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나는 영화와 함께 간다
2012-10-11
글 : 김혜리
사진 : 최성열
이병헌과 <광해, 왕이 된 남자>와 그 밖의 것들을 꼬치꼬치 이야기하다

*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주간지는 1년에 50권을 발행한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영화배우는 1년에 한편에서 세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영화인과 미디어는 신작이 대중에게 공개될 때마다 만나는 것이 보통이나, 그 모든 인터뷰가 진심으로 안달복달 답을 보채는 질문들과 작업을 제대로 설명하려는 배우의 의욕을 동력으로 진행되진 않는다. 기자로서도 동일한 연기자의 배우론을 석달, 혹은 반년마다 새롭게 쓸 수 없고 배우 역시 신작을 찍을 때마다 방법론을 갱신하지 않는 바에야 딱히 신선한 답을 내놓을 도리가 없으니 불가피한 결과다. 우리는 그래서 간혹 독자/관객이 품을 법한 신작에 관한 일반적 궁금증을 골자로 한 의무방어전과 비슷한 인터뷰를 ‘서로의 업무’라는 암묵적 전제 아래 사실의 기록에 의의를 두며 예의바르게 수행한다. 구태여 한탄할 사태는 아니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흥분이나 영감도 주지 않는 일들을 근간으로 세계는 멈추지 않고 굴러가는 것이다.

올해 6월로 예정됐던 <지.아이.조2>의 개봉이 연기되고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의 공개가 다가오자 나는 슬며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전해들은 <광해>의 윤곽은, 장르는 물론 인물 배치 구도와 연기적 과제 면에서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한동안 쓰지 않았던 연기의 근육을 활성화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냥 간단히 말하면, 이번에야말로 흥겹게 대화할 ‘거리’가 많을 거라는 약삭빠른 예감과 이 타이밍을 놓치면 한참 기다려야 하리라는 초조함이 뒷목을 간질였다. 다행히도, “정말로 대화의 계기가 될 만한 작품이 나오는 시점에, 집중해서 재미있는 지면을 같이 만들어보고 싶다”라는, 간간이 전해들은 이병헌의 의사는 그대로였다. 인터뷰 약속을 확정한 다음에야 <광해>의 미완성 편집본을 접한 나는 안도했다. <광해>가 적어도 연기의 관점에서 <달콤한 인생> 이후 이병헌에게 가장 중요한 영화가 되리라는 점은 확실해 보였다.

광해가 된 남자가 된 남자

8월21일 오전. 필리핀 근해에서 북상하고 있다는 태풍의 경로를 라디오로 들으며 <광해> 개봉을 맞아 이병헌이 <채널CGV 무비톡>을 촬영하고 있는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지난 주말 인터넷을 휩쓴 사생활 관련 뉴스로 이병헌은 이미 강풍 속에 서 있을 터였다, 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6대의 카메라에 반원으로 포위된 현장과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오랫동안 충무로에서 듣고 본 대로, 일하는 동안은 흐트러지거나 느즈러지는 일이 없는 배우다. 그렇다고 정색하고 엄숙한 건 아니고 평소만큼의 장난기도 간간이 발휘하고 인터뷰어의 특정한 기대가 실린 질문에도 두루뭉술 맞장구치기보다, 각이 어긋났다 싶으면 “정확히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좌표를 분명히 하는 어법도 여전하다. 주관식 수학문제 풀 듯 답에 이르기까지 한 구절 한 구절 풀이과정을 밟아가며 대답하는 이 배우의 습관과 꼼꼼히 질문을 준비한 김태훈 MC 덕분에 20분 방송을 위한 녹화는 2시간을 소요했다. 우리의 인터뷰는 짧은 점심 뒤 이병헌의 소속사 BH엔터테인먼트 회의실에서 시작됐다.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지.아이.조2>를 찍는 동안 몇몇 시나리오를 두고 고민하던 차에 손석우 대표가 <광해> 시나리오를 망설이는 당신에게 권했고 이어 LA에서 제작자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 추창민 감독과 자리를 가졌다고 들었다. 우선 손 대표가 이 영화를 적극 추천한 근거는 뭐였나.
=내게 원래 있는 유쾌함과 엉뚱함, 건강한 기운이 대중에게 잊혀지고 있다는 점. 동시에, 항상 흥행성을 작품성보다 덜 중요하게 고려해왔는데 <광해>는 흥행성 면에서도 누가 봐도 만족스러운 작품이라는 점이었다.

-개인적으로 <광해>의 하선이 제일 먼저 연상시킨 전작의 인물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수혁이었다. 보통 작품 선택의 첫째 기준이 이야기의 설득력, 둘째 기준이 “내가 이것을 잘할 수 있나”로 안다. <광해>에 대한 망설임은 어느 쪽이었나.
=배우들이 다 그럴 거다. 이상하게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내가 어찌됐든 이걸 하게 되겠구나 하는 감이 오는 경우가 있다. <광해>는 재밌게 읽었지만 그 안에 있는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사극을 기피하진 않아도 분명 경험은 없으니 멈칫했을 수도 있겠지. 특히 직업이 광대라 운율을 타는 춤과 노래 장면이 있는데, 배우면 될 일인데도 그 연기를 하는 내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에 뮤지컬 <코러스라인>을 한번 했지 않나.
=대부분 목소리로 이끌어가는 역이어서 제대로 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답을 미루던 중에 감독님과 대표님이 LA로 오신다고 해서 만류도 했는데 결국 마주앉았다. 더 재밌는 건 대화 내내 내성적인 추 감독님은 말이 없고 반대로 대표님은 말이 너무 많아 신빙성이 떨어져 보였다는 거다. (폭소) 두분 다 결정에 좋은 영향을 줬다고 할 순 없다. (웃음)

-미국까지 가서 불안만 가중시킨 건가. (웃음)
=결국 즉답은 못 드렸고, 내 다른 큰 고민은 극적 긴장이 살아 있는 세련된 코미디와 경박한 코미디의 선을 내 연기와 영화 모두 잘 지켜나갈 수 있을까라는 근심이었다. 내 안엔 언제나 익살스러움이 있지만 그걸 연기로 표현하는 건 별개 문제니까.

-촬영 초반에 감독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이 선이 맞냐?”고 확인했다고 들었다. 한편으로는 할리우드 진출이 이뤄지면서 국내에서의 포지셔닝이 고민되는 시점 아니었나. 한류스타, 월드스타라고 규정되기 시작하면 배우로서 구체적 내용은 도리어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사람들 짐작만큼 내 머릿속이 복잡하지 않다. 계획도 목표도 없는 내 성향은 역사가 깊은데, 고등학교에서 이과, 문과 나눌 때도 장래 직업을 고려해 전공을 택하는 친구들이 대단해 보였고 나는 ‘나도 생각이란 걸 해야지’ 조바심 내면서도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 애였다. 불문과도 멋있어 보여서 지원한 거였고.

-십수년 뒤 한•불 수교 120주년 기념 프랑스 문화 홍보대사가 될 포석 아니었을까. (웃음)
=결국은 이러려고 갔나 싶긴 했다. (웃음) 직업을 고민할 시기가 되자 어려서부터 좋아한 것이 영화였고 그중 감독이 대장 같아 광고건 영화건 감독이 되려 했다. 반장은 많이 해봤어도 교단처럼 한뼘만 높은 곳에 올라가면 말을 못하는 무대공포증이 있어서 배우는 꿈도 안 꿨다. 그런데 우연히 어머니 친구가 KBS 공채 원서를 들고 오셨고 “네가 무슨 탤런트가 되겠니? 당연히 떨어지겠지. 하지만 젊어서 친구들과 어울려 온갖 일 다 부딪혀보면 그게 재산이 된다”라는 어머니 말씀에 지원했다가 60명 중 60등으로 합격했다.

-목표지향적이지 못한 태도가 기본적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는 말을 하는 건가.
=그렇다. 물론 직업 연기자가 되고 1, 2년 뒤부터 정말 매력과 보람을 느끼고 의지도 생겼다. 하지만 지금도 장•단기 계획과 목표를 물으면 대답 잘 못한다. 기업 사장이라면 수출 목표치나 신상품 계발계획을 대겠지만 우리 일이 한치 앞을 모르게 불규칙하니까. <공동경비구역 JSA> 끝나고 <번지점프를 하다>를 택했는데 기자회견에서 의외의 선택을 했다는 질문이 나와서 철렁한 적이 있다. 흥행작 다음에 신인감독 작품을 택한 게 뜻밖이란 의미였다. 난 또, 모르는 사이에 뭘 잘못한 줄 알고 어찌나 놀랐던지. (웃음)

-그런 패턴에서 예외는 할리우드영화들 아닐까? 아무래도 아직은 연기적 만족도보다 커리어에 대한 고려가 작용하는 거니까.
=돌아보면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을 비슷한 시기에 결정한 몇달이 살면서 작품 선택을 제일 장고한 기간이고 나를 크게 바꿔놓은 시기 같긴 하다. 그전까진 끽해야 1, 2년에 한편 하면서 정말 마음에 드는 작품만 조급함 없이 기다렸다.

-<지.아이.조>를 마치고 <광해>를 찍기까지 어떻게 지냈나? 일단 근육을 좀 지워야 했을 테고.
=<지.아이.조>를 찍는 동안 태릉의 선수처럼 지냈는데 감독님이 몸 만들기를 원치않았다. 왕이 배에 왕(王)자 있으면 안된다고. (폭소) 마침 운동이 지겨웠던 터라 속으론 만세를 불렀다. 소리 선생님께 탈춤, 부채춤 스탭과 가락 타는 법도 배웠고.

-영화를 보고 나면 당신이 주로 연기한 인물은 광해가 아니라 하선과 하선이 연기한 가짜 광해다. 그래도 실존 인물 광해군에 관해 해석해봤을 텐데.
=긴 세월 폭군으로 간주되다 재평가되고 파라노이아에 휩싸인 심리적 측면이 조명받은, 이중적이고 복잡미묘한 평가를 받는 왕을 연기한다는 점은 매력적이었다. 영화상으로는 광해군의 치적 중 대동법, 자주외교 등 좋은 부분은 하선이 한 일로 돼 있지 않나. 결국 연기하는 나로선 굳이 광해라는 왕을 복잡미묘하게 그릴 필요 없이 극중 광해와 하선을 합쳐놓은 것이 실제 광해군이었다고 쉽게 정리하고 진짜 광해군을 연기할 때는 과하게 뉘앙스를 두지 않았다.

-팩션이긴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광해군에게 좀 억울한 영화긴 하다. (웃음)
=하선이 실존했다면 문제겠지만 완전한 픽션이니 용서가 되지 않을까.

<광해>는 좀이 쑤실 만큼 단정한 영화다. 뿌려놓은 씨앗을 남김없이 거두는 각본이다. 연기도 정석이다. 그러나 이 정돈된 드라마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예측 불가한 요소는 살아 있는 인간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의 결이다. 그중에서도 상영시간 대부분 등장하는 타이틀 롤 이병헌의 연기는 넓게 편 멍석 위에 모처럼 올라선 스타의 리사이틀을 구경하는 쾌감을 준다.

-<광해>에서 당신은 광해군으로 첫 등장한다. 바로 얼굴이 잡히진 않고 손을 덮도록 길게 풀어헤쳐 입은 곤룡포부터 보인다. 코스튬으로서 한복은 처음인데 의상팀과 어떤 의논을 했나.
=옷의 색감과 질감에 대해서 의논했고 감독님이 결정했다. 어렴풋이 다른 느낌이 드는 정도로 갔기에 자세히 보지 않는 한 어디가 다른지 찾기 힘들 거다. 광해의 의상은 좀더 길어서 치렁치렁 늘어진 느낌인 반면 하선의 옷은 깡똥하다. 같은 붉은 옷감이라도 광해의 것은 조금 세련된 빨강이다. 다만 감독님께 광해로 나올 때는 나른한 느낌, 그렇다고 카리스마 없는 이완이 아니라 나른하면서도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를 듯한 조마조마함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실제 광해군이 그랬듯 극심한 불안 때문에 늘상 삐딱하거나 다리를 걸치고 앉으려 했다. 어찌보면 약에 절어 있는 인상?

-광해와 하선이 바뀌기 전 광해의 장면은 거의 일 대 다 구도라 여럿과 있어도 혼자 있는 듯하다. 그의 앞에서는 아무도 눈을 맞추지 않고. 엎드린 등만 보인다. 왕 연기는 1인극과도 비슷한 면이 있겠다.
=소통이 아니라 일방통행이니까. 신하로 분한 배우들이 대부분 연세 많은 보조출연자이시고 대신을 연기한 조연 선생님들도 선배들이신데, “통촉하여주시옵소서”의 호흡을 맞추기 위해 내가 용상에 앉기 20, 30분 전부터 미리 연습을 하니 부담스러웠다. 놀라운 점은, 배우의 적응력인지 몰라도 그렇게 좌불안석이다가도 카메라가 돌고 용상에 앉으면 마음이 표변해 갑자기 하나도 안 미안하고 이것저것 명해야 할 것 같은 거다. (폭소) 한 선배가 “왕을 연기하고 나면 큰 도움이 될 거다” 하셔서 당시엔 이해 못했는데 마치고나니 호흡, 발성, 말을 곱씹으며 호령하는 연기를 통해 대사를 맛있게 처리하는 새로운 방식을 약간 터득한 기분이 들었다.

-롱숏에서 대사가 나오기 전에 관객이 자세나 몸짓만으로 그가 광해인지 하선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는 연기의 변수는 무엇이었나.
=오히려 자세가 격식을 갖추고 왕다운 쪽이 하선이라고 설정했다. 나는 왕이다, 왕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줄곧 의식하는 느낌으로 일부러 뒷짐도 지고 남이 볼 때는 바른자세로 용상에 앉는다.

-예를 들어 클라이맥스에서 대전에서 걸어나오는 왕이, 광해인지 하선인지 관객도 알 수 없는 신이 있다. 배우는 아무래도 광해로서 연기를 했나.
=연기자로서는 당연히 그게 맞다고 봤지만 감독님은 애매하게 하길 원해서 약간 이견이 있었다. 결국 가장 약한, 덜 광해스러운 테이크가 편집실에서 선택됐다.

-결말부에서 하선의 아이라인이 나루터의 상대인물과 맞지 않는 순간이 있어 영화를 보며 혹시 그 옆에 중전이 서 있지 않았을까 상상했다.
=아이라인이 어긋나 보이는 건 배를 따라가며 카메라가 무빙을 한 탓이지만 원래 중전과 하선의 감정에 여운을 주는 결말과 에필로그도 있었다. 나는 <광해>를 하며 <사관과 신사>를 떠올렸다. 하선과 허균의 관계를 사관생도 리처드 기어와 교관 루이스 고셋 주니어의 관계에 대입했다. 이상하게도 그 영화에서 난 리처드 기어와 데브라 윙거의 로맨스는 별로 기억이 안 나고 두 남자의 관계가 인상적이었다. 하선을 중심으로 <광해>에 팽팽히 뻗쳐 있는 색깔이 다른 관계들 가운데 감독님도 궁극적으로 중요한 건 허균-하선 라인이라고 판단하신 것 같다.

-당신은 지금까지 감독 의견대로 해보고 배우 생각대로도 해보고 뭐가 됐건 긴장을 풀고 가는 플러스 알파 테이크까지 자청해서 찍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추창민 감독님에 의하면 이번에는 그럴 겨를이 없었을 거라고….
=말도 마라. 별명이 “한번 더”였는데 이번에는 내가 졌다. 모든 배우가 혀를 내둘렀다.

-연배 높은 배우들과 작업한 <마파도>와 <그대를 사랑합니다> 때는 어떻게 연출하셨나 궁금해진다.
=아마도… 전작들을 하며 눌러둔 욕구를 이번에 한풀이한 게 아닐까. (웃음)

-<광해>를 촬영하는 동안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해를 품은 달>이 인기를 끌며 왕이 대중문화의 인기 코드로 부상했다. 왕 신드롬을 지켜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처음엔 트렌드를 타고 있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광해>는 들여다보면 멜로적으로나 액션으로나 왕이 멋있게 그려지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결정적으로 하선은 왕도 아니고.

A4용지에 출력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시나리오와 이병헌이 분한 마적 박창이의 현상수배 벽보. 몸값이 3천원이다.

이병헌이 <광해>에서 연기하는 것은 결국 배우다. 당대에는 ‘광대’라 불리지만 뒤집어 말하면 작가 겸 연출자 겸 연기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선은 단지 웃기는 익살꾼이라기보다 기생들을 설레게 하는 매력도 갖춘 스타고, 도부장(김인권)을 감복시키는 장면에 이르면 작가적 창의력도 발휘한다. 나아가 그는 배우의 연기감정이 현실세계의 감정보다 진실할 수도 있다는 화두를 은연중에 던진다. 광해는 젊은 날 중전에게 했던 약조를 잊었지만 하선은 자기의 가면이 한 약속을 완수하려고 한다. 하선이 가짜임을 번연히 아는 허균과 조 내관이 일시적이나마 그의 명을 받드는 대목은 호소력있는 배우가 갖는 비논리적인 권력의 일단을 엿보게 하기도 한다.

-하선의 직업을 현대적 관점에서 본인의 일과 연관지어 생각해본 적 있나.
=내 일과 연결시키진 못했다. 광대로 설정된 건 영화의 설득력을 탄탄히 하려는 포석이었을 거다. 곤룡포를 입자마자 왕의 목소리와 어투를 바로 흉내낼 수 있는 보통 사람은 드물 테니까. 자기 아닌 누구의 면모를 빠르게 습득하고 적응하는 자는 결국 연기하는 자겠지. 또, 하선은 때에 따라 상황을 이용할 줄 알고 필요하면 엄살도 부리고 금전에 혹하는, 굉장히 일반적인 우리 주변의 남자다. 단 감독님은 하선이 친근한 인물을 넘어 관객 보기에 아주 사랑스럽지 않으면 <광해>는 망한 거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주변 인물을 하나하나 매혹하고 설복시키니 이를테면 스타, 사랑받는 인간이다. 사실 궁궐은 허균의 말대로 사방에 눈과 귀가 있는 극장이고 왕족들은 생활이 연기인 배우라고 볼 수도 있고.
=정치의 생리에 대한 허균의 가르침을 들을 때마다 하선은 뭔가 배우긴 배우지만 그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관객을 대신해 팍팍 의구심과 불만을 표한다. 즉, 그는 궁이 무대고 시비들이 엑스트라고 모두가 배우인 상황을 부수고 싶어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광해>는 판타지적 대중영화의 면모가 있다. 현실에서 나쁜 정치는 나은 정치로 돌파해야 하는데 하선의 행보는 정치 자체를 휴머니즘으로 들이받는 거니까. 그러면 자기는 순결하게 남아도 현실은 바뀌지 않으니 이 영화는 보름간의 꿈이다. <광해>가 제시하는 리더십은 아무래도 환상적 해결책이다.
=15일간 실제 광해의 행적이 지워졌다는 역사적 사실에 착안한 영화니까. 여우처럼 영리한 기획이란 생각을 했다. 동시에 왕이 비밀리에 바뀐다거나 광해가 급변하는 결론이 아니니 쓴맛나는 현실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는 면도 있다.

-중전과 관련된 에피소드나 파병을 둘러싼 갈등이 있는 <광해>를 만드는 동안 혹시 고 노무현 대통령이 연상되진 않았나.
=관객이 떠올리지 않을까 정도? 하지만 링컨을 떠올리든 케네디를 떠올리든 관객 몫이고 특정인물을 연상하며 연기하진 않았다. 말미에 원래는 조 내관이 “왕이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거나 인정을 주면 안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신이 있었다. 어찌보면 누군가가 굉장히 인간적인 리더의 모습을 보였다 해도 결과적으로 그걸로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영화가 말하려 했던 셈이다.

-허균의 명에 의해 하선이 최초로 왕을 흉내내는 장면은 <슈퍼 에이트>의 엘르 패닝이 또래 친구들의 8mm영화에서 타고난 배우의 재능을 드러내는 마술적 순간을 연상시킨다. 가짜인 걸 알면서도 듣는 이를 환각에 빠뜨리는 좋은 연기의 권능이랄까.
=그 장면의 수위를 여러 번 조정했다. 영화를 통틀어 관건은 하선이 진짜 왕처럼 변해가는 과정의 궤적을 어떻게 그리느냐였으니까. 배우가 생각하는 리얼리티로 보면 자연스러운 그래프는 아니었지만 관객에게 임팩트를 주기 위해 초반임에도 놀랄 만큼 광해스러운 부분이 있어야 했다.

-하선이 처음 상참을 하러 가는 시점숏 시퀀스는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 6세의 첫 라디오 연설 장면과 닮았다.
=나도 찍을 때는 전혀 몰랐다가 모니터 시사 보면서 느꼈다. 처음에는 사형대에 끌려가는 듯한 극도의 긴장감을 신의 핵심 정서로 봤는데, 감독님은 앞선 연습장면에서 하선이 흉내를 그럴싸하게 내고 조 내관과 허균의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오, 나 제법 잘하나본데?” 하고 약간 자신이 붙은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해석했다.

-백스테이지에서 무대에 올라가는 공연자 같은?
=‘긴장은 되지만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의 느낌. 그렇게 들떠 있다가 대신들을 보는 순간 ‘야,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 철렁하고 반전이 오는 걸로 합의하고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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