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나라는 나라와 당신이라는 나라의 국경
2012-06-21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관계의 이동과 운동의 모형으로 보는 홍상수 감독의 <다른나라에서>
<다른나라에서>

안느라는 이름의 세 여인이 각자 한번씩 다른 이유로 모항이라는 작은 해변을 찾는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홍상수의 영화 <다른나라에서> 중에서 3부에 등장하는 안느는 인근의 통찰력 깊은 스님을 만나 인생 상담을 하다 말고 갑자기 엉뚱한 부탁을 한다. 스님이 안느의 얼굴을 그려주겠다며 꺼낸 만년필을 보더니 그녀는 무턱대고 자기에게 그걸 선물로 달라고 한다. 스님도 좀 놀라고 스님을 안느에게 소개 해준 민속학자는 더 놀라서, 그건 이상한 행동이라며 민속학자가 안느를 나무라지만 그녀는 물러설 기색이 없다. 왜 그 만년필이 필요하냐고 이유를 묻자 안느는 그것으로 무언가 (글을) 쓸 것이라고도 하고 그냥 자기가 원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의 행동은 결국 “저분(스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님은 결국 만년필을 안느에게 준다. 그게 언젠가 민속학자가 스님에게 주었던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느가 해변으로 홀로 나갔을 때 펜션에 남은 스님과 민속학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알게 된다. 안느의 주장을 들었어도 아직은 석연치 않다. 그녀는 정말, 왜 스님에게 만년필을 달라고 한 것일까.

그녀와 스님의 앞선 대화 속에 일단의 실마리가 있기는 하다. “나는 왜 무서움을 느끼는가”라고 묻는 안느에게 스님은 당신이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그 무언가가 무서운 것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이 그 무언가를 무서워해서라고 답해준다. 무서운 것이 있어서 무서운 게 아니라 무서워하니까 무섭다는 것이다. 안느는 스님의 그 말에 만년필을 요구하며 응대한 것이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그게 마음의 문제라면, 내가 무언가 갖고 싶다고 하면 그건 가질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인 것 같다. 안느가 스님의 말의 구조를 고스란히 빌려 반박하고 있는 모양새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러한 선문답 외에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1부에서도 2부에서도 텐트가 좋아 보인다는 안느의 말 한마디에 안전요원은 그럼 “유 캔 해브 잇”이라고 응하는데, 그건 당신이 원하면 가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1부와 2부의 안느는 텐트를 준다고 해도 받지 않았지만 3부의 안느는 만년필을 갖겠다고 한다.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3부의 안느가 스님에게 한 행동은 안전요원이 “유 캔 해브 잇”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먼 메아리로서의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스님도 손바닥에 공을 그리며 “유 캔 해브 잇”이라고 말했지만 안느는 보이지 않는 그것 대신 눈앞에 보이는 만년필을 가리키며 갖기를 원함으로써 앞선 장면들에 등장했던 안전요원의 말과 그 밖의 안느들의 선택을 영화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이 장면은 <다른나라에서>의 어떤 중요한 모티브들, 즉 ‘이동과 운동의 모티브’들의 존재를 알려준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주고-받고’의 모티브를 직접적으로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장면이다. 이것이 안느가 만년필을 요구한 필요라면 필요다. 말하자면 3부의 안느가 스님에게 만년필을 달라고 할 때 그 부탁은 지금 뭔가 주고받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영화적 제안으로도 보인다. <다른나라에서>의 인물들은 꼭 선물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건네고 건네받고 받지 않더라도 주려고 하고 준다고 하지 않았는데도 달라고 한다. 1부에서 안전요원과 안느가 각각 노래와 편지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시작으로 이 목록은 늘어가고 결국에는 사람과 사람을 넘어 각 파트인 1부와 2부와 3부끼리도 주고받는다. 무언가 자꾸 이동하려하고 이동한다. 대표적으로는 소주병과 우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실은 이 만년필도 그런 운명 안에 있다. 그러니 3부의 안느가 요구하여 받아낸 이 만년필은 필시 1부의 안느가 안전요원에게 미안함과 따뜻함을 전하기 위해 새벽의 베란다에서 편지를 작성할 때 사용한 그 만년필일 것이다. 3부와 1부가 서로 주고받은 또 하나의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쉬지 않고 이동하고 움직이는 <다른나라에서>의 세계에 지 금 막 발을 들인 것이다.

주고-받고, 잃고-찾고, 오고-가고

비스듬히 함께 엮여 있는 두 번째 모티브가 있는데 그건 ‘잃고-찾고’다. 프랑스의 영화 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 뱅상 말로사는 <다른나라에서>가 주인공의 소통 불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재해석쯤 될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의견은 재미있지만 잃고-찾고의 모티브 안에서 볼 때 오해이거나 빙산의 일각에 해당한다. 소통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잃고-찾고의 반복을 거치면서 소통은 깜박이며 잠시 성공하거나 잠재된 상태로 남는 것이다. 더군다나 <다른나라에서>의 잃고-찾고는 주제적이지도 문화적이지도 않으며 반드시 행위적이고 운동적이다.

잃어버리는 대상은 아주 다양하다. 그건 마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찾으러 나서는 사람과 경로도 다양하다. 빌린 우산을 돌려주기 위해 펜션집 딸의 숙소를 찾아갔다가 거기에서 안전요원과 펜션집 딸이 깔깔대며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걸 본 1부의 안느는 그때 평정심을 잃고 그날 밤 안전요원에게 퉁명스럽게 군다. 그때 안전요원은 때마침 “아임 로스트”라는 문장을 외우는 중이다. 사랑하는 남자인 영화감독 수와 만나기 위해 모항에 온 2부의 안느는 난데없이 꿈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수와 함께 휴대폰을 찾으러 다닌다. 때론 사람이 대상이 되는데 그게 이 영화에서 포복절도할 만한 웃음을 만들기도 한다. 3부의 갯벌 장면. 만삭의 아내와 민속학자는 갯벌에서 엉뚱한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안느와 영화감독 종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고 세명의 안느가 공통적으로 찾고자 했으나 찾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잠시 잠깐 찾는다 해도 꿈속에서였거나 텐트 안에 있는 작은 조명등 정도였던 그것은 무엇인가. 등대. “등대가 어디 있나요?” 안느들은 자주 묻지만 스님의 말투를 빌려 답하자면 등대란 그런 것이다. 찾는 사람의 눈과 마음에 있는 것. <다른나라에서>의 인물들은 종종 무언가를 잃고 찾으러 다니고 결국 찾고 또는 찾지 못한다.

제자리에 앉아 있으면 잃어버릴 일이 없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고 난 뒤라면 또 어쩔 수 없이 찾으러 돌아다니는 수밖에는 없다. 그게 이 영화의 세 번째 이동과 운동의 모티브, 인물들의 ‘오고-가고’와 연관된다. 잃어버린 마음을 다시 적어 편지로 전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가(와)야 하고 잃어 버린 휴대폰을 찾기 위해서는 그걸 찾으러 와(가)야 하며 새벽녘에 외국 여자와 사라져버린 남편을 찾기 위해서는 어쨌든 갯벌에 가(와)야만 한다. 애초에 모항이라는 해변에 안느가 오는 것으로 시작하여 어디론가 안느가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이기에 오고-가고는 <다른나라에서>의 영화 전반에 관련되어 있는 문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신묘할 정도의 미로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백미 중 하나라고 해야 할 2부의 꿈 장면들은 오고-가고를 ‘들고-나고’라는 바뀐 계열의 경험으로까지 확장한다.

2부에서 영화감독 수를 홀로 기다리던 안느가 언제 잠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안느가 2층 방의 조명등을 매만지는 그때에 숏은 컷하더니 다음 장면부터 상상과 꿈이 반복되고 그 와중에 영화감독 수는 세번 안느에게 온다. 첫 번째 올 때는 안느의 짧은 상상 속에서 오고 두 번째 올 때는 꿈속에서 오고 마지막으로 올 때는 등대가 없는 바닷가에 안느가 앉아 있을 때 온다. 이중에서도 그의 세 번째 방문은 여전히 현실인지 꿈인지 장담하기 어려운데, 다만 꿈속에서는 있었던 등대가 거기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현실로 추론해볼 수는 있다. 어쩌면 이 장면은 진짜 등대란 무엇인가에 관한 중요한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등대가 없는 자리, 거기 등대와 같은 뒷모습으로 안느가 앉아 있다. 그때 불현듯 수가 다시 나타나 둘은 격정의 포옹을 한다. 2부에서 등대를 찾아 나서는 것은 안느이지만 그녀 자신이 등대가 되고 있으므로 등대를 찾아내는 것은 오히려 수다. 이 들고-나고의 마지막 과정에 이르러 사랑한다는 말과 수의 뺨을 때리기를 번갈아 하는 안느의 행위란, 지금 이 신묘한 오고-가고 혹은 들고-나고를 몸소 체험한, 꿈과 현실을 오가는 경험을 한 주인공의 지극히 희극적인 몸짓일 것이다. <다른나라에서>에 의도적으로 유난히도 많이 등장하는 두개의 영어 단어를 조금 과장되게 섞어 표현하자면, 크레이지하면서도 뷰티풀한 바로 그런 장면이다.

관계라는 활동, 세개의 다른 나라, 뷰티풀한 그 무엇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주고-받고, 잃고-찾고, 오고-가고라는 이동과 운동의 모티브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형성하기 위한 것인가. 혹은 어디에 기여하고 있는 것인가. 이 모티브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의미가 아니라 활동의 모티브들이다. 만년필이 편지쓰기라는 행위를 가능케 하듯이, 우산이 안느의 떠나는 뒷모습을 가능케 하듯이 이 세 계열의 모티브도 무언가를 가능케 하기 위해 여기 도입됐다. 이들은 스스로도 부지런하게 활동하지만 무언가 초활동적인 것에 기여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주목적인 것 같다. 그건 무엇인가. 그 궁극의 초활동적 모형을 말해야 한다면, 나는 그걸 ‘관계’라고 말할 생각이다. 정확히는 ‘관계라는 활동’이라고 부를 생각이다. 관계의 형성이나 관계의 복원도 아닌 그리고 관계의 활동도 아닌 관계라는 활동이다. 의미구조로부터는 떨어져 있고 지속적으로 전체와 세부를 움직이게 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초활동적으로 움직이며 세계의 양상을 낳고 있는 그 관계라는 활동.

지난 두편의 영화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과 비교해보면 <다른나라에서>의 특징인, 관계라는 활동이 좀 더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감독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북촌방향>은 누군가 한 장소를 세번 반복해서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영화다. 소설이라는 술집을 주인공이 찾아갈 때마다 우리는 애매함을 겪어야 했는데 그 애매함을 실어 나른 요체는 무엇이었던가. 시간, 시간의 복잡성, 시간의 복잡성을 만든 구조적 갈래들이었다. 한편 <북촌방향>을 설명한 감독의 말의 형식을 빌려 <옥희의 영화>를 설명하자면 이 영화는 누군가 한 인물이 자기의 존재를 네번 드나들며 애매해지는 이야기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인물들의 존재가 애매했던 영화,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인물들이 살아 있어서 중요했던 영화였다. <북촌방향>에서는 그 장소를 찾아간 것이 매번 처음인지 연속인지 알 수 없었고 <옥희의 영화>에서는 매번 새로 시작하는 단편의 인물들이 시간상 연속된 존재들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같은 이름을 가진, 그러나 존재가 다른 세 여인이 각각 다른 시간에 같은 장소를 한번씩 찾아오는 <다른나라에서>는? 여기에도 무언가 애매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놀랍게도 그런 분위기를 성취해냈다. <다른나라에서>는 존재도 헷갈리지 않고 시간도 복잡해지지 않았는데 여전히 신비로운 애매함이 깃들어 있다.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에 비하면 의도적으로 복잡성이 약화됐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말 그대로 복잡성이라기보다는 애매함이라고 해야 할 그런 분위기들이 지배적이다. 겹치고 겹쳐서 중첩적인 무엇인가가 된 두편의 전작에 비교하여 <다른나라에서>는 중첩보다는 평행성이 더 강조되면서 아슬아슬하게 무언가 앞과 뒤로 걸치고 이어지고 하면서 관계라는 활동이 애초부터 갖고 있는 그 성질, 그 어중간하면서도 공존하는 느낌을 최상으로 전해주고 있다. 관계란 느슨한 공존이라는 게 중요하다. 혹은 서로 어중간하게 나란히 걸쳐진 각자의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이 곧 관계라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이 영화가 비교적 간결한 옴니버스 형식으로 완성된 것과 아마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나라에서>라는 제목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대체로 이 제목은 해석되기를 프랑스인 안느가 (한국이라는) 다른 나라에서 겪는 이야기라고 이해되는 것 같다. 이것이 일반적이며 사실 틀릴 게 없는 말이기는 하다. 혹은 (프랑스라는) 다른 나라에서 온 타지인 안느가 한국의 해변 모항에서 겪는 일이라고도 이해되는 것 같다. 그것 역시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다른나라에서>의 제목의 정체는 좀 다르다. 내게 이 영화의 제목은, 아니 제목이 주는 이 영화의 어떤 상태는 ‘(각자 차이를 지닌 서로의) 다른 나라에서’라는 어떤 동시성과 공존성으로만 이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다른나라에서>의 다른 나라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국가가 아니라 나뉘고 이어져 있는 이 영화의 1부와 2부와 3부 그 자체인 것 같다. 프랑스나 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여기 세번에 걸쳐 모항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과 차이로 담고 있는 각 파트들이 그 나라인 것 같다. 그러므로 옴니버스로 연결되어 이 세 개의 나라가 차례대로 연결될 때 그것이야말로 다른 나라에서의 무엇이 된다.

이 세개의 나라를 움직이는 활동모형은 홍상수의 전작들이 보여준 활동 모형 및 활동 작용들과는 또 다른 변별점을 갖게 된다. 홍상수의 많은 영화들이 <강원도의 힘>이나 <극장전>처럼 A/B의 대구 구조를 지향해왔다면 혹은 <밤과낮>처럼 A를 일기식으로 나열했다면, 혹은 <옥희의 영화>처럼 A1-A2-A3가 하나씩 서로를 통과하는 것이었다면, 혹은 <북촌방향>처럼 그것들이 분절되고 접속하고 중첩되는 것이었다면, <다른나라에서>는 A1→A2→A3로 나란히 직진 운동하는 가운데 블록과 블록이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예컨대 이 세개의 블록은 유사하지만 각자 독립적이다. 임시적으로는 완결성까지 갖췄다. 파트마다 새로 찾아오는 안느1, 안느2, 안느3이 따로 있으며 그들은 존재가 다르고 찾아오는 시간도 다르고 방문의 이유도 다르지 않은가. 1부에서는 관심과 질투 뒤에 화해라는 결말이 있고 2부에서는 기다림과 꿈 뒤에 사랑이라는 결말이 있고 3부에서는 상처와 바보 같은 실수 뒤에 새 삶이라는 결말이 있다.

그런데 이 세개의 에피소드, 세개의 나라, 세개의 블록은 단지 각자의 완결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란히 있는 그 상태에서 밀고 당기고 작용하고 반작용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같다. 매번 반복되면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유사하지만 차이를 지닌 대사나 만남의 구조 같은 것들이 그러하고 우산, 소주병, 만년필, 그리고 탁자 위의 담배와 라이터 등 작은 사물들이 그러하다.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나라와 나라, 블록과 블록 사이를 양쪽으로 흔들고 있다. 여기에 세 번째 활동이 있는데 그건 이 세개의 나라를 동일하게 관통하고 있는 어떤 지평과 같은 것이다. 세개의 나라의 공통 지대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이건 변하는 것이라기보다 늘 있는 것들이며 지속하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뷰티풀이라는 단어와 같은 것들인데, 뷰티풀이라는 말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쓰이고 영어로도 불어로도 쓰이지만 어떻게 쓰이든 그 가치는 한 가지로 쓰이며 변치 않는다.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다. 한편 사람의 경우에는 안전요원이라는 인물이 그 뷰티풀에 해당한다. 안느가 매번 새로운 인물로 모항을 찾는 동안 이 안전요원은 언제나 같은 옷에 같은 장소에 같은 모습으로 늘 거기 있으면서 세개의 에피소드를 동일하게 관통하는 어떤 지대가 된다. 아름다운 게 아름다운 것이듯 그는 좀체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영화 속 인물들은 빠짐없이 그를 거쳐 가게 되어 있다. 그가 어푸어푸하며 물속에서 나올 때 그래서 감동적이다.

<다른나라에서>

이자벨 위페르, 안전요원, 등대

이상의 활동모형과 작용으로 보건대 <다른나라에서>는 그 자체로 특별한 영화이거니와 홍상수 영화 세계 안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복잡한 곡선 활동의 영화를 연출하는 데 능한 홍상수가 이번에는 직선, 아니 직선이라기보다는 선으로 연결된 세개의 블록 군집을 만든 것이다. 여기에 홍상수 영화의 새로운 용기와 아름다움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홍상수 스스로 이 영화를 두고 투명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이 영화의 이러한 모형과 작용에 대한 인상을 그가 그렇게 느낀다는 것으로 나는 들린다. 어쩌면 우리는 <다른나라에서>를 그 이전의 영화들처럼 첩첩으로 포개어지는 복잡성의 영화로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다른 방식의 바람이 분다. 단순성의 바람. 선명하고 투명하고 맑은 방식의 활동모형이 일으키는 바람이 분다. 그것이 탄복의 이유인데, 시간이나 존재의 복잡성을 불러들이지 않고도 홍상수의 영화가 어떻게 초활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 예가 <다른나라에서>이기 때문이다.

실은 관계라는 말이 본래부터 덩어리째 갖는 어쩔 수 없는 성질이 있다. 관계는, 관계라고 말할 때 그 자체로 이미 피상적이고 상투적이며 희미하고 개별적이고 미완성이다. 그러나 관계란 늘 언젠가 어디에서인가 맺어지는 어떤 운명과도 같은 세상의 이치다. 이 관계의 성질에 대해서 말하려는 영화의 경우에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고정성에 붙잡히면 그 피상의 개념을 탈피하기 어렵다. 홍상수는 대신 그 피상성을 세개의 잠재적이고 평행적이며 유동적인 모형으로 다시 그려보고 있다. 외국인을 만났을 때 한국인은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아주 단순한 관계를 여러 가지 작용으로 다시 그려보는 셈이다. 이 영화는 이자벨 위페르라는 배우가 출연을 결정하고 나서야 구조를 결정지었다. 많은 이들이 위대한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홍상수의 협연을 말한다. 물론 그 협연은 위대한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 협연의 이면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 같다. 홍상수는 이를테면 자신의 영화 구조 안에서 위페르를 위치지은 것이지, 특별하게 ‘위페르 효과’를 위해 구조를 헌납하는 식의 선택을 하지 않았다. 가령, 정작 위페르 효과를 노렸다면 그녀는 다른 인물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클로드 샤브롤의 배우였고 얼음과 불의 연기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감정의 마술사인데 <다른나라에서>는 그런 걸 표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전에 없이 맑고 귀엽다. 위페르가 단지 외국인 안느로 충실했으며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로서만 충실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이건 홍상수라는 감독의 또 다른 용기이며 이 용기로서 <다른나라에서>의 등장인물들 모두는, 주연에서 조연까지 모두가, 공정하고 조화로운 역할로 마치 그들이 등장하는 자리가 원래부터 그들의 것인 양 가치있게 나온다.

그러므로 실은 <다른나라에서>의 인물들 중 어느 한쪽에 힘이 실려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른나라에서>를 위페르의 영화라고 단정짓기도 어렵다. 이건 이 영화에 인물들의 개별 보이스 오버가 없으며 단지 파트와 파트, 나라와 나라 사이를 구분지을 때만 정유미의 보이스 오버가 기능적으로 사용되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에 보이스 오버가 등장할 때 생기는 그 감정의 특별함은 어느 한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으며 조심스럽게 모두를 표면에 놓고 있다. 영어라는 표면의 언어는 처음에는 한계인 것처럼 예상됐지만 막상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불가피한 언어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혹은 그 소통 중에 일어나는 몸짓들 때문에 거기 동원되는 망설임이나 친밀함의 몸짓 언어들 때문에 어느 면에서 무성영화적인 가치가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때로는 텐트 안에서 섹스를 한 것인지 그냥 술에 취해 잠들어버린 것인지 알 길 없이 민망하게 포개진 두 사람의 표정과 몸통만으로 혹은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며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는 여자의 뒷모습만으로 혹은 수영하다 물 바깥으로 춥다며 뛰쳐나오는 남자의 오들거림만으로 혹은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그들의 걸음과 동선들만으로도 이 영화는 선명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한 인상들이 모인 <다른나라에서>는 마치 위대한 무성영화를 한편 보았을 때 만끽할 수 있는 그와 같은 활동감을 선사한다.

칸의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손을 들고 물었다. 한국 남자들은 외국 여자를 만났을 때 다들 그렇게 반응하느냐는 것이 그의 질문의 요지였다. 그는 물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 남자들은 외국 여자를 보면 전부 그렇게 질척대는 것인가. 그때 안전요원 역을 맡았던 유준상은 안전요원에 관하여 “그는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대한 것 같다”고 답했던 것 같다. 질문한 기자는 영화를 완전히 잘못 보았다. 그는 <다른나라에서>의 나라를 한국으로 가정했으며 이것을 문화라는 범주 아래서 본 것 같다. 일반론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떨어져 나온 이 영화를 일반론으로 묶어 다시 질문한 것이다. <다른나라에서>는 관계라는 지극히 일반론에 얽매인 그 세상의 이치를 어느 예를 구하기 어려운 구체적인 방식으로 다시 들여다본 특별한 경우다. 여기에 한국 남자들이나 외국 여자들이라는 개념은 그러니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 기자의 물음에 이렇게 답할 수는 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청량한 여자는 언젠가 등장했는데 남자는 그러한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다른나라에서>의 안전요원은 그가 가진 백치미 또는 그가 가진 지극히 동물적인 순수성으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거의 보기 어려운 청량한 남자로 등장한다. 모든 사람의 존재가 다 바뀌는데, 일부러 이름이 부여되지 않고 단지 안전요원으로만 불리는 이 남자만 어느 나라에서건 동일하고 굳건하게 백치미를 유지한다. 그가 안느를 만났을 때마다 하는 중요한 말이 있다. 아니 늘 안느가 먼저 물어본다. 등대는 어디 있나요. 이 남자는 늘 한참을 횡설수설한 끝에야 등대가 무엇인지 겨우 알게 되고 그런 다음에 그의 대답은 언제나 일관된다. 아이 돈 노, 잘 모르겠는데요. 중요한 건 등대가 아니라 등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몰라도 그는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와 관계 맺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나는 <다른나라에서>가 국경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관계란 결국 사람이라는 나라 사이의 국경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나라와 당신이라는 나라 사이의 그 경계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불화를 때로는 사랑을 낳는 그 경계선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활동하는 국경, 활동하는 관계를 느끼게 하는 이 삶의 모형은 기존의 홍상수 영화의 아름다움의 항목에 또 하나 추가되어야 하는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당신 옆의 나, 내 옆의 당신처럼 나란히 살되 각자의 다른 나라에서 따로 또 같이 동시에 살아감을 아름답게 그려냈으니 말이다. 홍상수는 이 영화의 제목을 <다른나라에서>라고 지었다. 나는 이 영화를 나와 당신 사이의 친애하는 국경으로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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