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사내가 있다. 장기밀매꾼 생활을 청산하고 ‘따이공’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사랑하는 여자도 있다. 하지만 일이 꼬인다. 착한 그녀가 무슨 사연인지 사채에 손을 댔다는 말도 들려온다. 그는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브로커의 제안을 수락한다. 누군가의 심장을 도려내어 배달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게 그는 생애 마지막 ‘작업’을 위해 다시 중국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공모자들>의 영규, 그는 악인이다. 아니다. “그는 인간이다.” 배우 임창정은 그렇게 말했다. 악인열전이라면 이미 나홍진의 <추격자>와 <황해>,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가 있었다. 그러니 잔인함에 방점을 찍기보다 절대적으로 이야기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란 어쩌다 그런 일을 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다. “그들이 유년 시절부터 그렇게 살았더라면 감옥에 가든 누구 손에 죽든 이미 사달이 났겠지. 보편적 정서를 가지고 살다가 어느 지점에서 톱니바퀴가 어긋나면서 눌러놨던 것이 폭발해 문제를 일으킨 거다. 영규는 한 인간이 악을 행하게 되는 이유를 사회와 결부해서 볼 수 있게 해준다.” 악인과 보통 사람 사이를 오가는 영규와 그런 영규를 이해하려는 영화에 이끌려 그는 이 위험천만한 지하세계에 발을 디뎠다.
건네받은 보도자료 표지에도 음영이 짙게 드리운 영규의 얼굴이 박혀 있다. 아직 대중에게는 익숙지 않은 임창정이다. 하지만 속내로 따지면 영규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아주 이질적인 인물은 아니다. 라면가게를 지키려고 울면서 끝까지 버티던 못난 놈 환규(<비트>)부터 이제는 톱스타가 된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일편단심 범수(<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사랑은 장난이 아니라며 울먹이던 은식(<색즉시공>), 빚 독촉에 쫓기면서도 아내를 버리지 않던 창후(<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아무개 대학의 약체 야구부 직원으로 살아가던 소시민 호창(<스카우트>), 강력반 형사이자 신용불량자였던 극현(<불량남녀>)까지. 그가 공통적으로 그려왔던 대한민국 보통 이하 남자들의 애환과 순정이 영규에게도 있다.
다만 영규는 그들처럼 환하게 웃어 보이거나 재간을 피우지 않는다. 그는 시종일관 무표정하다. “카메라 앞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것이 임창정에게 영규가 기꺼운 변신이었던 이유다. “연기 생활 23년 만에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흥분되고 기분 좋은지 모른다.”
그렇다고 들뜬 기색은 아니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사력을 다해 매일을 살고 있을 따름이다. “가족이 있으니 악착같아지더라. 이번 영화가 내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자세가 달라진다.” 그러나 물론 아직 그의 마지막을 말하기는 이르다. 우선 내기를 걸어볼 만한 <창수>가 있다. <파이란>의 조감독이었던 이덕희 감독의 데뷔작에서 그는 서른이 넘도록 한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가 3일 동안 한집에서 지내게 된 여자와 사랑에 빠져 평생을 그녀에게 바치는 하류인생 창수를 연기한다. “따뜨읏하면서도 가슴이 저리잇해지는 남자 이야기다.” <공모자들>이 변신의 발구름판이 되어준 스릴러였다면, <창수>는 그의 그늘진 무표정에 깊이를 더해줄 누아르가 되지 않을까.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토록 다른 얼굴로 돌아온 그는 앞으로 또 어떤 얼굴을 더해갈지 궁금해진다.
<씨네21> SNS를 통해 받은 독자들의 질문
-롤모델로 삼은 인물이나 참고하신 영화가 있나?_20세기소년(미투데이)
=없다. 전혀.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웃음) 내 사심이 들어가는 걸 방지하고 감독님의 머릿속에 있는 그 역할을 하고 싶었다. 거기에 집중했다.
-지금까지 놓친 영화 중 가장 아깝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있다면?_이종수(페이스북)
=그런 것도 없다. (웃음) 나는 시켜주면 다 하는 스타일이다. 시간이나 여유만 있으면 다 한다. 안 한 게 있다면 시간이나 여유가 없어서 못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