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x&talk]
[권해효] “배우로 살아가는 힘,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2012-06-01
글 : 김성훈
사진 : 최성열
<다른나라에서>의 권해효

인터뷰 하루 전날 오후, 권해효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재일조선학교를 지원하는) ‘몽당연필’ 일로 일본에 다녀오느라 영화를 못 봤다. 그래서 인터뷰하는 게 좀 찜찜하다. 그냥 다음에 하면 안될까?”라고 물었다. 여러 이유를 대며 그가 딴생각을 못하게 막았다. 다음날, 인터뷰 장소에서 만난 그에게 “아직도 찜찜한가”라고 물었다. 권해효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뭐. 홍상수 감독 영화는 영화를 안 보고 인터뷰 해도 될 것 같아. 안 보고 하는 묘한 재미가 있지 않겠어? (웃음)” 사회적인 이슈,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 사회와 관련한 짤막한 인터뷰를 제외하면 권해효와의 이번 인터뷰는 1997년 <씨네21> 130호 스타덤 기사 이후 처음이다. 공교롭게도 그와 만난 5월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3주기이기도 했다.

-오늘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3주기다.
=‘노짱’ 3주기네. 그런 날이네. (맥주잔을 들며) 추모의 잔을 들지.

-지금 가장 떠오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은 무엇인가.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가 결정된 직후였다. 광주, 대전, 천안, 서울을 하루에 도는 유세를 함께한 적이 있다. 선거캠프 사람들이 한 버스를 타고 다녔다.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다들 지쳐서 졸고 있는데, 버스 안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노래를 부르더라. 그가 불렀던 곡은 <어머니> <노동가> <임을 위한 행진곡> 등 1987년 거리에서 학생과 노동자가 불렀던 노래들이었다. 그가 노래를 부르다가 가사를 틀리면 보좌진이 고쳐줬는데, 그때마다 그는 “누가 가르쳐주면 안돼. 이 노래는 내가 꼭 기억해야 해”라고 말했다. 그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내게 그는 늘 처음과 끝이 같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자 자신의 출발점을 항상 잊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이었고. 그는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원래 칸영화제에 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제 <다른나라에서> 레드카펫 사진을 인터넷에서 봤다. 나도 아쉽지만 아내가 더 아쉬워하는 것 같다. 사실 무척 가고 싶었다. 그러나 6월부터 방영하는 드라마 <유령> 촬영도 있고. 무엇보다 재일조선학교를 위한 ‘몽당연필’ 일 때문에 일본을 다녀와야 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웃음)

-<다른나라에서> 출연을 제안받은 건 언제인가.
=<북촌방향> 때 먼저 제안받았다. 지지난해 연극 <광부화가들>을 본 홍상수 감독이 (문)소리를 통해 만나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셋이서 만나 낮술을 마셨다. 홍상수 감독과 나의 연결고리가 배우 김의성(<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북촌방향> 출연. 권해효의 가장 친한 친구)밖에 없어서 그의 이야기를 하던 중 김의성한테서 전화가 왔다. “너, 당장 와라”해서 김의성이 술자리에 합류했고, 의성이의 뚱뚱하고 살찐 모습을 본 홍상수 감독이 무슨 영감을 받았는지 <북촌방향>에 의성이를 캐스팅한 거다. <북촌방향>을 찍고 난 뒤 홍상수 감독은 내게 “이번에는 못했으니까 다음 거 찍자”고 했고, 그게 이 영화다.

-당시 <광부화가들>을 본 홍상수 감독이 당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
=문소리가 그러더라. “감독님이 오빠가 착하고 좋은 사람인 것 같대.”

-극중 역할인 종수가 어떤 인물인지는 언제 전달받았나.
=첫 촬영 전날이었다. 전북 부안 변산반도의 모항에 내려가기 전에 홍상수 감독과 통화했다. “의상은 뭘 가져가면 돼?”라고 했더니 “그냥 네 옷 가져와”라고 대답하더라. “나, 가서 뭐 하면 돼?”라고 물었더니 “넌 다큐멘터리 감독이야”라고 하더라. 허허.

-홍상수 감독과의 첫 작업이다. 내려가는 길이 두렵진 않았나.
=두렵진 않았고. 이상한 베드신만 안 시켰으면 좋겠다 싶었다. (웃음) 새로운 작업에 대한 불안감도 있겠지만 가장 걱정스러운 게 두 가지 있었다. 영화에서 외국인을 만나 영어로 의사를 주고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상대가 이자벨 위페르라고 하니까 긴장되더라. 잠을 잘 못 잤다. 소리나 (유)준상이는 며칠 전부터 와서 이자벨과 어울리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나 성근이 형은 다른 일 때문에 이자벨과 친해지는 과정이 없었다. 첫 촬영 10분 전에 이자벨이 나타났다.

-어땠나.
=주근깨 많은 작은 아줌마가 나타났다. (웃음) 영어로 대사하는 것보다 앞으로 이자벨과 어떻게 의사소통할 건지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어떻게 친해졌나.
=일주일째 모항에서 해물칼국수, 무채를 먹고 있던 이자벨을 보니 안쓰럽더라. 그럼에도 그는 어떤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하루는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타서 이자벨의 숙소에서 함께 마시고, 이자벨은 자신의 아이들 사진을 보여줬다. 알고 보니 같은 작업을 했더라. 예전에 연극 <아트>를 한 적이 있는데, <아트>의 작가가 이자벨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자벨과 무조건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래마을에 들러 페리에, 빵, 치즈를 많이 사들고 내려갔더니 이자벨이 너무 기뻐하면서 양 볼에 뽀뽀해줬다. 그때부터 친해지기 시작했다. 배우는 결과물로 얘기한다고들 하잖아. 이번 작업을 통해 과정도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이자벨에게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덕분에 이자벨 위페르를 어떻게 해보려는 모텔 발코니 시퀀스는 제법 재미있더라.
=이자벨과 함께 연기하는 장면마다 홍상수 감독이 요구했던 게 있다. “넌 수컷이야. 수컷!” 살아오면서 한번도 그런 걸 내세운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 작업한 연극에서 연기한 역할 역시 교수, 선생, 의사 같은 직업뿐이었다. 그때 처음 느꼈다. ‘내 속에 수컷이 정말 부족하구나’라고. 그게 참 불편하고 어려웠다.

-극중 종수가 모항에 내려온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 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 이 대사는 실제 권해효를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런 거겠지. <옥희의 영화> 시사가 끝난 뒤 술자리를 함께했다. 감독님께서 내가 하고 있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더라. 영화 속 이런 대사도 있잖아. 이자벨에게 “내가 하는 게 중요하지, 무엇을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라고 하잖아. 어쩌면 한국사회에서 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행위는 ‘그 대상이 무엇인가’라는 것보다 ‘무얼 하든 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냐’는 태도로 비쳐지는 게 아닐까 싶더라. 물론 그 대사는 나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한국의 먹물사회를 풍자한 얘기고.

-되돌아보면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홍상수 감독은 이제껏 만나본 연출자 중 연기의 핵심에 대해 가장 간결하게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다른나라에서>는 내게 신선하고 새로운 작업이었다.

-특별출연을 제외하고 <선물>(2001) 이후 11년 가까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한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누가누가 애드리브를 잘하나, 그런 것에 관심이 많을 때가 있었다. 그게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몇몇 기자들이 그러더라. ‘왜 영화를 하지 않냐’고. 그 말에는 한국 대중문화 중 영화가 가장 상위에 있는 매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런저런 이유가 겹치다 보니 10년 동안 영화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 출연만 하지 않았을 뿐 항상 영화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10년 동안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 사회를 보면서 독립영화계와 관계를 맺어왔다. 뭘 하지 않더라도, 바라보기만 해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가 2009, 2010년부터 특별출연으로 영화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고, 방은진 감독의 신작 <완전한 사랑>에도 출연한다. 서서히 영화를 다시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그사이 마이크 경력은 꽤 된다.
=사람들은 내가 사회 보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어렵다. 때로는 절박한 마음으로 단상에 올라간다.

-그럼에도 여러 사회적인 이슈가 벌어지는 집회에서 계속 사회를 보는 이유가 뭔가.
=거절할 명분을 찾는다면 그건 내가 마이크를 잡음으로써 발생하는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계산하는 일밖에 없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다.

-뭐가 부끄럽나.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부끄러움. 할 수 있는데 못하는 척하는 부끄러움. 10여년 동안 대중연기자와 사회활동가가 내 안에서 공존해왔는데, 그것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꽤 도움이 된 것 같다. 만약 사회활동가로만 살아왔다면 꼰대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두 일을 적당히 거리두기하면서 살다보니 지난 20년 동안 큰 부침 없이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배우로 살아가는 내게 큰 힘이 된다. 다른 연기자가 평생 못 만나볼 사람들을 거리에서 만날 수 있잖아.

-‘몽당연필’ 일은 6월에 1년째를 맞는다. 재일조선학교 문제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됐나.
=2007년 개봉한 <우리학교>에 빚진 게 많다. 영화가 갖는 영향력이 그것이기도 하고. 동일본 대지진으로 피해를 본 조선학교를 ‘몽당연필’ 콘서트를 통해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뭘 돕고 그런 게 아니다. 실제로 그곳에 가보면 재미있다. 하나의 공동체에서 어깨동무를 하는 부모를 보며 자라난 아이들을 보는 재미가 있어서 하는 거다. 어떤 일이든지 오래하기 위해서는 재미있어야 한다.

-사회운동을 처음 시작한 건 두 자녀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까.
=한번도 안 물어봤다. 물어봐야겠다. 큰애는 중학생이니까 나름 생각이 있겠지. 마이크 잡을 때 한번도 현장에 안 데리고 갔다. 데리고 간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그건 애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인 것 같고. 언제, 어디서나 사람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빠는 재일조선학교 아이들을 위해 오늘 일찍 자야겠다” 그런 말을 해도 서로 불편하지 않은 관계면 충분할 것 같다. (웃음)

-홍상수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 또 볼 수 있을까.
=이자벨 위페르의 말로 대신하겠다. “홍상수가 부른다면 언제, 어디든지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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