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선은 욕망의 선이다. <다른나라에서>에서 그 선은 하나가 아니며 서로 뒤엉켜 있다. 그런 탓에 놓치기 쉽지만, 그래도 서사의 주축이 되는 선은 결국 하나다. 그것은 안느에게서 출발해 라이프가드(유준상)를 향하는 선이다. 이 안느의 선은 직선을 그리지 못하는데, 다른 욕망의 선들이 그 위를 가로지르는 탓에, 안느의 선이 구부러지기 때문이다. 그 가로지르는 선들은 이 영화에서 ‘종수’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권해효(1부와 3부)와 문성근(2부)이 긋는다. 권해효는 안느에게 자신의 이름이 ‘종수’임을 분명히 상기시키지만 안느는 그를 계속 ‘종’이라고 부른다. ‘종수’라는 이름에서 탈락해버린 ‘수’는 문성근의 몫이 되어 그의 이름은 ‘수’가 된다. 즉, ‘종수’가 종(권해효)+수(문성근)로 분리돼 있다. 둘의 직업이 동일하게 감독으로 설정돼 있다는 점도 아울러 상기한다면, 우리는 권해효와 문성근이 적어도 서사 내부에서는 구조적으로 동일한 기능, 즉 ‘종수’라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종+수’의 개입 속에서 안느의 선은 말 그대로 곡절(曲折)을 거쳐, 라이프가드에게 변칙적으로(1부), 상상적으로(2부), 실제적으로(3부) 도착한다.
에피소드1―섹스 대신 편지
프랑스인 영화감독 안느가 영화감독 ‘종’(권해효)과 그의 아내(문소리)와 함께 모항 해변에 도착한다. (수영을 하는 유준상이 잠시 화면에 등장하지만 안느가 그를 보았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안느와 종이 숙소의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자 아내의 갑작스러운 진통이 시작된다. 문소리의 연기는 이 진통이 사실인지 설정인지를 관객이 의심하도록 유도한다. 만약 후자라면 그것은 남편 종의 욕망이 안느를 향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행해진 연기였을 것이다. 이후 안느는 혼자 외출한다. (세 에피소드 모두에서 안느의 외출은 그 자신의 욕망을 출발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그녀는 갈림길을 만난다. 세 에피소드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갈림길에서 왼쪽을 택할 경우 (해수욕장 없는 해변과) ‘등대’가 나오고, 오른쪽을 택할 경우 (해수욕장 있는 해변과) 유준상의 ‘텐트’가 나온다. 안느는 등대를 보기 원하지만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곳을 택해야 등대가 나오는지 모른다. 여기서 안느는 오른쪽을 택하고 덕분에 해변에서 유준상을 만나 그의 노래를 듣게 된다.
밤이 되어 안느, 종, 그의 아내는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삶’과 ‘해야만 하는 것도 하는 삶’을 주제로 토론을 벌이는데, 이 스쳐가는 대화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흔히 그렇듯, 아이러니하게 배치돼 있다. 이 토론에서 안느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며 살 뿐이라며 개방적인 (혹은 결과론적인) 입장을 택한다. 그녀는 낮에 유준상을 만나고 돌아왔기 때문에 자신과 그와의 사이에 어떤 욕망의 선이 이어질 수 있을 가능성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미리 변명을 준비하려 했을 것이다. 한편 종은 사람은 해야만 하는 것도 하면서 살아야 한다며 도덕적인 (혹은 의무론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 태도는 그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각오를 약간의 자기애를 드러내며 표명한 것과 잘 어울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은밀하게는, 그의 아내가 토론의 현장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 토론이 어째서 아이러니하다는 것인가. 이후 서사의 흐름을 보면 개방적인 입장의 안느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한 반면, 도덕적인 입장을 택했던 종은 안느를 유혹하려 들기 때문이다.
계속 안느를 따라가보자. 다음 장면에서 안느는 빌린 우산을 되돌려주러 갔다가 정유미와 유준상의 대화를 엿듣는다. 언뜻 심상해 보이는 이 장면에는 의미가 없지 않다. 안느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었고, 그 둘의 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했을 것이며, 그럴 자격이 없으면서도 약간의 실망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어지는 저녁 식사 장면에서 식사를 방해한다고 비난을 받는 유준상에게 완전히 냉담한 태도를 취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새벽에 베란다에서 유준상에게 전할 편지를 쓴다. (여기서 다시 권해효의 욕망이 그녀를 향하지만 그녀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유준상이므로 그녀는 권해효와 키스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편지의 메시지는 유준상에게는 불완전하게 전달되지만 “you are a beautiful…”과 “I always asked if you would…”라는 구절이 그 안에 포함돼 있으며 이 불완전한 문장들은 불완전하게나마 그녀의 욕망을 어떤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이 편지는 어쩌면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섹스를 대체한다. 달리 말하면 그녀는 섹스 대신 편지를 택해 자신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앞에서 안느의 욕망의 선이 유준상에게 ‘변칙적으로’ 가닿았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피소드2―진실은 꿈속에
프랑스 자동차회사 한국지부 부사장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지만 한국인 영화감독 ‘수’와 몰래 연애를 하는 중인 안느가 먼저 모항 해변에 도착한다. 에피소드1에서와 달리 여기에서는 아직 ‘종+수’라는 기능이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의 외출은 신속히 이루어진다. 이번에도 그녀는 갈림길에 서는데 에피소드1에서와는 달리 여기서 안느는 왼쪽을 택한다. 그래서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등대가 보이는 곳에 앉아 ‘아름다워’를 연발할 수 있었다. 여기서 안느는 ‘아름다운’ 공상에 빠지는데 이 공상은 그녀가 자신의 욕망이 더욱 극적인 지점으로 고양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용인즉 늦을 거라고 말한 ‘수’(문성근)가 나타나 그녀를 놀라게 하고, 덕분에 더욱 격정적인 감정에 빠져 키스를 나누는 공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낯선 남자가 등장해 심리적인 위협을 느끼게 할 뿐이어서 그녀는 서둘러 숙소로 발길을 돌린다. 그렇게 불안한 와중에 안느는 해양구조대원 유준상을 발견하고(에피소드2에서 안느가 유준상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그의 뒤에 바짝 붙어 걷는다. 이 장면은 왜 중요한가.
안느는 자신의 공상이 깨지면서 그 공상을 충족시켜주지 않은 문성근에게 더 가중된 불만을 느꼈고, 낯선 남자로 인해 불안을 느끼게 되었을 때 잠시나마 유준상에게 의지했다. 이를 통해 안느의 욕망의 구조에는 미세한 균열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변동의 내용은 숙소로 돌아와 안느가 꾸는 꿈에서 드러난다. 꿈의 내용은 이렇다. 안느는 휴대폰을 잃어버렸고, 그 휴대폰은 하필 유준상이 보관하고 있으며, 마침 도착한 문성근과 함께 휴대폰을 찾으러 나가게 되고, 그 덕분에 안느는 바다에서 건강한 육체를 드러내고 수영을 하는 유준상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문성근이 이 대화에 질투를 느끼면서 안느에게 젊은 육체를 탐한다고 비난하자 안느는, 왜 그러면 안되느냐고, 사실을 말하자면 그와 섹스를 하고 싶을 정도라고 말해 문성근을 자극한다. 물론 이 싸움은 화해로 귀결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안느가 이런 꿈을 꾸어야 했는가를 묻는 일이다. 이 꿈에서 안느는 유준상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이를 문성근이 통제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꿈은 절충적이다. 그러나 이 꿈의 진실은 문성근이 아니라 유준상쪽에 있으며 안느의 무의식은 다만 그 진실을 억압하기 위해 문성근을 꿈에 등장시켰을 것이다.
꿈에서 깬 안느는 두 번째 외출을 시도한다. 마침 유준상이 그녀 앞에 있다. 안느는 이 장면에서 미묘한 미소를 띠며 유준상을 뒤따른다. 방금 자신이 꾼 꿈에서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심지어 그와의 섹스까지 화제에 올린 참이니 그럴 만한 것이다. 그녀는 유준상을 그의 텐트가 있는 곳까지 따라가서 등대가 어디 있는지를 묻는다. 물론 이 질문은 핑계일 뿐인데, 안느는 이미 등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느의 욕망의 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다. 이 점을 놓치면 마침내 문성근이 나타나 그녀에게 키스를 할 때 안느가 왜 과장된 톤으로 사랑을 속삭이는지, 그리고 그녀가 왜 뜬금없이 그의 뺨을 때리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그 뺨 때리기의 메시지는 이렇다. ‘당신은 왜 늦게 와서 내가 잠시나마 흔들리도록 내버려두었나요.’ 그러므로 표면적인 인상과 달리 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역시 핵심적인 욕망의 선은 (안느와 문성근 사이가 아니라) 안느와 유준상 사이에서, 꿈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어져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앞에서 이 욕망의 선이 ‘상상적으로’ 가닿는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에피소드3―가보지 않은 길
세 번째 에피소드는 앞의 두편과 비교할 때 가장 투명하게 읽힌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안느가 평소 알고 지내던 한국인 교수 ‘박’(윤여정)과 모항에 온다. 젊은 한국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자신을 버린 남편을 잊고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서다. 옆방에 투숙해 있는 ‘종’(권해효)과 인사를 나누고 저녁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뒤 안느와 윤여정은 절(아마도 ‘내소사’쯤 될 것이다)에 들른다. 비유적으로나마 ‘번뇌’라는 말의 의미를 배워 자신의 상태를 성찰하게 되었고,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안느는 지금 약해져 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감독 ‘종’ 내외와 식사를 하고 난 뒤 새벽녘에 그의 유혹에, 비록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쉽게 투항해버린다. 안느에게는 “당신이라는 존재, 한순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거짓투성이… 당신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고, 잠시 약해졌을 뿐”(황병승의 시 <곰뱀매거진 18호> 중에서)이라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차례로 스님(김용옥)과 라이프가드(유준상)가 등장할 것이다.
스님과 안느의 대화장면은 <옥희의 영화>에서 이선균과 정유미가 교수 문성근에게 쉴새없이 질문을 던지는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에 대해 말하길 주저하는 안느에게 스님이 ‘진짜 질문’(real question)을 해보라고 말하자 안느는 자신이 왜 거짓말을 하고 왜 힘이 들며 왜 무서운지 등을 묻는다. 스님은 지혜롭게도 질문을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답한다. 요약하면 그것은 ‘당신은 이미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는 것, 다만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 정도가 될 것이다. 도움이 안된다며 안느가 불평을 늘어놓자 스님은 최종적으로 반문한다. “당신은 어렸을 때의 당신으로부터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것은 선가(禪家)의 오래된 화두 중 하나인 ‘부모가 태어나기 전 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하는 물음이다. 자아에 대해 집착하는 이에게 당신에게는 애초 집착할 자아라는 게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논법인 셈이다. 스님이 안느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당신 자신을 똑바로 보라는 것,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것. 안느는 분명히 무언가를 깨달았을 것이고 마침내 외출을 감행한다. “나는 내가 가보지 않은 길로 가보려고 합니다.”
안느가 소주병을 챙겨 외출을 할 때, 전날 저녁 식사 중에 잠깐 본 적이 있는 유준상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는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녀가, 그 대상이 누구건, 상징적인 자기 방기의 행위(이를테면 섹스)를 계획하고 외출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소주가 필요했을 것이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모두 등장하는 그 갈림길에서 안느는 등대가 있는 왼쪽이 아니라 해변과 텐트가 있는 오른쪽을 택한다. 유준상을 만났을 때 그녀는 예의 그 질문(“등대는 어디 있나요?”)을 던지지만 앞의 두 에피소드에서와 달리 이내 “됐어요!”(nevermind)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이미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는 예정된 결론을 향해 간다. 그녀는 유준상과 의례(ritual)적인 성격을 갖는 섹스를 했으니 이제는 남편이 남긴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으리라. 비도 오지 않는 거리를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안느의 뒷모습은 그녀가 앞으로 자신의 삶에 내리는 비에 어떻게든 대처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게 한다. 안느에서 출발해 유준상에게 이르는 욕망의 선, 에피소드1과 2에서는 완전하게 이어지지 못했던 그 선은, 여기에서는 ‘실제적으로’ 이어진다.
라이트하우스 & 라이프가드
최근 홍상수 영화에서 중요한 테마가 ‘차이와 반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굳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거치지 않더라도 이 테마는 흥미롭다. 반복이라는 말 자체가 동일한 것의 되풀이를 뜻하는 것인데도 실제로 완전히 똑같은 것의 반복은 우리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어떤 것이 반복되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이것이 이전의 것과 어떻게 다르면서 또 같은지를 반사적으로 따진다. 다름 때문에 같음이 흥미로워진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숙명 위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완전히 동일한 것의 반복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다. 내가 정확히 동일한 고백을 동일한 사람에게 했다고 해도 나는 더이상 스무살 청춘이 아니고 이 카페는 예전과는 그 분위기가 달라져 있다. 그래서 ‘모든 반복은 차이의 반복’이다.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좌표 위에 ‘차이와 반복’을 설계하는 홍상수의 솜씨는 (이미 전문가들의 훌륭한 분석이 나와 있거니와) 거의 마술적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독법을 유도하는 장치들은 일일이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특히 ‘소주병’과 ‘우산’과 ‘만년필’ 등이 세명의 안느를 가로질러 등장하는 방식은 각 에피소드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아버린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 나는 홍상수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보다는 그 이야기의 ‘내용’ 자체에 충분히 매혹됐다. 이 세개의 서사는 내가 ‘여행 서사’라고 부르는 이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어떤 원형적 보편성을 생각하게 한다. 치명적인 매력을 내뿜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도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오디세이>), 일본의 게이샤에게 욕망을 느끼지만 이내 그녀를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가버리는 어느 서양 군인의 이야기(<나비부인>) 등은 그 여행 서사의 불길한 원형들이다. 남성-주체들은 ‘다른 나라에서’ 여성-대상을 만나 스스로 사랑이라 믿는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그 욕망의 대상인 타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올 때, 미련없이 ‘자기의 나라로’ 되돌아간다. 이를 각각 ‘세이렌 콤플렉스’와 ‘나비부인 판타지’라고 부르면 어떨까.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은 이 둘을 충실히 결합한 사례이고, 카프카의 <세이렌의 침묵>은 ‘세이렌 콤플렉스’에 대한 여성주의적 반격이며, 데이비드 헨리 황의 희곡 <M. 버터플라이>는 ‘나비부인 판타지’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반격이다.
이런 계보에서 보자면 홍상수의 이번 영화는 여자가 다른 나라에서 남자를 만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여행 서사의 일종처럼 보인다. 세 에피소드 모두에서 안느는 갈림길에 선다. 왼쪽에는 ‘라이트하우스’가 있고 오른쪽에는 ‘라이프가드’가 있다. 그녀는 등대를 찾을 수 있을까, 혹은 구조대원을 통해 그녀는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세 에피소드 전체를 관통하고 있어서 영화는 보기보다 더 무겁고 진지하다. 이미 열 몇편의 영화를 봐오면서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이번에 확연히 알게 된 것은 모럴리스트로서의 홍상수의 면모다. ‘도덕 이야기’와 ‘희극과 교훈’이라는 연작을 만든 에릭 로메르가 ‘도덕’과 ‘교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는 홍상수의 영화에도 좋은 의미의 ‘도덕적 교훈’이 담겨 있다고 느낀다. 그런 맥락에서 홍상수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유형을 우화(寓話)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가 직접적으로 도덕적 교훈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는 ‘라이트하우스’가 없는 삶을 지혜롭게 조감하는 시선이 있고 ‘라이프가드’를 찾아 헤매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다. 이 지혜와 연민이 그의 영화를 우화적인 것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이를테면 첫 번째 에피소드의 도입부, 그러니까 영화 전체의 도입부이자 예고편으로도 사용된 그 장면에서 유준상이 안느에게 불러주는 그 노래를 들어보라. “안느, 이것은 당신을 위한 노래입니다. 안느, 당신은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군요. 비가 오네요. 그러나 비가 오네요. 안느는 등대에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안느는 춥습니다. 당신은 등대에 가기를 원하나요? 그러나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몰라요. 안느, 안느, 안느.” 이것은 홍상수가 이자벨 위페르에게 들려주는 노래이면서 이 영화가 안느에 대한 영화임을 분명히 밝히는 선언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영화의 우화적 정황을 압축해 보여주는 후렴구이기도 할 것이다. ‘비가 오고 우리는 춥다, 생의 등대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노래의 끝에서 홍상수는 유준상의 입을 빌려 안느의 이름을 세번 부른다. 아니, 세 안느의 이름을 한번씩 부른다. 라이트하우스가 없는 세계에서 각자가 자신의 라이프가드가 되어야만 하는 우리 모두의 이름은 이 세 안느의 이름 중 하나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