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가 진행된 BH엔터테인먼트 회의실에는 이병헌이 출연한 영화의 기념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폭염이건 혹한이건 가리지 않고 무작정 찾아와 기다리는 해외 팬들을 보다못해 직원들이 차를 대접하다가 기왕이면 추억할 만한 물건들을 보여주면 좋겠다 싶어 전시공간으로 꾸몄던 한때의 자취다. 지금은 평범한 사무실인 이 공간의 유리진열장 속에는 <올인>의 오르골과 <놈놈놈> 창이가 휘둘렀던 단도 3종 세트와 지명수배 벽보부터 <지.아이.조> 1편 스티븐 소머즈 감독이 에펠탑 테러 신 촬영 중에 차 안에서 고쳐쓴 대사 메모까지 오밀조밀한 소품들이 늘어서 있다. 원래는 꼼꼼히 챙기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런 영화의 조각들을 애타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전신 스캔을 해서 제작한 것치곤 이병헌과 너무 안 닮아서 허탈한 하스브로사의 스톰 쉐도우 액션 피겨에 잠시 웃었다. 이병헌을 할리우드에 연착륙시킨 <지.아이.조>는 연기보다 경험이 궁금한 작품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익히 아는 배우 이병헌이 “나우 유 다이”, “히 이스 히어” 같은 대사를 심각하게 읊조리고 쿵쿵 달려가는 영화를 보는 경험 자체에서 한국 관객이 보람을 느끼긴 어려운 노릇이니까.
-제작방식을 제외하고 할리우드에서 기교건 기술이건 연기적으로 더 터득한 바가 있다면.
=한국에서도 안 해본 전문적 발차기 무술을 미국 가서 배웠다는 게 아이러니다. 장검과 싸이(Sai)라는 원작에 나오는 삼지창 형태 무기도 처음 익혔다. 한국영화는 합을 맞춘 중국 무협식보다 사실적 액션을 추구한 지 오래인데 스톰 쉐도우의 액션은 전문 닌자양성소에서 수련한 형식이 확고한 무술이니까. 1편에서 스턴트 코디네이터에게 태권도를 가미하면 어떨까 제안했다가 중간 프로듀서-큰 프로듀서-스튜디오까지 올라갔다 결재를 받고 다시 내려오는 장구한 절차를 경험하고 의욕이 사라졌더랬는데 이번에는 시스템을 알아서 프로듀서에게 직접 아이디어를 제안해 바로 하달되도록 했다.
-적응이 빠르다!
=2편에 스톰 쉐도우가 물에서 나와 전신이 젖어 있는 컷이 있다. 다음 테이크 대기하다 물기가 마르면 아무나 양동이로 한번 물을 부어주면 될 것을 의상팀이 와서 바지 허리선까지 분무기로 물 뿜고, 얼굴부터 벗은 상체 적시라고 분장팀을 부르고, 분장팀은 헤어팀 몫으로 머리칼을 남겨둔다. (폭소)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인데 함께 간 정두홍 무술감독은 미치고 팔짝 뛰다 해탈했다. (웃음)
-영어 연기가 자연스럽다는 중평이다. 그런데 믹싱 탓인지 우리가 아는 이병헌의 음색보다 톤이 좀 깎인 느낌이라 더빙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사람마다 선천적으로 남보다 잘하는 것, 못하는 게 있는데 내가 소리나 발음을 잘 흉내내는 것 같다. 음색은 나도 내가 아닌 줄 알고 놀랐는데 알고보니 내가 스톰 쉐도우의 목소리를 그렇게 냈더라. 캐릭터 성격을 생각해서인지 영어를 말할 때 반사적 반응인지 부지중에 목을 꽉 조이며 발성을 하고 있더라.
-하긴 배두나씨도 일어, 영어, 한국어 연기를 해본 결과 가장 편한 한국어 대사의 음역이 낮다고 하더라. <지.아이.조 2> 개봉이 9개월 연기됐다. 3D 전환을 위해서라고 발표됐지만 예고편, 관련 상품도 나온 상태에서 큰 손해가 따르는 결정이라 스토리가 수정된다는 루머도 있다. 충분한 설명을 들었나.
=나 역시 최종 결과물이 궁금한 상태다. 일정 변경에 대해서는 거대 스튜디오는 아무래도 조금 일방적인 면이 있더라. 개봉 연기가 결정되기 전 약간의 추가촬영이 생겨 <광해>를 찍다 말고 4일을 빼서 미국에 다녀왔는데 평소 말도 사극투로 나오던 시기라 영어 연기 NG를 줄줄이 내서 치욕을 맛봤다. (웃음)
-<레드2>는 <지.아이.조.>의 제작자 로렌조 디 보나벤추라의 연으로 합류한 경우인가.
=에이전트에 따르면 처음 캐릭터 옆에 적혀 있던 후보 명단이 성룡, 이연걸, 주윤발, 그리고 나였단다. (웃음) 뭐야 기대 말란 소리잖아, 싶었는데 제작자와 <지.아이.조.2> 현장에서 나를 본 브루스 윌리스의 의견이 영향을 준 모양이다. 윌리스가 아시아에서 유명한 배우 아니냐고 물었다던데 아마 딴사람과 혼동했겠지. (웃음) 뉴올리언스 커피숍에서 영화배우 아니냐고 종업원이 물어와서 흐뭇하게 맞다고 했더니 “<행오버> 잘 봤어요!”라고 인사 받은 적이 있으니까. (폭소) 스탭들과 볼링장에 갔다가 스톰 쉐도우 열혈팬을 아들로 둔 매표원에게 공짜 입장을 선물받긴 했다.
진열장 양쪽으로는 이병헌이 영화에서 입었던 코스튬들이 도열해 있다. 창이의 프록코트, <인플루언스>의 황족이 입었던 견장 달린 재킷, 저걸 입고 어떻게 액션을 했나 싶은 스톰 쉐도우의 묵직한 백색 전투복. 수년 전 베를린 영화박물관에 전시된 마를렌 디트리히의 <푸른 천사> 의상을 보았을 때 엄습했던 기괴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창이와 스톰 쉐도우의 슈트, <아이리스> 속 현준의 군화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입고 신는 물건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큰 걸 어떻게 입으셨어요?” 나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어, 전혀 크지 않아요. 딱 맞는데?” 애써 표현하자면 그것들은 등신대의 1.2배쯤 크고 무거워 보였다. 사람보다는 거대하고 육중하지만, 신보다는 작은 존재들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물건으로 보였다. 이런 착시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이제 평생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배우로서, 그중 거반의 세월은 영화 스타로 살아온 이병헌은 혹시 항상 이런 옷을 걸치고 사는 기분이 아닐까? 그와 같은 사람들이 서 있는 곳은 지구가 아니라 목성쯤 되는 별의 중력장이 아닐까?
-20년 넘게 연기했다. “저이는 배우의 얼굴을 가졌다”라고 사람들이 말할 때 어떤 의미라고 보나.
=정석은 없다. 둥글둥글하고 눈동자도 잘 안 보이지만 대단한 연기를 하는 배우도 있다. 다만 유리한 조건은 말할 수 있다. 눈이건 턱선이건, 입모양이건 목덜미건 디테일한 감정이 잘 드러나는 얼굴들이 있다. 각지고 야위어 음영이 많고 힘줄도 드러나고 예민해 보이는 눈빛을 가졌다면 다른 사람보다는 얼굴로 할 수 있는 표현의 가짓수가 많긴 하다.
-방금 나열한 호조건을 다수 보유했다. 입을 벌리는 정도에 따라서도 여러 느낌이 난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보듯 눈뿐 아니라 눈밑 피부도 한몫한다. 다크서클도 잦고 아래 점막이 쉽게 충혈되고 잘 붓는 데다 때로는 툭툭 경련해서 감정이 즉각적으로 민감하게 노출된다.
=내가 웃는걸 처음 보고 “어이구, 이가 참 많으시네요”라고 놀라는 분들도 있다. (폭소) 입이 커서 많이 보일 뿐인데. 눈밑은… 난 살성도 연기에 한몫하는 건가? (웃음) 경련은 <달콤한 인생>에서 처음 발견한 증상인데 이후 작품에서도 분노한 감정을 오래 품다보면 나타나더라. 기계적 표현으로 보일 위험도 있어서 그런 테이크를 안 쓰길 바라기도 한다.
-<아이리스> 메이킹 다큐멘터리에서 출연진 인터뷰를 봤다. 공연한 비슷한 연배 남자배우들은 한 분야에서 자리잡은 한국 남자들다운 고착된 의례와 안정된 화법을 구사하는데 당신은 뭔가 사소한 것들에 계속 한눈팔고 주변에 반응하면서 이야기하더라. 다른 사람들이 어른의 세계로 넘어갔다면 당신은 여전히 정착이 안된 인상이었다.
=어느 편에도 끼지 않는 묘한 나만의 세상 속에 있는 느낌이 있긴 하다. 후배들이 간혹 내게 좋은 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하냐고 가르쳐달라고 하면 최근까지도 내가 뭘 가르치냐고 너한테 배울 게 있으면 몰라도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하고 있는 조언은 철들지 말라는 거다. 우리 문화는 알게 모르게 나이에 맞게 행동하라는 압박이 강하다. 그러다보니 스무살 소년들이 애써 말투, 눈빛, 걸음걸이를 훈련으로 바꾸는 예를 본다. 성장한 기분이 들지 몰라도 실상은 반대다. 창의성의 가지가 잘려나가는 거니까. 물론 책임감, 배려, 상도덕, 질서 유지 등 어른스러움의 미덕도 있다. 하지만 어릴 적 마인드로 사고하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들이 삶에는 뜻밖에 많다. 더욱이 이쪽 일 하는 사람의 상상력은 덜 어른스러워지는 데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브렛 래트너,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사무실과 여러 영화사에 갈 때마다 수많은 장난감에 놀랐다. 그들이 만든 영화를 보며 우린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나 감탄하잖나.
-본인에게 중요한 영화로 <스카페이스>를 꼽기도 했는데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 중 어느 쪽을 좋아하나.
=알 파치노. 하지만 누가 더 잘하는 배우냐고 묻는다면 더이상 그런 거 없다. 연기 잘하는 사람이 워낙 많다. 다만 그중에서도 그의 연기를 한번 더 보고 싶고, 신작을 찍으면 꼭 봐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반면 연기는 무진장 뛰어난데 신작을 굳이 안 찾아보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 취향이지만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내겐 그렇더라. 잘생긴 스타와 연기파 배우의 이분법이 한때 있었으나 이제 와선 ‘계속 보고 싶은 배우’가 더 좋은 배우라고 생각한다. 영화란 2시간 동안 그 사람이 말하고 움직이는 걸 보는 경험이고 그 시간이 즐거워야 하는 거다. 지금은 그런 시대 같다.
-한번 궤도에 오른 배우의 연기가 나빠지거나 존재감이 사라지는 사태는 어떤 경우에 일어난다고 보나.
=우리는 평범한 관심 속에 일하다가 나름대로 연구와 노력으로 변화를 줬을 때 급격히 능력을 인정받고 인기가 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순간 “그래, 이게 내가 가야 할 방향이었어”라고 결론을 내리고 계속 그 느낌을 유지하려고 하면 멈춰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자신은 제자리걸음이라 믿지만 실상은 도태된다. 반대로 무모하게 변화만 좇다가 결국엔 도전정신만 평가받고 끝나기도 한다. 나도 늘 정답이 궁금한 문제다. 억지로 철들려고 하지 말자는 이야기와 비슷한 건데 배우는 계속 말랑말랑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질적인 무엇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고, 배우다운 예민함과 디테일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상처받고 경험을 통해 점점 굳어지고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걸 거슬러야 한다.
-그런 유연함의 유무가 배우의 나이와 상관없이 관객이 느끼는 섹시함과도 관계가 있다. 이병헌도 배우로서 그런 위기감을 느낀 적이 있나? 무감동해지고 굳은살이 박인다고 의식하는.
=알다시피 약 3년 전부터 힘든 경험을 하고 있다. 혹자는 마음의 상처가 연기의 감성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지만 그런 상황이 지속되며 시간이 흐르면 내 마음이 무뎌져서 작고 연한 감정들에 대해서 어떤 감흥도 못 느끼는 상태가 돼버리는 건 아닐까 혼란스럽다. 내가 무슨 기업 회장이나 5공 시절 어마어마한 정치인마냥 권력있는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분들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아버님을 여읜 이후 가장 힘겨운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