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화면에 세 버전의 이병헌이 공존한다. 광해를 연기하는 이병헌, 광해와 똑같이 닮은 천민 하선을 연기하는 이병헌, 그리고 광해 앞에 불려와 광해를 흉내내는 하선을 연기하는 이병헌이다. 하선은 광해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말투, 똑같은 제스처를 취한다. 그런 하선이 기특했는지 광해가 하선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자, 당신 눈앞에 보이는 건 매우 간단한 CG 조작이다. 분명 손쉬운 트릭인데 임팩트는 막강하다. 이병헌이 이병헌을 바라보고 자신이 연기한 이병헌을 다시 연기하는 순간은 1인2역을 기반으로 한 이 캐릭터의 핵이다. 17세기 왕의 밀실이란 가상의 공간, 최고로 장식화된 비현실적인 장소에서 이병헌은 근대 연기의 창시자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보고도 울고 갈 ‘아주 그럴 법한’ 연기를 이끌어낸다. 이병헌은 말한다. “그 장면은 촬영 초반에 찍은 장면이다. 그 말은 아주 부담 없는, 어렵지 않은 장면이란 뜻이다.” 이상은 <광해>에서 가장 난이도가 낮은 장면에 대한 풀이였다. 그러니 <광해>에서 볼 이병헌의 연기는, 그러니까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된다.
“내 속에 내가 굉장히 많은데, 지금까지 그걸 혼자만 알고 있었다. 난 알고 있으니 사람들도 당연히 알 거라는 착각이었다. 그러다 보니 실제 관객이 아는 배우 이병헌과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병헌은 어느새 딴사람이 되어 있더라. 배우가 자신의 모습을 너무 드러내 보이는 건 또 다른 연기이자 새롭게 변신하다보면 관객이 감정이입하고 쫓아오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걸 깨고 싶었다.” <광해>는 <지.아이.조2> 촬영 중 뉴올리언스에서 받은 세개의 대본 중 하나였다. 박찬욱, 김지운의 영화를 통해 흔히 보았던 기존의 어두운 이미지 연기가 둘, 나머지 하나가 코믹을 접목한 <광해>의 시나리오였다. <광해>는 일종의 이병헌 연기론의 환기가 될 선택이었다. 영화의 한축인 광해가<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난폭한 군주의 모습이자 배우 이병헌에게서 최근 흔히 보았던 연기라면, 하선은 이병헌과 대중의 간극을 좁혀줄 새로운 도전의 연기였다. 머리를 쿵 하고 박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태연자약하게 하는 것도, 방귀를 참다가 대차게 똥을 싸는 민망한 연기를 하는 것도 모두 하선을 연기하는 이병헌의 몫이다. 말하자면 적어도 우리가 아는 이병헌이라면 응당 하지 말았어야 할 수위의 코미디를 ‘굳이’ 그는 모두 아낌없이 보여준다.
영화를 찍는 4개월 동안 이병헌의 궤적은 포물선을 그리듯 변화했다. <지.아이.조2>를 위한 근육이 조금 느슨하게 해체됐고, 사극을 위한 말투가 입에 붙었다. 사극 연기를 하는 많은 배우들이 그렇듯 추운 계절에 홑겹 한복을 입는 물리적 고통을 체감했고, 간지러운 수염 분장의 고통을 참아야 했다. 이보다 더 까다로운 건 처음 의식이 없던 하선이 궁 생활을 하고 왕좌의 권위에 오르면서 점점 변해가고 깨우쳐가고 마침내 자신의 의지를 표하게 되기까지의 미묘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장소 때문에 대본과 촬영의 순서가 늘 엇갈렸고, 뒤죽박죽된 감정을 정리하고 수위를 맞춰나가는 정교하면서도 어려운 계산이 뒤따라야 했다. “그런데 막상 하다 보니 이 과정들이 참 재밌더라. 나중엔 쉬는 시간에 매니저랑 사극 말투를 흉내냈다. 푹 빠진 거다. 한동안은 내가 너무 막 나간 거 아닌가 싶어 모니터를 보면서 주저하고 걱정했던 것도, 석달 정도 촬영하고 나니 탄력을 받게 되더라. 내가 너무 놀았는지 추창민 감독이 되레 ‘조금만 눌러주세요’라고 주문을 할 정도였다. (웃음)”
사극의 품격, 코미디의 품격
사실 <광해>가 이병헌의 연기의 커다란 도약이나 전환점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연기 경력 20년, 무수한 그의 선택 중 대놓고 코믹한 하선의 연기는 이후로도 볼 수 없을 매우 이질적인 지점에 불과할 수도 있다. <광해>에서 이병헌이 평가되어야 할 지점은 그보다 그가 사극이라는 틀 안에 웃음과 눈물 코드를 접목한 가장 평이하고 대중적인 장르를 격을 떨어뜨리지 않고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칫 눈살을 찌푸릴 수 있는 상황에 대한 흔치 않은 고품격 해석이다. “터트림에도 수위가 있다. 아주 망가진 코미디, 소위 말하는 ‘나까 코미디’가 돼서도 안됐고, 너무 세련돼서 알아듣지 못해서도 안될 적정선을 찾아야 했다. 기존의 이미지를 훼손할 염려는 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그렇다고 내가 무너지진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내 개그 본능을 믿었다.” 전체 필모그래피를 통해 계산된 결과치라기보다 결국 이병헌 본인이 의도한 <광해>의 성취 지점은 조금 달라진다. “이병헌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다니, 그리고 심지어 이런 모습이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감정이입을 확실히 시켰다니에 대한 일정의 성과가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코믹만 하던 배우가 정극 연기를 할 때, ‘안돼, 저 배우는 웃겨야 해’ 하는 상황이 반대로 나에게도 적용될까봐 하는 우려가 있었다. 이 영화를 하는 내내 나를 믿는 자신감 한편으로 그런 불안감이 나를 붙잡아 매고 있었다.”
9월15일부터 당장 할리우드에서 브루스 윌리스와 호흡을 맞추는 <레드2>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전직 CIA 요원이다. 블랙코미디가 베이스를 이루지만, 이병헌과 매치가 힘들지 않은 최상의 연기를 보여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다시 그는 대본에 쓰여진 단 한줄, ‘완벽한 몸매’를 위해 지난한 식이요법에 들어갔고, 특유의 멋있는 품새를 한껏 가다듬는다. 부디 내년 초 <지.아이.조2>와 곧이어 <레드2>가 개봉할 때쯤 <광해>의 연기를 다시 보길 권한다. 빡빡하게 구성된 이병헌의 연기 스타일에 주어진, 작은 ‘빈틈’. <광해>는 이 허술함을 위해 설계된 가장 만족스런 일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