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 뺑소니, 재난. 극한 상황이 닥치면 요즘엔 아빠가 전문가다. 할리우드영화(<테이큰>), TV드라마(<추적자>) 모두 아빠가 해결한다. 기생충 연가시의 재난에 대처하는 것도 바로 아빠다. 거대 기생충 ‘연가시’가 사람 몸에 기생한다는 가정하에서 출발한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다툼과 속물근성, 정부의 안일한 대책에 평범한 가장을 대치시킴으로써 대한민국의 모순과 치부를 드러낸다. <바람의 전설> <쏜다>로 세 번째 연출에 도전한 박정우 감독의 신작이다. 접근방식과 장르 모두 의외지만 주제의식은 그대로다
-기대작으로 인터뷰한 게 벌써 1년 전이다. 드디어 <연가시> 모습이 공개됐다. (힌트를 주자면) 영화 보고 우동은 못 먹겠더라. 비주얼적 충격효과가 확실히 컸다.
=질감, 크기, 움직임 모두 고민이었다. 질감 표현이 어렵더라. 실제는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면 모자이크 무늬인데 그걸 사람 몸에 기생하는 걸로 크게 하고 보니 구리선 같더라. 그래서 실제 비주얼을 무시하고 임의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디자인했다. 길이는 소장이 꽉 찰 정도로 4~5m 넘게, 움직임은 몸속에 있을 때와 몸 밖에 있을 때를 다르게 만들었다. CG팀이 엄청 고생을 했다. 첫 시사하면서 걱정한 게, 내용 다 떠나서 영화 주인공인 연가시의 CG였다. ‘이게 뭐야!’ 할까봐 엄청 조마조마하더라.
-연가시는 원래 동물에게만 기생하는 생명체다. 사람에게 어떻게 적용했나.
=속성은 똑같다. 엄밀히 말하면 수술로 제거되는데, 그러면 영화가 안된다. 그래서 내장에 단단히 흡착해서 빼내려고 하면 과다출혈로 죽는 걸로 설정했다. 거기까지다. 더 들어가면 연가시 생태보고서가 되겠더라.
-소재는 3년 전 KBS 아마추어 시나리오작가 작품 심사 때 보고 가져왔다고 했다. 그 뒤로 얼마나 발전된 건가.
=연가시에 감염된 가족이 욕조에 빠져죽는다는 단편이었다. 왜 감염됐는지, 어떤 증세인지, 변종은 왜 생겼는지, 특효약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런 내용들은 모두 새롭게 발전시킨 부분이다.
-감염자가 창궐하는 도시의 스펙터클을 재현해야 했다. 예산 운용 면에서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우리 영화가 100억원짜리 블록버스터라는 소문이 돌았다. 순제작비 40억원이 적지 않은 돈이지만 원하는 것을 다 표현하기엔 힘든 규모였다. 그런 한계가 있으니 애초 무책임하게 벌이지 말자 했다. 디테일한 걸 보여주지 못하는 대신 속도감을 강조했다. 처음부터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달리다 끝나면 한숨 내려놓는 거다. 논리적으로 설득이 안되는 부분을 무마하기 위해 뒤돌아보지 못하게 빨리빨리 가야 하는 현실적 판단도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아쉬움도 있겠다.
=내가 부지런을 떨면 더 나아질 수도 있었겠지만 현장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추운 겨울에 단역, 보조출연자들을 설득해서 떼로 물에 빠지게 해야 했다. 아역섭외는 특히 더 힘들었다. 연기경험이 없는 9살짜리 아들을 설득했다. 좋아하는 라면을 실컷 먹게 해주겠다는 말에 뭣도 모르고 하겠다고 하는데. 얼마나 추웠던지 물에 얼굴을 넣자마자 ‘아이 XX’ 하고 대뜸 욕을 했다. 촬영이 매일 그랬다. 배우들한테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감독이니 못된 놈인 척하기도 하고. 달래가면서 찍어야 했다.
-재난영화면 으레 희생자의 이미지로 시작하게 마련인데, 구성이 좀 달랐다. 주식투자로 재산을 날린 가장 재혁(김명민)의 고단한 일상이 전반부에 배치된다.
=희생자 부분도 찍어두긴 했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감염자들이 물에 빠지는 재난사태의 층이 꽤 두껍다. 그게 승부처인데, 초반부터 요약본으로 하는 건 아니다 싶었다. 처음엔 좀 참자 했다.
-재혁의 고군분투는 평생 바르게만 살다가 일탈을 하게 된 전작 <쏜다>의 박만수(감우성)가 겪는 중년 가장의 위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바람의 전설>의 박풍식(이성재)이나 <쏜다>의 박만수나 이 영화의 재혁이나 다 비슷하다. 처음 재난을 설정하고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제약회사의 음모를 밝히는 액션물로 갈 것이냐, 지금처럼 가족애를 강조할 것이냐. 내 입장에선 가장의 이야기가 공감도 되고 관심이 가더라. 근데 앞의 두 작품 속 가장과는 좀 다르다. <바람의 전설>은 가족을 두고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거고, <쏜다>는 가족이 있는데도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가족 입장에선 무책임한 가장이다. 그것에 대한 반성이랄까, 끝까지 가족을 살리자라는 목표가 있었다.
-그사이 40대 가장으로서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가.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나다. 너희를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는 걸 기대하지 마라”라고 했었다. 나이를 먹다보니 그게 아니더라. 재혁이 전 인류를 구하겠다고 뛰어다닌 게 아니다. 자기 가족 한번 살려보겠다고 뛰어들었는데 결국 그 일이 커진 거다. 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다보면 그게 더 큰 의미로 돌아올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재난의 근원은 결국 주가를 올리기 위한 제약회사의 이권으로 귀결된다. <쏜다>가 386세대의 변질을 질타했다면 이번엔 자본주의에 대한 정면 공격을 목표로 삼은 것 같다. 거슬러 올라가면 <주유소 습격사건>의 문제의식까지 연결된다. 박정우 작품의 표식이다.
=그게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는 이유다. 작품을 하는 이 순간의 사회가 반영되고, 그걸 관객도 똑같이 느낄 거라는 공감대 형성을 목표로 작업을 한다. <쏜다> 때는 그게 너무 노골적이어서 문제였지만.
-그게 <쏜다>의 흥행 실패의 이유라고 판단하나.
=가벼운 해프닝으로 하고 풍자식으로 갔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은 있다. 주인공을 극한으로 몰아가고 죽이니 관객의 거부감이 크더라. 굳이 현실을 극장에까지 와서 확인할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 같다. 지적할 건 하되 대안을 제시하고 통쾌함을 줘야 했다. 상업영화로 보자면 접근법이 틀린 거다. 극장문을 나설 때 어떤 마음을 들게 할지에 대해 그동안 고민이 많았다.
-이번엔 그래서인지 희망적이다. 재혁의 재정적 난관을 보면 요즘 같아선 사회면에 자살기사가 나도 무리가 없는 경우다. <쏜다>의 박만수보다 훨씬 삶에 찌들어 있는데도 재혁에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에너지가 있다.
=내가 좀 삐딱하게 사회를 보나 싶었다. 난 평범한 선에서 사고하는 사람인데 <쏜다>가 너무 황당무계하고 비약적이라고 하니 그런 의심이 들더라. <쏜다> 끝나고 그래서 좀 복잡했다. <연가시>는 어떤 영화를 만들겠다보다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자 했다.
-가족애가 앞서다보니 신파로 흐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부분은 한국 블록버스터의 성공요인이기도 하지만 도식화되는 측면도 분명 있다. 적정 지점을 찾아야 했을 텐데.
=신파에 대한 지적이 많은데 가족들 위해 고군분투하는 게 왜 감정의 과잉이라는지 이해가 안 간다. 장르적으로 이게 더 효과적이겠다는 계산은 안 했다. 그런데 재혁이 창고에서 마지막으로 가족의 전화를 받고 오열하는 건 이 영화의 절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구하지 못할 경우 절망의 극대치로 가야 했다. 울려줘야 한다는 강박이 아니라 그래야 그가 약을 구하려는 게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코믹함은 전면 차단했다. <바람의 전설>과 <쏜다>의 김수로가 캐릭터상으로 코믹함을 표했다면, 이번엔 그런 역할도 아예 배제하고 간다.
=처음부터 코미디는 절대 없다라는 원칙이었다. 초고는 지금보다 더 뾰족뾰족하고 셌다. 시나리오를 보고 다들 중간중간 윤활유 역할을 넣어주는 게 좋겠다더라. <괴물> <해운대> 등 성공한 재난영화에는 다 코믹한 설정들이 있다. 그 부분을 내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근데 막상 해보니 틈이 없더라. 영화적으로는 더 흥미로울 수 있지만 사람들 죽여가면서 그렇게 쿨해질 수가 없더라.
-시나리오 완성 전엔 구제역 문제를 다루고 싶다는 언급도 했었다. 지금은 감염자들이 물을 찾게 되고, 수질오염에 대한 의심을 한껏 드러낸다. 노골적인 상징이다.
=사실 더 직접적으로 가자면 구제역을 건드려야 했다. 근데 그렇게까지 현실에 다가가는 건 좀 겁이 나더라. (웃음) 연가시가 애초 당긴 이유가 기생충이라서였다. 연가시에 감염되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고통을 겪다 그냥 죽는 게 아니라 마지막 액션을 취하고 죽는다. 숙주는 어느 순간 이성을 잃고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고 물에 뛰어들어 최후를 맞는다. 이 액션에 혹했다. 지금 살고 있는 사회에 대입하자면 우리도 뭔가에 감염돼 그게 맞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계속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영화 속 감염자들은 죽는 줄도 모르고 가지만 영화를 본 우리는 나락에 떨어지기 전에 한번 더 점검해보자, 연말에 있을 이런 거에도 대비를 하자. (웃음) 재필이 “세상에 변종들 참 많아”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럴 법한 사람이 좀 떠오르지 않나.
-북한 소행설을 설파하는 동료 형사의 말에 “만만하면 북한이냐!”라고 반박하는 재필(김동완)의 대사는 정부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다. 할 말은 다 했다.
=그런 면에서 지적을 많이 받는데 다 인정한다. 하려는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하는 조바심에 그걸 직접적인 대사로 넣는다. 그 부분에 대한 반대가 있었고, 이번에도 그래서 잘린 부분이 좀 있다.
-제작 보고회 때 속편은 없다고 단언했는데 흥행하면 달라지는 건가.
=회사에서 욕먹었다. 네가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왜 그렇게 말하냐고 하더라. (웃음) 영화의 엔딩이 속편을 암시하긴 하지만, 맹세코 내 의도는 그건 아니었다. 이번 사안이 한국을 넘어 미국이라는 더 거대한 장벽에서 비롯됐다는 걸 암시하고 싶었다. 이 장면만큼은 더 직접적으로 하고 싶었는데 다들 비약이 심하다고 해서 일종의 타협안이 지금의 결론이다.
-이번 시도는 결국 여러 면에서 연출자로서 생존을 위한 일종의 타협이 전제된 건가.
=체질적으로 남이 내 영화를 말하는 게 불쾌했다. 영화 나오면 결과로 평가하자는 주의다. 그런데 그간 내 생각이 정답이 아니라는 게 (흥행 부진으로) 보여졌으니 사람들의 의견은 체크하자 싶었다. 이번엔 좀 받아들이자는 거였다. 처음 입봉할 때만 해도 사생결단으로 폼나게 하고 안되면 끝내버리자였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그 선택에 대해 지금의 생각은 어떤가.
=그간 오기도 있었고 아쉬움도 있었다. 말이 안되는 이야기도 아닌데 왜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귀담아들어주는 그 모습을 한번 보고 싶은 거다. 시사 끝나고 알았는데, 다들 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굉장히 낮더라. (웃음) 홧김에 <주유소 습격사건> 같은 걸 해버릴까 싶더라. (웃음) 근데 그건 아니다. 잘되면 다들 “거봐, 코믹을 하면 되는데 지금까지 왜 헛지랄했어”라고 할 거고, 안되면 “코믹을 해도 안되네. 이제 끝이네” 할 거다. 입봉 때부터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어도 끝까지 한번 맞춰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