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다른나라에서>에 관해선, 늘 그랬듯이, 정한석 기자가 이미 훌륭한 글을 썼다. 나는 그의 도저한 구조적 분석을 따라갈 눈이 없다. 정한석이 그렇게 섬세하게 작품의 결을 음미하며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에 관해 내 식으로 써보고 싶어졌다. 반복과 차이, 중첩과 미끄러짐 등과 같은 그의 영화의 구조를 경유하여 읽는 방식과는 좀 다르게 나는 그냥 몇몇 뇌리에 남는 이 영화의 이미지만 갖고 쓰려고 한다.
우선, 이자벨 위페르. 그녀는 이 영화에서 안느라는 이름의 프랑스 여성으로 나와 1인3역을 한다. 내가 프랑스영화에서 본 그녀의 이미지, 또는 그녀가 젊었을 적 출연한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과 같은 영화에서 본 그녀의 이미지는 세고 차가우며 그만큼 불같은 여자였다. 여기서는 그런 이미지들이 다양하게 나열되면서 전반적으로 귀엽다는 인상을 주는 여인으로 나온다. 다른 나라 관객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관객은 이렇게 저렇게 세개의 에피소드에서 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느낄 것이다. 어떤 그녀의 출연작에서보다 이자벨 위페르는 이 영화 속 모항을 배경으로 자주 걷는다. 실례되는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성큼성큼 걷는 게 아니라 아장아장 걷는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그녀는 누군가의 집 근처에 모여 있는 염소떼를 바라보며 에헹, 염소 소리를 흉내내는데 이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은 그녀의 다른 출연작들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다르고도 같은 안느들, 그 정체성의 겹침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자벨 위페르의 안느는 한국에 여행을 온 영화감독이며 같은 펜션에 머무는 한국의 영화감독 부부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자 사려 깊게 행동하는 외지인이자 관찰자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자벨 위페르의 안느는 한국의 영화감독과 사랑에 빠진 외국의 유한계급 여성이며 불륜의 밀회를 즐기러 왔으나 남자가 도착하지 않아 약간 짜증이 나 있고 그 남자를 기다리는 사이에 황당한 꿈을 꾸는 것으로 결핍을 드러내는 여자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자벨 위페르의 안느는 한국 여성과 바람이 난 남편과 이혼을 하고 한국인 민속학 여교수와 여행을 온 프랑스 여자인데, 충전을 위해 온 이곳에서 고승 분위기를 풍기는 스님을 민속학자의 주선으로 만나 요령부득의 선문답을 나눈 뒤에 오히려 더 절망에 빠져 바닷가에서 소주를 마시며 자살하려는 듯이 구는 여자이다. 이 모든 에피소드는 모항에 휴식차 어머니와 내려 온 영화과 여대생 원주(정유미)가 써내려간 트리트먼트의 내용이다.
상상 속에서 안느라는 이름의 세 여자는 다른 캐릭터의 여자지만 이자벨 위페르라는 한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이자벨 위페르를 의식하고 있었다. 굳이 이자벨 위페르를 몰랐던 관객이어도 비슷한 반응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들은 다른 여자들이지만 한 여배우가 연기하는 여자들이다. 나는 그냥 한 여자로 봤다. 영화에 빠져들어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빠져들어 흥미롭게 보았는데도 그랬다. 그럼 그냥 한 여자로 보면 안되는 것일까. 이 세명의 서로 다른 직업과 처지의 안느들은 한 창작자가 그려낸 다른 안느들이며 동시에 한 여자가 연기하는 안느들이다. 물론 이것은 감독 홍상수와 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영화 바깥 관계이기도 하다. 이 겹침들 속에서 위페르가 귀엽게 연기하는 정체성의 겹침을 나는 홍상수 감독이 보는 인간관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관찰자 안느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욕망에 갈급한 안느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절망에 빠진 안느의 캐릭터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렇지만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이렇게 다중적으로 열려져 있지 않다. 누군가가 선하고 매력적이고 곧고 올바르다고 한다면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가 악하기도 하고 추해지기도 하고 틀린 판단을 내릴 때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하면 변했다고 하고 사람을 잘못 봤다고 판단내린다. 그런데 홍상수의 우산 아래서 창조되는 캐릭터들은 변하기 쉽고, 자신이 보는 대로만 세상을 보는 만큼 타인의 영향을 곧잘 쉽게 받아들이며, 행동들의 범례를 나열했을 때 지극히 비일관된 성향을 보이는 캐릭터들이다. 세명의 안느의 예를 들자면, 그녀들의 처지와 상황을 안다고 해도 그녀들이 무슨 지향을 갖고 사는 사람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사실 어떤 영화를 봐도 그걸 잘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대신 많은 영화들이나 이야기들은 주인공들의 명확한 목표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그게 지향인지 무엇인지는 따지고 보면 모호한 건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그런 목표 비슷한 것, 대신할 만한 핑계 같은 것이 나오기는 한다. 영화에서 세명의 안느는 모항에서 늘 등대를 찾는다. 등대가 있다는 말을 펜션 주인 아가씨에게서 듣기는 했는데 그 세명의 안느가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만나는 안전요원 유준상은 등대가 어디 있느냐는 안느의 말에 늘 모른다고 대답한다. 대신 안느는 진짜 등대 말고 유준상이 갖고 있던 작은 모형 등대를 본다. 그녀가 등대를 보는 것은 두 번째 에피소드의 환상장면에서다. 그녀는 그림 같은 등대를 바라보며 바닷가에서 멋진 모습으로 앉아 있으나 외국인 여성인 그녀에게 다가오는 어떤 중년 한국 남자를 바라보고는 기겁해서 그 자리를 도망친다.
아이덴티티의 다중성과 역동성 받아들이기
나는 개인적으로 모든 극영화에서 이야기는 관객의 주의를 붙잡기 위한 맥거핀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의 여정에서 우리는 숨쉴 곳을 찾는다. 우리의 모호하고 혼란스런 삶의 여정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숨이 열리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순간을 찾는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런 즐거운 순간들은 다중 퍼즐의 조합과 해체의 반복운동 속에서 찾아온다. 세 캐릭터를 연기하는 한 여배우를 축으로 그녀들의 눈에 비친 주변 인물들의 다른 모습들을 비춰주는 이 영화 <다른나라에서>에서 그 기쁨은 동전의 양면 같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다중 초상화 판본을 보는 듯한 작은 놀라움들 속에서 온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철학자 김용옥이 연기하는 고승 비슷한 스님 캐릭터는 안느의 고뇌를 상담하면서 ‘일체유심초’에 기초한 선문답을 한다. 무서운 게 있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무서워하니까 무서운 것이다, 라는 말은 바깥은 공인데 색이 있는 것은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불가의 말의 직역이다. 그걸 흉내내 말해보면 이 영화의 세 에피소드의 변형은 안느가 보는 것은 곧 안느가 그렇게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는 식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에피소드에서 안느가 안전요원 유준상을 만날 때 수영을 하다 해변으로 달려나오는 늠름한 근육질 남자 유준상은 춥지 않느냐는 안느의 질문에 춥지 않다고 첫 번째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말하지만(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배우 유준상은 정말 추워 보인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춥다고 말한다. 이 에피소드에서의 안느는 소주를 두병째 마시면서 마치 자살이라도 할 듯이 절망의 시연을 바닷가에서 벌이던 참이었다.
좀 과격하게 말하면 우리는 모두 Nobody 아니면 Anybody다. 타인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건 대상뿐이다. 대상은 우리가 찾는 것이고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는 나라는 대상도 만들어진다. 우리가 자유로워지려면 먼저 우리 스스로 자유로워져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유연하고 자유로운 관계도 만들어진다. 홍상수의 모든 영화가 그런 느낌을 줬지만 구조가 훨씬 유연해진 최근 영화에 이르러선 그런 느낌이 훨씬 강해졌고 이 때문에 영화적 활력도 더 왕성해져서 보는 사람에게 기운을 북돋운다. 이에 대한 가장 유쾌한 농담은, 전반적으로 영화가 가벼운 희극 톤이기도 하지만,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두드러진다. 안느의 꿈장면에서 안느보다 늦게 모항에 도착한 중견 영화감독은 불륜관계가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안느가 해변의 안전요원과 좀 길게 얘기를 나눈 걸 갖고 사태를 잠시 심각하게 만든다. 질투에 눈먼 이 남자의 행동은 조금 전 남의 눈에 띌까 불안해하며 그들의 사랑에 당당하지 못했던 것과 전혀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부조리한 코미디이다. 그런 그를 당당하게 나무라는 안느도 그 직전에는 휴대폰을 분실한 걸 알자 홍콩에 출장 간 남편에게 들킬까봐 안절부절못했다. 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거나 또는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지만 그들의 모습을 거리를 두고 보는 상대방이나 관객이 보면 전혀 일관된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영화 속 현실에서 도착한 중견감독을 보며 행복해하던 안느는 느닷없이 두번 남자의 따귀를 때린다. 그 남자는 이유를 몰라 당황하지만 안느의 표정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자신에 차 있으며 행복해 보인다. 그녀가 꿈속에서 본 자신과 상대의 모습이 가상이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것이다. 그녀는 꿈속의 가상, 자신이 만들어낸 나라는 대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꿈속의 나와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이 잠시 행복해서 힘껏 단호하게 남자의 따귀를 올려붙이며 즐거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그런데 그 장면에서 배경을 이루는 바다의 파도는 어떤 다른 장면들에서보다 세차게 일어나고 있다).
꿈과 같은 영화의 논리를 따라가며 홍상수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속에서 거듭 반복되는 패턴을 제시하고 금방 허물곤 하면서 존재의 연약한 아이덴티티를 긍정하고 관계의 자유를 도모하는 순간들이 더 많이 창조되는 쪽으로 자신의 영화구조를 열어가고 있다. 이렇게 열린 구조 속에서 홍상수의 영화에 대해 호의적이기 않았던 관객이 보여주는 가장 상투적인 반응, 곧 등장인물에 대해 정이 가지 않는다는 반응도 점차 희석돼 간다. 홍상수는 우리 같은 인간들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대다수 관객의 상투적인 관념은 그걸 부정했다. 아이덴티티의 다중성과 역동성을 받아들이는 데는 또 다른 절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섣부른 정의를 거부하면서 모호한 수수께끼들의 퍼즐 조합처럼 보였던 홍상수의 영화가 점점 더 따뜻하게 개인적으로 내게 다가오는 까닭이 분명해지는 것이 기쁘다. 그는 우리의 정념과 그에 따르는 불안을 동시에 화면 속에서 건져올리지만 그것들을 괄호 친 채 묘사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열어놓은 채로 묘사한다. 정념과 불안과 동요를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며 긍정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의 안느처럼 우산을 들자
따지고 보면 그가 진화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좀더 덜 상투적인 인간이 돼가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영화를 보며 기쁜 것은 희미하게나마 내게 그런 자존감을 심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자존감은 내가 잘난 인간이 돼간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라고 명명되는 인간들에 대해 좀더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전의 그의 영화들에서 느꼈던 자기 모멸감을 떨쳐버리고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의 동일시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들의 변화무쌍하고 모순투성이며 비일관된 속성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홍상수 영화의 그릇이다. 이런 가운데서 툭툭 농담처럼 던져지는 다음과 같은 대사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이자벨 위페르와 더불어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유준상은 안느를 만날 때마다 초보적인 영어로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라고 말한다. 그 말이 실없는 소리라는 건 영화 속의 그들이나 우리나 다 마찬가지로 잘 안다. 그 말은 실없지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자신에게나, 타인들에게나 비교적 진정성 있게 거듭 하는 말은 바로 그 말이 아닐까. 지켜줄게요. 물론 우린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연약하고 비겁하고 다치기 쉬우며 자기 앞가림도 버거워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삶 속의 관계들도 조금 더 자유로워지는 건 아닐까. 홍상수의 <다른나라에서>는 공간적, 시간적 제약과 상관없이 우리가 보다 더 자유로운 다른 나라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해준다. 비가 올지도 모르지만 영화 속의 안느처럼 우산을 들고 떠나면 될 일이다. 어딘가에 숨겨둔 그 우산을 들고. 우리에겐 늘 각자의 숨겨진 우산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