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백을 하면…>의 감독 겸 제작자 조인성은, ‘그’ 조인성을 떠올린다면 처음엔 다소 실망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보라. ‘이’ 조인성이 훨씬 귀엽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건 배우 김태우 덕분이다. 내놓는 작품마다 신통찮아 툭하면 짜증인 데다 강릉으로 상습 도피를 일삼는 그를, 김태우는 미워할 수 없는 옆집 남자처럼 그려낸다. 그가 처음엔 서울과 강릉을 잇는 길 위에서 이런저런 사람들과 마주치며 이따금 억울한 상황에 처해 식식거릴 때면, 사랑스러워서 그저 흐흐흐, 하고 웃게 된다. 밥 먹는 연기는 또 어찌나 수더분한지. 이만하면 그를 생활연기의 달인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어진다. 여기, 그가 <내가 고백을 하면…>의 장면들 속에서 끄집어낸 생활연기의 참맛을 옮겨 적었다. 읽다 보면 그와 함께 강릉에서 못밥 한끼 하고 싶어질 거다.
-인터뷰 준비하다가 유부남, 그것도 11년차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모르는 분들이 더 많아요. 애도 있고, 아저씨죠, 뭐.
-아이가 있는 남자배우들이 어느 순간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작품을 선택해나가는 게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런 게 안 보여서 이제껏 몰랐나봐요.
=제 필모그래피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아내가 그런 부담을 안 주는 편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영화도 하고 있고. (웃음)
-조성규 감독님과는 오랜 친분이 있는 만큼 참여하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지난해 겨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블루룸>이라는 2인극을 하고 있었는데 차 한잔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나갔더니 갑자기 시나리오를 주시는 거예요. 그 시나리오가 재미있었고요. 제가 그때 그 연극을 더블 없이 혼자 50회를 했거든요. 그거 끝내고 겨울에 강릉에서 영화를 찍으며 한해를 마무리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질렀죠.
-실제로 스폰지하우스 대표인 감독님의 모습을 많이 투영한 캐릭터인 만큼 신경 쓰이진 않으셨는지.
=오히려 롤 모델이 옆에 있어서 편했어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외모에 대한 부담도 전혀 없었습니다. 모르는 분들은 인터넷 찾아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웬 중국 아줌마가! (웃음)
-그런데 주인공 이름은 또 조인성….
=안 그래도 새로 들어갈 드라마를 인성이랑 같이 하는데, 어제 처음 만났거든요. 보면서 느꼈죠. 아, 우리 감독님이 스스로를 이상화하고 있는 부분이 많구나….
-제작자 겸 극장주 겸 영화감독 인성은 서울에서 일이 잘 안 풀리고 그렇게 쌓인 것들을 풀기 위해 주말마다 강릉을 찾는 인물입니다. 어딘가로 계속 떠난다는 점에서, 그리고 화내고 짜증내는 장면마저 귀엽게 살린다는 점에서 홍상수 영화 속 김태우가 떠올랐어요. <해변의 여인>에서 김승우씨를 쫓아가며 계속 사과하세요, 라고 하는 장면은 그중 최고의 순간이었잖아요.
=그 장면은 현장에서도 난리였어요. 원신 원컷이라 NG나면 안되니까, 제가 막 걸어가고 있으면 스탭들이 웃음을 참지 못해서 멀리 도망가는 게 계속 보이는 거예요. 카메라 감독님도 웃음 참으시느라 고생하고…. 근데 이거 홍상수 감독님 영화 홍보 같은데요? (웃음) 아무튼 이 영화에서는 그런 장면들을 잘 살려야 인성이가 서울을 찾는 당위성이 생기니까 정확하게 화를 내고 정확하게 짜증을 내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전체로 봤을 때 엄청 중요한 신들은 아니지만 정확히 표현해줘야 했어요.
-말씀하신 대로 처음에는 인성이 왜 시간적, 금전적으로 무리를 하면서까지 주말을 다른 데서 보내려는지 의문이 들게끔 순서가 지어져 있어요.
=전 그게 좋더라고요. 툭 들어가서 영화가 시작되는. 원래는 제가 강릉 가고 있는 걸로 시작해서 보통 에필로그처럼 편집돼 있었거든요. 그것보다는 관객이 처음에는 ‘뭐지, 쟤네?’, 이런 느낌 갖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았어요. 저희가 미장센이 좋고 스토리텔링이 정확한 유의 영화가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 심리적으로 긴장감을 주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결국 강릉 여자 유정(예지원)과 주말만 집을 바꿔서 살게 되는데, 그러다 유정과 관계가 있었던 김 박사에게 오해를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유정의 집 엘리베이터 앞에서요. 특유의 ‘리얼’한 연기가 살아 있습니다.
=그런 게 생활연기인데, 잘못하면 (캐릭터가 되지 못하고 그냥 인간) 김태우가 돼요. 그래서 편하게, 자연스럽게만 할 수가 없어요. 또 그게 계산한 티가 나면 절대 안되고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놀라는 것, 그런 게 제일 힘들어요. 보통 우리가 엘리베이터 앞에 누가 있으면 놀랐으면서도 안 놀란 척하잖아요. 근데 신경은 또 계속 그쪽에 가 있잖아요. 그런 걸 자연스럽게 하려면…. 거기다 하나 덧붙인 건 김 박사가 가는데 갑자기 뒤돌아보면서 ‘뭐야, 저 사람’이라고 하는 것. 나중에 병원에서 김 박사를 보고 ‘저 사람 이상하지 않냐’라고 하는 장면과도 맞을 것 같아서 바로 컷하지 말고 좀더 가달라고 했는데, 문 따고 들어가기 전에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다른 장면 중 관객이 눈치채기 어려운, 배우 혼자 연구한 디테일이 또 어떤 것이 있나요.
=예를 들어, 안영미씨 처음 등장하는 장면. 내 조감독이고, 같이 방을 써도 아무 일이 없을 만큼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보여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문자하면서 대화하는 걸 생각해냈어요. 근데 그게 관객에게 들통나면 소용없죠.
-생활연기는 티 안 나게 ‘열공’해야 하는 과목이네요.
=그게 또 연기하는 재미죠. 이런 연기는 제일 좋은 칭찬이 그런 거예요. 야, 저건 그냥 김태우 같아. 성격이 원래 저런가봐.
-이 영화에서는 생활연기 중 밥먹는 연기야말로 최고난이도가 아닐까 싶었어요.
=제일 신경 쓰여요. 특히 여기서는 맛집들을 돌아다니며 맛있게 먹는 역할인데 대사도 긴 편이라 리허설할 때 계산을 많이 했어요. 아, 이 타이밍에는 밥을 많이 넣어도 되겠구나. 과장되게 얘기하면 지원이가 대사할 때 저는 먹는 거예요. 그리고 제 대사하기 전에 열번쯤 더 씹어야 되는 걸 그냥 꿀꺽 삼키는 거죠.
-그래도 가장 맛있게 먹은 장면을 꼽는다면요.
=하루는 오전 10시에 사촌누나랑 같이 우렁미역국을 맛있게 먹는 장면을 찍고 바로 옆 가게로 옮겨서 물회를 맛있게 먹는 장면을 찍어야 했어요. 못 먹을 줄 알았는데, 컷 하고 나니 거의 안 남았더라고요. 찍으면서 살 엄청 쪘습니다.
-감독님과 배우, 스탭의 구성을 봤을 때 친한 사람들끼리 쿵짝쿵짝하면서 재밌게 만들었을 것 같고, 영화에도 그런 분위기가 묻어나는 것 같아요. 실제로는 어땠나요.
=실제로 쿵짝쿵짝했죠. (웃음) 근데 그게 티가 나던가요?
-나면 안되나요?
=저예산영화니까 좀 양해해 달라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싫어서요. 저예산이라고 연출이나 연기를 대충한 것도 아닌데. 그런 걸 감출 필요는 없지만 전면에 내세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우정출연작도 많았어요.
=<대물>(TV) 때는 기사는 현정이랑 친해서 했다고 나갔지만 저는 대본 보고 한 거예요. 주인공이 자신 때문에 대통령까지 하게 되는 중요한 역할이더라고요. <퀵>도 결과는 그렇게 나왔지만, 시나리오만 봤을 때는 그대로 구현되면 한국에 새로운 액션영화가 나올 수도 있겠다 싶어서 한 거죠. 전 거기에 우정이 있는 사람이 없어요. <무서운 이야기>나 <설마… 그럴리가 없어>는 현장에 놀러 갔다가 즉흥적으로 출연하게 된 경우들이었고요.
-배우가 배역을 고를 때 단순히 시나리오만 보고 고를 수 없는 이유들이 작용하지 않나요. 이미지 관리나 변신에 대한 계산이라든지.
=이미지 변신은, 뭐, 평생 연기할 건데요. 내가 착한 이미지인 것 같다고 일부러 깡패 역을 찾고 그럴 필요가 뭐가 있나요. 올해 초 <바보엄마>라는 드라마 할 때 처음이었는데. 어디 슈퍼 갔더니 만날 그런 못된 역할 해서 어쩌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이었는데…. 홍 감독님 영화 전에는 항상 의사, 대학원생, 이런 거 들어왔어요. 지금은 뭐 지질한 역 주로 한다는 이런 얘기 듣잖아요. 그런 이미지 신경 안 써요. 그냥 좋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고, 그 안에서 얼마나 잘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성실하기로 유명한 배우로 알려져 있는데 인터뷰들을 읽다보면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 그런 식으로 표출되는 것 같더라고요.
=매번 말씀 드리는 거지만, 제가 가진 게 부족하고 욕심이 많아서 성실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말을 듣는 게 좋진 않아요. 제가 어떤 역할을 맡았을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있는데 제 능력으로 안되는 게 대부분이니까, 그 차이를 메우려고 아등바등하는 걸 성실하다고 봐주시는 거죠.
-그렇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예전에는 연기할 때 대본을 열심히 봤어요. 요즘은 생각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더라고요. 여기서 누구를 만난다고 하면 지각해서 택시를 타고 왔을까, 그럼 숨찬 느낌으로 인사를 해야 하나, 그런 고민들. 신과 신사이를 상상하는 것 있잖아요.
-평소에도 꾸준히 영화를 챙겨보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작품 선택에 영화적 취향의 영향이 있나요.
=보이지 않게 있겠죠. 그러니까 자꾸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지난해 10년 만에 드라마를 해봤던 거예요.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는 다시 한번 악역을 맡으셨는데 어떤 모습을 준비 중인가요.
=청부살해업자인데, 전형적으로 하고 싶진 않아요.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외형은 패셔너블하게 가고 연기는 아주 편하게 가면 어떨까 고민 중이에요. 근데 나중에 드라마 보면서 ‘고민한 게 겨우 저거야?’라고 하시면 어쩌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