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6일 <내 아내의 모든 것>의 관객 수가 전국 300만명을 돌파했다. <어벤져스>가 휘젓고 <맨 인 블랙3>가 어깨를 편 5월의 극장가에서 한편의 한국영화가 세운 기록이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이 최근 역대 한국 멜로영화 가운데 최고 성적을 기록한 <건축학개론>의 성적을 깰 것인가란 질문이 뒤따랐다. 지난 3월22일 개봉한 <건축학개론>은, 2주 앞서 개봉했던 <화차>보다 먼저 전국 관객 250만명을 넘긴 바 있다.
<화차> 또한 <러브픽션>보다 늦게 개봉했지만 <러브픽션>보다 먼저 170만 기록을 달성했다. <러브픽션>의 하정우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의 하정우와 함께 ‘하정우 대세론’을 낳았고, <범죄와의 전쟁>은 <부러진 화살> <댄싱퀸>과 함께 2012년 1분기의 극장가를 이끈 한국영화로 꼽혔다. 흥행성적으로 케빈 베이컨 게임을 해보니, 2012년 상반기는 그처럼 한국영화의 흥행이 서로 겹치고 겹치는 시즌이었다. 관객의 입에 오르내린 작품은 대부분 관객 200만명을 넘겼고, 눈에 띈 영화들은 100만명을 넘겼다. 말 그대로 ‘미친 상반기’. 조금 더 과장할 때, 한국영화가 걸면 터지고 있다.
물론 희비는 손익분기점에 따라 갈릴 것이다. 몇몇 한국영화가 연달아 좋은 성적을 내면서 일으킨 착시현상일 수도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1분기 산업결산자료는 지난 1분기를 한국영화들이 주도했다고 했지만, 1월에도 <원더풀 라디오> <파파> <페이스 메이커> <네버엔딩 스토리> 등 저조한 성적으로 막을 내린 영화는 꽤 있었다. 3월 이후에는 <가비>와 <인류멸망보고서> <봄,눈> 등이 그랬다. 하지만 2012년 상반기 동안 한국영화가 동원한 전체 관객 수는 여전히 질문을 낳고 있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의 집계에 따르면, 2012년 1월1일부터 5월31일까지 한국영화가 동원한 총 관객 수는 약 3650만명이다. 2011년에는 같은 기간 동안 약 2860만명의 관객을 기록했다. 2010년에는 2460만명, 2009년에는 2760만명, 2008년에는 2340만명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정책센터의 황동미 연구원은 “2008년에서 2009년으로 넘어가던 시기는 이제 내수시장이 한계에 달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지만, 올해 상반기를 보면 1, 2, 3월을 한국영화가 견인했고 그 흐름이 4, 5월에도 이어지는 추세”라며 “전체 판을 키우는 데 한국영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궁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12년 상반기는 어떤 시간이었을까. 누가 어떤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고, 누가 그 영화를 본 걸까.
20대를 넘어선 30대 관객층의 성장
먼저 같은 시기에 외국영화가 동원한 관객 수를 살펴보았다. 역시 2012년 5월31일까지의 관객 수를 집계했을 때, 약 3210만명이다. 2011년에는 2710만명으로 집계됐다. 2010년 3430만명, 2009년 3190만명, 2008년 3210만명이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는 할리우드영화를 비롯한 외국영화가 한국영화보다 강세였고, 2011년은 비슷했으며 2012년에는 약 400만명 차이로 한국영화가 우세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 올해 <어벤져스> 이전에 개봉한 할리우드영화 가운데 의미있는 기록을 낸 영화는 지난 4월에 개봉한 <배틀쉽>과 지난해 12월에서 1월로 넘어왔던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정도다. 할리우드영화의 약세가 상반기 한국영화의 흥행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듯 보인다. 상반기 한국영화의 흥행을 분석하는 지표 가운데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관객의 연령층이다. 맥스무비의 김형호 실장은 “최근 3, 4년의 데이터와 비교할 때, 30대 관객의 비중이 15%가량 성장했다”고 분석했다. 맥스무비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상반기에 흥행한 한국영화를 관람한 30대 관객 비중은 20대에 비해 많게는 15%, 적게는 5%가량 많다. 영화제작자와 투자자들이 의도했던 걸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 그동안 꾸준히 성장해 오던 30대 관객은 2012년 상반기의 영화를 통해 잠재력을 폭발시킨 듯 보인다.
2012년 상반기를 바라보는 영화인들은 대체적으로 30대 관객의 중요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NEW의 장경익 이사는 “영화산업이 발전할수록 관객 연령층이 넓어지는 건 당연한 변화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의 이진훈 한국영화팀장은 “과거에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두려워했지만, 이제 그런 선입견은 줄어들고 있다. 굳이 15세 관람가 영화로 만들려 하지 않고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받더라도 표현할 것은 제대로 하는 게 낫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과거의 30대와 지금의 30대가 다른 관객이라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맥스무비의 김형호 실장은 “지금의 30대는 1990년대 후반에 20대를 보낸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10년 전의 30대는 한국영화를 잘 보지 않던 관객이었다. 90년대 후반 학번의 관객은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가리지 않고 보던 세대다. 그들이 이제 자기가 번 돈을 알아서 쓸 수 있는 단계에 왔다. 영화를 자유롭게 보던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20대는 그때 어떤 10대들이었을까. 케이블TV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기에 자란 그들이 지금에 와서 IPTV나 다운로드를 더욱 친숙하게 느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볼만한 영화와 영화계의 청신호
30대 관객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지표는 다시 말해 이 시기에 그들을 만족시킬 영화가 나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반기의 한국영화들을 돌이켜보자. 1월과 2월의 극장가를 휩쓴 <댄싱퀸>과 <부러진 화살> <범죄와의 전쟁>은 어떤 영화였던가. 정치와 복고적 정서, 사회의 분위기와 부합 한 작품들이다. <러브픽션>과 <건축학개론>은 30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고, <내 아내의 모든 것> 또한 로맨틱코미디로서는 이례적으로 기혼남과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간기남>과 <은교> 등 에로틱 코드가 담긴 작품 또한 같은 맥락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작품들이 단지 소재와 캐릭터, 정서만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관객이 그동안 할리우드의 문법과 관습에 맞춰 시뮬레이션하듯이 만든 영화들에 피로감을 느낀 게 있었다”고 말했다. 리얼라이즈픽쳐스의 원동연 대표는 “지금의 30대 관객은 자유롭게 소비하고 있지만 오히려 여가생활에서는 퀄리티를 따진다”고 말했다. 원론적인 분석일 수밖에 없지만, 또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이유. 즉 2012년 상반기는 그만큼 예년에 비해 볼 만한 영화들이 많았다는 게 가장 명확한 분석일 것이다. 심재명 대표는 “높은 완성도와 장르의 다양성”을 상반기 한국영화의 특징으로 꼽았다. 원동연 대표는 “그동안의 부진으로 인한 절치부심의 결과인 것 같다”고 말한다. “이제는 캐스팅만 본다든지, 인맥관계로 투자를 밀어준다든지 하는 게 통하지 않는다. 영화인들의 선구안이 매우 정교해졌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볼 만한 영화가 많았다는 사실 이상으로 그동안의 적신호를 상쇄할 만한 청신호들이 눈에 띈다. 먼저 2012년 상반기는 스타감독이 이끌거나 신인감독들이 대거 등장한 시즌이 아니었다. 정지영, 변영주 등 한동안 영화현장을 떠나 있던 감독들의 복귀작이 선전했고, 윤종빈과 이용주 등 전작의 성적 때문에 우려의 시선을 안고 있던 감독들의 작품이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러브픽션> <화차> <건축학개론> 등 오랫동안 제작을 준비하던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한 것 또한 이례적이다. 원동연 대표는 “대규모의 영화가 아니라 중간 규모의 영화들이 중박 이상의 성적을 기록한 것도 좋은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아름다운 시절이다.
신진 투자배급사의 잠재력
다시 질문해보자. 그렇다면 왜 그동안 이런 영화들이 적었던 것인가. 그리고 왜 갑자기 쏟아져 나왔나. 각 투자배급사가 내놓은 상반기 성적에서 답을 유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배급 편수 대비 성적으로 봤을 때, 주목할 만한 기록을 세운 곳은 NEW와 쇼 박스다. 롯데는 <건축학개론>, CJ는 <댄싱퀸>과 <화차>로 체면치레를 한 정도다. 지난해부터 재편되기 시작한 투자배급사 구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한 프로듀서는 “영화제작자들이 준비하는 작품들은 많았지만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 내놓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어차피 한해 편수는 제한적이었는데, 이제 조금씩 기회가 늘어난 것이 아닐까.” NEW와 시너지 등 최근 몇년 동안 등장한 새로운 투자배급사와 무리하게 제작편수를 늘리지 않았던 투자배급사들의 잠재력이 드러난 시기로 보는 관측이다. 한 투자자는 “이제 극장을 가진 투자배급사가 흥행에서도 우위를 가진다는 환상은 깨진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하반기에는 CJ가 좋은 성적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성적도 영화가 좋아서이지 극장이 있기 때문에 나온 성적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극장은 좋은 영화를 상영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12년은 역시 영화의 본질이 중요한다는 것을 알려준 시기인 것 같다.” 2012년 상반기는 다양한 장르와 규모, 완성도와 작품성이 한국영화에 등을 돌렸던 관객을 돌이킬 수 있다는 모범사례를 제시했다. 과연 이러한 호시절은 지속될 것인가. 한국영화는 정말 체질 개선에 성공한 것일까? 2012년 상반기가 채 끝나기 전에 품어보는 섣부른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