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부안의 모항에 도착한 프랑스 여자 안느(이자벨 위페르)로부터 시작되는 세편의 단편영화가 있다. 첫 번째의 파란 안느는 유명한 감독이고, 두 번째의 빨간 안느는 한국 감독과 몰래 사귀고 있는 유부녀고, 세 번째의 초록 안느는 한국 여자에게 남편을 뺏긴 이혼녀다.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채 원주(정유미)의 펜션에 머물고 있는 그녀들은 매번 비슷한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원주에게 우산을 빌리고, 등대를 찾아 해변으로 나가고, 날이 맑으나 궂으나 수영 중인 안전요원(유준상)을 만나 불통이지만 경쾌한 대화를 나눈다. 그 세 가지 조화를 열고 닫는 것은 원주다. 보증을 잘못 선 엄마와 모항에 피신 와 있던 그녀는 “무료하고 불안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 안에서 모항이라는 공간과 많지 않은 사람들과 크지 않은 사건들을 통과해 안느는 이제껏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떠나게 된다.
설긴 줄거리로 <다른나라에서>를 소개하자니 허망하다. 때로는 꿈이 영화를 포함하고 때로는 영화가 꿈을 포함하며 전진하는 듯한 안느의 여정을 구조적으로 설명해본들 미진함은 남을 것이다. 배우들의 목소리 혹은 노랫소리에 실린 기운, 깨진 소주병과 우산처럼 돌고 도는 조각들, 비와 파도에 스민 공기의 진동 같은 것들이 안느의 여정에 무한한 심상을 더하는데, 스크린을 바라보며 마음에 차오르는 무언가를 깊이 느끼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영화에서 운동하는 것들과 내 삶 속에서 운동하는 것들이 공명하는 몇개의 장면과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미지의 등대를 향해 흘러가고자 하지만 아직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는 안느를 따라 걸어보는 영화적 경험이기도 하다. 그 경험이 유쾌하고도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