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그/녀에 대하여
2012-08-30
글 : 김혜리
틸다 스윈튼이라는 ‘다른 나라’
<나니아 연대기>

주요 필모그래피

1986 <카라바지오>
1988 <대영제국의 몰락>
1989 <전쟁 레퀴엠>
1990 <정원>
1991 <에드워드 2세>
1992 <올란도>
1996 <여성의 도착(倒錯)>
1998 <러브 이즈 더 데블: 프랜시스 베이컨의 초상을 위한 스케치>
2000 <비치>
2001 <딥 엔드> <바닐라 스카이>
2002 <어댑테이션> <테크노러스트>
2003 <영 아담>
2005 <콘스탄틴> <브로큰 플라워>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2006 <스테파니 댈레이>
2007 <마이클 클레이튼>
2008 <줄리아>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 <번 애프터 리딩>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009 <아이 엠 러브> <리미츠 오브 컨트롤>
2010 <나니아 연대기: 새벽출정호의 항해>
2011 <케빈에 대하여>
2012 <문라이즈 킹덤>

“틸다 스윈튼이 우주의 여왕이라던데, 사실인가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남배우!” “이 사람 외계인 연기한 적 없나?”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IMDb) 틸다 스윈튼 항목의 토론 게시판에 올라온 글 제목 몇개다. 작정한 농담이긴 해도 이 웅성거림 안에는 틸다 스윈튼이라는 배우의 결정적 실루엣이 포함돼 있다. 180cm에 육박하는 신장에 흐르는 이 세상 존재가 아닌 듯한 영묘한 아우라, 그리고 성별의 모호성(androgyny). 이 두 가지는 동시대 영미권 여배우 가운데 그녀와 아울러 프리미어 리그로 꼽히는 메릴 스트립, 케이트 블란쳇, 줄리언 무어 등에게는 없는 틸다 스윈튼의 독보적인 속성이다. 글을 쓸까 연기를 할까 망설이던 20대의 틸다 스윈튼을 영화로 잡아끈 전위적 퀴어 감독 데릭 저먼의 <대영제국의 몰락>(The Last of England)(1988)에서 그녀를 처음 본 이래, 나는 스크린에서 하얀 첨탑이나 북극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빛나는 이 기괴하게 아름다운 배우의 행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원래 첨탑이나 북극성은 고개를 들어 앙망하라고 있는 거다.) 대개 배우의 얼굴은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고난 자연스러운 표정을 잃고 ‘연기’를 하는 우리가 극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배우의 퍼포먼스를 보는 동안만큼은 어둠 속에서 비로소 연기를 멈추고 휴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한데 틸다 스윈튼은 이례적인 경우다. 그녀는 영화가 신화의 지위를 포기한 이후, 현대영화에서 사라지다시피한 피안(彼岸)을 상징하는 얼굴, 말하자면 우리가 소유한 적도 없는 얼굴을 갖고 있다. 오래 전 그레타 가르보와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점했던 자리에 ‘시대착오적으로’서 있다고 해도 좋다. 그녀를 묘사함으로써 나는 이 환영(幻影) 같은 배우의 소매 끝을 잡아보려 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와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 같은 환각은 기묘하게 닮아 있는데, 이는 많은 글쟁이들이 걸려드는 끈끈이주걱이다.

<줄리아>

깃발 같은 피사체

틸다 스윈튼을 내가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찢어발기는 중이었다. 그녀는 데릭 저먼의 <대영제국의 몰락> 속에서, 탐스러운 붉은 머리채를 사나운 바람에 흩날리며 정원용 가위로 드레스를 자르고 이로 옷자락의 장미를 뜯어내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자연과 도시, 포클랜드전쟁의 파편화된 이미지로 이루어진 <대영제국의 몰락>은 시간이 흐르면 배우의 이름이 아니라 오직 감독의 도전적 미학만 기억되는 종류의 영화였지만, 프레임을 스쳐간 무수한 얼굴 가운데 틸다 스윈튼만은 단독자로 관객의 뇌리에 남는다. 서사가 부재하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개인이라기보다, 산업화 이전 시대의 가치를 그리워한 데릭 저먼이 동경한 르네상스적 아름다움을 의인화한 피사체이며, 움직이는 조상(彫像)에 가깝다. 말하자면, 우리는 해질녘 폐허에서 여인의 형상을 하고 울부짖는 대영제국의 마지막 순수를 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저먼의 <전쟁 레퀴엠>(1989)은 스윈튼에게 대본없는 4분간의 클로즈업을 할애했다. 한 평론가는 이 장면을 두고 “틸다 스윈튼의 몸은 보이는 스크립트, 육신의 내러티브다”라고 표현하기도했다. 잉글랜드의 옛 이상은 사라진 꿈이 됐고, 급진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며 성적 소수자를 탄압한 1980년대 영국은 대처 정권이 지핀 악몽이라고 믿었던 데릭 저먼은, 산업화 이전 장인의 시대와 60, 70년대의 반문화를 그리워하며 섹슈얼리티 해방을 옹호하는 영화를 동지들과 만들었다. 그리고 틸다 스윈튼의 육체는 그 공동체의 깃발이었다. 저먼은 “내가 함께 작업한 모든 사람 중에 틸다만이 스크린을 변모시켰다. 남자는 그런 경우가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장 전투적인 게이 예술가의 깃발이 여성이었다니 역설적이지만, 저먼이 죽은 뒤 평자들은 어쩌면 틸다 스윈튼이야말로 저먼이 품었던 이상적인 남성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흥미로운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관습적 의미의 직업배우로서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직 데릭 저먼과 뜻이 통해 8편의 영화를 만들었던 틸다 스윈튼은 1994년 저먼이 타계하자, 한동안 병을 앓았고 계속 배우로 살 것인가 숙고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데릭 저먼의 죽음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념을 배우의 육체를 통해 표현하는 부류의 영화는 사라져가고 있었다. 배우로서 틸다 스윈튼의 1기는 그렇게 접혔다.

병들지도 늙지도 않는 존재처럼

에일리언, 신, 신상(神像). 틸다 스윈튼에 관한 저널의 묘사에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다. 통상 여배우를 ‘여신’이라고 칭할 때는 대단한 미인이라는 의미로 ‘여’(女)에 방점이 찍히지만, 틸다 스윈튼의 경우는 ‘신’(神)에 악센트가 있다. 물론 우리는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므로 이 말은 엄밀히 따지면 스윈튼이 서양과 동양의 미술사가 남긴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는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 파르미지아니노와 폰토르모가 그린 과장된 신체비율의 성모마리아부터 떠오른다. 즉각적으로 대리석상을 연상시키는 큰 키와 석고같은 이마, 강건하고 긴 목, 유니콘의 뿔처럼 오연한 코, 모든 것을 굽어보는 듯한 눈과 대비되는- 아주 드물게 열릴 것 같은- 얇고 다부진 입술, 그리고 자주 빛깔이 바뀌는 머리카락. 분장 전 평소 틸다 스윈튼의 모습은, 후천적이고 세속적인 요소들이 더해지기 이전의, 기독교식으로 비유하자면 신이 자신의 이미지를 본떠 갓 만들어낸 인간의 원형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틸다 스윈튼은 압도적으로 하얗다. 설원 같은 피부는 큰 키와 어우러져 그녀를 화면 속 모뉴먼트처럼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녀는 프레임 중앙이 더없이 어울리며, 가까이서 촬영하지 않아도 관객의 시선을 끌어당겨 클로즈업 효과를 내는 배우다. 또한 어떤 남자배우와 커플을 이루어도 상대의 존재감을 희박하게 덮어버린다. 이 모든 사항은 틸다 스윈튼에게 배우로서 특권인 동시에 핸디캡이다. 월광처럼 조요한 흰빛을 발하는 이 배우에게는 다이아몬드보다 진주 장신구가 어울린다. 백인 중의 백인이라 할 만한 스윈튼의 아름다움은, 2010년 이 배우를 인터뷰한 저널리스트 에이미 라로카의 표현대로 ‘정치적으로 너무나 불공정해서’ 감탄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백인 관객도 그녀를 이족(異族)처럼 느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게다가 스윈튼은 평소 거의 화장을 하지 않는다. <마이클 클레이튼>의 변호사 연기로 조연상을 탄 2008년 오스카 시상식에 그녀는 검은 튜닉에 색조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타나 작은 소요를 일으켰다. 오스카 레드카펫 기준으로는 누드나 진배없다는 평을 받은 이날의 스타일은 주변의 여배우들을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보이도록 만들어버렸고 TV 화면으로 그녀를 본 전세계 시청자의 눈에 스윈튼은 창백한 외계인처럼 비쳤다. “화장은 일종의 갑옷일 수 있는데 나는 화장으로 강해진다는 느낌이 없어서 필요를 모르는 케이스다.” 메이크업에 대한 스윈튼의 입장이다. 하얀 배우. 하나의 색상과 이처럼 밀접하게 연관되는 스타의 예는 드물 것이다. 아니, 틸다 스윈튼이라는 배우를 휘감은 백색은 많은 색채 중 하나라기보다 채색되지 않은 여백의 그것이며, 칸딘스키의 표현대로 “모든 색의 부재인 동시에 모든 색의 종합”으로서의 초월하고 포용하는 흰색이다. (마가레테 브룬스 저 <색의 수수께끼>에서 재인용) 데릭 저먼 이후 영화감독들은 틸다 스윈튼이 가진 순백의 초월적 이미지를 보다 직설적인 방식으로 활용했다. 위악없이 잔혹한 아름다움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의 하얀 마녀 역과 <콘스탄틴>(2005)에서 세계를 멸망으로 몰고 가려는 천사장 가브리엘 역이 전형적 사례다. 서른살에 이르러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신하는 <올란도>(1992)의 영국 귀족 올란도는 “병들지도 늙지도 말라!”는 엘리자베스 1세의 명을 받고 스르륵 영생의 존재가 됐고 1996년작 <여성의 도착(倒錯)>(Female Perversion)은 밧줄에 묶인 여신상처럼 보이는 스윈튼의 나신 숏으로 영화를 열었다. 스윈튼의 첫 메이저 할리우드영화인 <비치>(2000)에서 타이의 외딴섬에 코뮌을 건설하고 지배하는 족장 틸다 스윈튼이 나른하게 가로누워 있는 숏은, 영화 도입부에서 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보는 거대 와불(臥佛)의 이미지와 신통하게 공명한다. 그런가 하면 짐 자무시 감독은 <리미츠 오브 컨트롤>에서 틸다 스윈튼에게 실버 블론드 가발을 씌우고 하얀 중산모와 장갑, 흰테 선글라스와 투명한 우산으로 그녀의 몸을 꽁꽁 감싸서 주인공 킬러에게 메신저로 파견했다. 상류층 부인이 관능과 열정에 눈을 떠 ‘인형의 집’을 뛰쳐나간다는, 간추리면 극히 전형적인 스토리의 <아이 엠 러브>(2009)가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는 동시에 파괴한다”는 깊숙한 암시까지 영화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저력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안주인이면서도 가족 가운데 이질적 존재로 불가피하게 두드러지는 틸다 스윈튼의 외모와 품위에 크게 빚지고 있다.

<콘스탄틴>

남성과 여성을 모두 품은 완전체로서의 매혹

빈 도화지 같은 틸다 스윈튼의 얼굴과 몸은 작은 변수만 움직여도 변화의 진폭이 크다. 립스틱을 바르느냐 바르지 않느냐, 속눈썹과 머리칼을 어떻게 만지느냐에 따라 팜므파탈에서 남자로 건너뛰고, 천사와 마녀, 인간과 오브제의 영역을 횡단한다. 서사영화에서 그녀가 가장 빈번히 뛰어넘는 경계는 물론 성별이다. “데이비드 보위 전기영화가 제작된다면, 단연 틸다 스윈튼이 적격이다”라는 여론이 대변하듯 스크린 위의 틸다 스윈튼이 은연중에 환기시키는 화두는 성(gender)의 정체란 무엇이냐는 회의다. 실생활에서 틸다 스윈튼은 “선생”(sir)이라고 잘못 불리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본인은 립스틱을 안 발라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약간의 일화도 있다. 영국군 소장이었던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자란 스윈튼에게는 어머니의 드레스보다 아버지의 제복과 구두, 훈장이 더 인상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으며, 일주일 동안 예뻐지는 것과 한 시간 동안 아버지만큼 잘생겨지는 마법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후자를 골랐을 거라고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안드로지니의 아이콘인 그녀는 공교롭게도 이란성 남녀쌍둥이를 낳았다. 틸다 스윈튼은 연극 <맨 투 맨>에서 남편이 사망한 뒤 생계를 위해 남편으로 둔갑해 여생을 살아간 여인을 연기했고,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서는 역사상 가장 중성적인 천재인 모차르트로 분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그녀는 남자 연기에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심지어 여성 역할이 좀더 어렵다고 토로한다.

남성과 여성을 포괄하고 자유롭게 오가는 완전체를 뜻하는 안드로자인(androgyne)은, 생물학적으로 남녀의 생식기관을 한몸에 가진 사람을 일컫는 헤르마프로디테(hermaphrodite)와 달리 추상적 개념이다. 그러나 안드로지니가 영화에서 배우의 육체를 통해 제시되는 순간- 예컨대 우리가 여성임을 아는 배우가 극중에서 남성을 연기하고 화면에서 양성을 모두 매혹할 때- 그것은 더이상 투명한 관념일 수만은 없으며 특별한 에로티시즘마저 발산한다. 수전 손택이 썼듯이 “가장 정제된 형태의 성적인 매력, 그리고 가장 세련된 형태의 성적 쾌락은 자기 성에 역행하는 부분에서 나온다. 강한 남자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여성적인 면이고 여성스러운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남성적인 요소다.”(<캠프에 관하여> 중) 그렇다면 영화에서 안드로지니와 크로스드레싱(cross dressing 반대성의 옷을 입는 일)은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 영화의상과 정체성 관계를 연구한 스텔라 브루지에 따르면 남장여자, 여장남자를 모티브로 한 숱한 코미디와 드라마에서 인물의 ‘진짜 성’은 시종일관 고정돼 있으며 그것이 폭로되는 순간은 대단원의 이성애 커플링을 예비하는 위기로 기능한다. 반면 <모로코>에서 남장한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남녀 관객을 홀리는 장면이나 <여왕 크리스티나>의 그레타 가르보가 남자로서 행동하는 장면은- 시퀀스 단위에 한정된 것이라 해도- 코미디나 서스펜스와 무관하게 포괄적인 성(안드로지니)을 구현한다. 출세작 <올란도>에서 스스럼없이 두 성을 월경하고 <콘스탄틴>에서 남성복을 입은 천사로서 시종 중성성을 견지한 틸다 스윈튼은 이 계보를 잇고 확장한 배우다. 안드로지니가 영화에서 구현될 때 관객과 배우 사이에는 통상보다 복잡한 매혹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남자로 보이는 여성 인물에게 여성과 동일시하는 남성 관객이 끌릴 수도 있고 게이 남성과 동일시한 여성 관객이 끌릴 수도 있으며, 극중 안드로자인을 여성성 강한 남성 캐릭터로 수용할 경우 일련의 다른 방향 화살표들도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장하는 여배우

중성성 혹은 유동적 성을 체현하는 배우 틸다 스윈튼이 명백한 여성으로 분할 때 그녀의 연기는 어떤 특징을 드러내는가? 요컨대, 스윈튼의 여성 인물은 ‘연기된 여성’이다. 이 무슨 김새는 동어반복? 우선 데릭 저먼 감독의 극영화 <에드워드 2세>(1991)의 이사벨라 왕비를 보자. 고증을 무시하고 촬영된 이 사극에서, 이사벨라는 장면마다 패션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디자이너 드레스를 갈아입고 홀로 조명을 받으며, 충만하다 못해 체할 듯한 여성성(femininity)을 발산한다. 게이왕 에드워드 2세에게 사랑받지 못해 쿠데타를 사주하고 급기야 흡혈귀가 되는 악녀로 묘사된 이사벨라는, 당대에 게이 예술가의 텍스트가 보여주는 여성혐오적 캐릭터의 표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2003년 발표된 니알 리처드슨의 논문 ‘데릭 저먼의 <에드워드2세>에 나타난 틸다 스윈튼의 퀴어 퍼포먼스’는 이사벨라를, 게이 커뮤니티가 숭배하는 ‘디바’ 캐릭터로 재해석한다. 마돈나나 조앤 콜린스처럼 사회적 억압 때문에 게이 남성들이 공공연히 드러내지 못하는 여성적 측면을 대리해소해주는 과잉한 여성성의 아이콘이라는 뜻이다. 또, 리처드슨은 여성혐오가 투영된 악녀의 일반적 성향과 달리 히스테리컬하고 비이성적인 쪽은 오히려 에드워드 2세와 그의 애인이라는 점에도 주목한다. 허리와 가슴을 강조하는 이사벨라의 의상이 스윈튼의 중성적 체형과 이루는 대비는 모든 성(gender)은 인위적 구성물이라는 메시지를 송신하고 있다는 해석도 덧붙였다. <리미츠 오브 컨트롤>에서 스윈튼이 분한 정체모를 은발 여인 역시 여성복 카탈로그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차림을 하고 있는데 그 작위성이 가장(假裝)에 육박해서, 도리어 졸라 맨 바바리 안에서 남자의 몸이 드러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젼다. 그런가 하면 에릭 종카 감독이 연출한 <줄리아>의 불안정한 알코올 중독자 줄리아와 <마이클 클레이튼>의 카렌은 캐릭터의 성격 자체가 연기자다. 울긋불긋한 야한 입성으로 매일 아침 숙취에 신음하며 모르는 남자의 침대에서 깨어나는 줄리아는 섹시하고 센 여성이라는 셀프 이미지에 맞춰 끝없이 거짓말을 하고 속이 들여다보이는 ‘연기’를 한다. 한편 <마이클 클레이튼>의 출세지향적 변호사 카렌은 집에서, 화장실에서 사람들 앞에서 지을 표정과 말을 부단히 연습한다. 여성 캐릭터로서는 보기 드물게 흥건한 겨드랑이 땀을 닦는 장면으로 화제가 됐던 카렌은 슈퍼 우먼의 역을 철저히 연기하려는 목적에 삶을 헌납한 병적인 ‘배우’다.

예측하기 어려운 궤적을 그리는 틸다 스윈튼의 필모그래피에서 모성은 거의 유일하게 반복 등장하는 모티브다. 스윈튼이 연기하는 어머니 혹은 유사 어머니는 예외없이 모성에 대한 세속의 통념과 불화한다. <딥 엔드>(2001)는 게이 아들을 살인죄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누구의 도움도 없이 고군분투하는 전업주부가 협박범의 대리인과 이상한 유대감을 느끼는 드라마였다. 2006년작 <스테파니 댈레이>에서 신생아를 버린 10대 소녀를 인터뷰하며 모성에 내재된 공포를 직면하는 임신부로 분했던 스윈튼은, 2011년 <케빈에 대하여>를 통해 유사한 지점으로 회귀했다. 근작 <줄리아> <아이 엠 러브> <케빈에 대하여>는 스윈튼의 모성 3부작으로 묶이기도 한다. 줄리아는 돈 때문에 납치한 아이를 다시 납치당하면서 엄마의 정체성을 엉겁결에 뒤집어쓴다. <아이 엠 러브>의 엠마는 자녀들이 장성해 양육의 의무가 끝날 무렵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며 돌연 개인으로서 거울 앞에 앉는 어머니다. 충실한 내조자, 자애로운 엄마, 품위있는 안주인으로서 1그램의 과부족도 없는 엠마의 모습은 너무 완벽해 역시 위태로운 연극으로 보인다. 이 우아한 어머니가, 머리를 썩둑 자르고 선머슴 같은 트레이닝복을 입었을 때 비로소 여성으로 눈뜨는 연출은 다분히 틸다 스윈튼이라는 배우의 묘한 외모를 활용한 설정이다.

최근작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는, 모성애가 모든 여성에게 자연스럽게 내면화되는 감정이 아니라 일정 부분 사회적으로 구축된 규범이라는 점을 호소하고, 부모의 교육에 따라 자녀의 삶이 하나의 수제품처럼 빚어질 수 있다는 미신을 반박하는 캐릭터다. 에바는 엄마가 된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힘들다는 바로 그 이유로 임신에 도전하고 훌륭한 모성을 ‘연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임신부 역할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원작 속 에바의 독백은, 틸다 스윈튼의 연기가 여러 영화에서 드러낸 여성과 모성이라는 관념의 작위성을 묘사하는 듯하다. “난 진부한 광경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어, 내숭 떨기, 뒤로 미루기, 어리둥절하기, 괜히 퉁명스러운 척하기, 감정의 과잉표출. ‘아이, 자기야!’ 그 어느 것도 내겐 적절해 보이지 않더군.”

<케빈에 대하여>

액팅 < 퍼포먼스

앞서 검토한 대로, 틸다 스윈튼이라는 배우에게 있어서 궁극적 질문은 “어떻게 보이는가?”이다. 기존 인터뷰를 종합해보면 그녀는 연기(acting)보다 공연(performance)이라는 개념에 무게를 둔다. 이는 이른바 진정성 유무와는 무관한 연기에 대한 기술적 접근 방식의 문제이며 그녀의 대사 처리가 취약하다는 의미는 더욱 아니다. <아이 엠 러브>에서 러시아 출신 여성으로 분해 이탈리아어로 영화 대부분을 연기하면서도 스윈튼은 억양에 까다로운 유럽 평론가들로부터 트집을 잡히지 않았다. <줄리아>에서 스윈튼은 불안정하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줄리아로 분해 어떤 메소드 연기자보다 철저하게 영화 전체를 씹어 삼켰다가 토해내는 표현적 연기를 보여준다. <줄리아>는 말하자면, 사람이 엉망진창이 되는 모습 중에도 완벽한 엉망진창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려주는 영화다. <줄리아>는 따라서 틸다 스윈튼의 영화 가운데 가장 액팅에 가까운 연기가 담긴 작품이기도 하다. 배우 본인도 “내 안에는 줄리아가 없었고 줄리아 안에 약간의 틸다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과 여타 영화의 연기를 구별한 바 있다.

스윈튼은 “나는 배우라기엔 부족하다”며 “실은 배우(actress)는커녕 공연자(performer)가 된 것조차 실수다”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녀를 이해하고자 구분을 시도해보자면 액팅은 연극, 텔레비전, 영화에서 가상 인물의 성격을 형상화하는 예술이다. 관객이 있고 없고는 액팅의 성립에 결정적이지 않다. 반면 퍼포먼스는 어디까지나 노래, 연주, 몸짓을 포함해 언제나 관객을 상정하는 행위다. 스스로 ‘도제 시절’이라 부르는 데릭 저먼과의 실험적 작업이 남긴 흔적인지 틸다 스윈튼은 말보다 몸으로 표현하려는 성향이 강한 배우고 유성영화가 도래한 이후 영화는 나빠졌다는 고답적 취향의 소유자다. 그녀에게 최고의 칭찬은 본인의 연기를 버스터 키튼의 그것에 비교하는 평이다. 대다수 영국계 배우들이 그렇듯 스윈튼 역시 연기를 신비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제 인간이 아니라 인물의 메타포를 연기하는 거다”라고 선을 긋는가 하면, 눈물 연기는 극중 인물이 되어 우는 게 아니라 캐릭터를 위해 우는 거라 여긴다. 의미심장하게도 잡지 <모노.쿨투르>(MONO.KULTUR)와 인터뷰에서 스윈튼은 글을 쓸 때와 연기할 때 같은 근육을 쓴다고 표현했다. 반면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나 <마이클 클레이튼>처럼 정교한 각본의 부품이 되어 하는 연기와 <줄리아>나 <올란도>처럼 한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영화의 연기는 목수일과 배관일만큼 동떨어진 작업이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배우로 정의하는 데에는 인색한 반면, 마음에 드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감독과 손잡고 투자자를 몇년씩 설득하거나 지역 영화제를 기획하는 일은 명백히 자기의 업이라고 여기는 그녀의 태도까지 알고 나면 틸다 스윈튼이 머릿속에 그리는 업무 벤다이어그램은 일반적인 배우의 그것과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틸다 스윈튼은 배우를 감독의 모델로 취급하는(긍지 높은 배우들이 대부분 반발하는) 로베르 브레송의 연기론에 동조한다. 심지어 <당나귀 발타자르>의 당나귀가 이상적 연기의 모델이라고 공언할 지경이다. <모노.쿨투르>와의 같은 인터뷰에서 그녀는 브레송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를 스스로를 스크린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카메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적나라하게 “보여진다”는 퍼포먼스의 속성과, 연기하는 자신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는 영화연기의 특성 사이의 모순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데릭 저먼을 여읜 이듬해인 1995년 틸다 스윈튼은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The Maybe>라는 타이틀로 유리상자 안에 들어가 하루 8시간씩 잠을 자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 아이디어의 핵심은, 관객은 그녀를 원하는 거리와 각도에서 선택한 시간만큼 지켜볼 수 있는 반면(시집을 읽어준 관람객도 있었다), 응시의 대상이 된 공연자는 잠이 들어 공연 순간에는 응시를 의식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The Maybe>는 “연기하는 순간 관객이 부재하는 공연”인 영화 연기의 본질에 대한 그녀의 사색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처럼 틸다 스윈튼은 본인의 비범한 몸을, 남성과 여성, 게이와 스트레이트, 인간과 신성, 추상과 리얼리티 사이에서 관객이 주체적으로 교섭을 벌이는 장소로 제공하는 희한한 배우다. 평범한 화면 속에서도 연초점으로 촬영된 듯 미스터리를 안개처럼 두르고 있는 그녀의 ‘미친’ 존재감은 <케빈에 대하여>에서 케빈이 이혼을 논의하는 부모에게 던졌던 “내가 (이혼의) 맥락이잖아!(I'm the context!)”라는 한마디와 짓궂은 우연처럼 들어맞는다. 틸다 스윈튼, 그녀가 바로 컨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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