리가 자진해서 올라간 거야, 두나야. (좌중 폭소) 저 도마엔 나만 올라가겠다고 보채기도 하고. 붕장어는 싫다고, 광어가 되겠다고 하기도 하고.
배두나_명쾌해진다. 하하.
고현정_우리가 귀족처럼 가만히 있고 싶은데 억지로 이 세계에 끌려와서 마지못해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지. 할 때는 하는 거야. 아까 우리가 말한 불만은 그렇게 일하는 와중에도 납득할 수 없는 관행이 있다는 거였고.
배두나_그래서 힘들다는 말을 못하겠어요. 사람들이 고되겠다고 걱정해줄 때 “이 직업이 원래 힘들어요”라고 덤덤히 대답하면 참 성의없어 보이는데 사실 더 할 말이 없어요. 그리고 그만큼 대가를 받잖아요?
배두나_일하면서 최근 속상했던 건, 사람들이 그동안 일해온 방식에 지나치게 맞춰 살려고 한다는 점이었어요. 이게 정석이고 이게 대중적이니까 맞춰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술가는 아니더라도 대중예술인이라면 반 발짝은 앞에서 끌어가야 하지 않나요? 영화 관객도 그동안 수준이 많이 올랐는데 요즘은 기준이 여기라면 그 조금 뒤에서 안전하게만 가려는 경우를 많이 봐요.
고현정_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불안한 지점에 나를 갖다놓지 않으려면 왜 이 일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안정되고 뻔한 걸 하려면 왜 이 직업을 택한 건지.
배두나_<공기인형>에 오다기리 조가 딱 두 장면 나오거든요. 그 나라의 톱스타가 두 신에 나와서 엄청 연기를 잘하는 거예요. 분량이나 비중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는 거죠. 전 그 모습이 너무나 멋있어 보여서 언젠가는 꼭 그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킹스 스피치>의 헬레나 본햄 카터. 왕의 아내로 평범하게 나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존재감이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과거엔 미모의 톱스타였던 그녀가 그동안 팀 버튼 영화에서 기괴한 분장하고 극단적인 쪽으로 가더니 홀연 “아니야, 나 사실 기본기도 굉장히 잘해”라고 슬쩍 보여주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어요.
고현정_멋있지. 두나야, 그런 게 멋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