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승민과 서른다섯살의 승민
<건축학개론>
영화라서가 아니라 ‘현실’이라서 가능한 숏도 있다. 스무살의 대학생 승민과 서른다섯살의 건축가 승민이 만났다. 현장에서 건진 엄태웅과 이제훈의 기분 좋은 웃음이다. 그때, 납뜩이가 있던 자리에 대신 서른다섯의 승민이 있었다면, 스무살의 숫기 어린 승민에게 좋은 연애 코치가 될 수 있었을까? 이용주 감독은 <건축학개론>을 ‘스무살에 대한 반성문’이라고 일컬었다. 십년을 써내려간 지독한 반성문은 올봄 410만 관객에게 90년대 중반의 추억을 불러오는 마법을 일으켰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라디오를 잠식했고, 카세트플레이어와 삐삐, 무스가 다시 기억을 간질였다. 영화의 흥행돌풍에는 이렇게 410만 관객에게 따로 적용되는 410만개의 첫사랑, 각자의 해석이 존재했다. 영화는 끝났고, 이제훈은 입대했고, 수지는 다시 미쓰에이의 멤버로 돌아갔으며, 엄태웅은 결혼을 발표했지만, 서촌과 제주도의 집은 아직도 영화를 기억하는 관객에게 남아 있다. 영화를 제작한 명필름은 제주도 서연의 집을 곧 올레길을 걷는 이들을 위한 카페와 갤러리로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에도 그 기억을 찾아갈 곳이 생긴다니, 참 다행이다.
우린 네가 올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
추석영화 중 왕중왕을 꼽는 경우는 많았다. 추석영화가 장기 흥행에 진입한 경우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가 처음이다. 여름, 겨울 블록버스터 시즌도 아닌데 <광해>는 1천만 영화에 합류하는 이상 흥행대작이 되었다. <광해>의 성공요인이야 많고 많다. 하선에게서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감동을 선사했다는 얘기다. 이병헌을 선두로 조력자들의 하모니도 좋았다. 류승룡, 장광, 김인권은 욕심을 내는 대신 각자의 위치에서 최상의 연기를 펼쳐 보인다. 이병헌의 활약은 막중했다. <광해>는 <악마를 보았다>와 같은 무거운 스릴러영화로, 뵨사마로 일본의 스타로, 또 <지.아이.조> 시리즈로 할리우드 진출로 바빴던 그가 작정하고 한국 대중을 포섭하려는 시도였다. 관객과의 대화에 적극 참여하고, 뉴스에 나와 여자친구에 대한 질문에도 순순히 답변했다. 이에 붙인 김 연기도, 매화틀의 연기도 적나라했다. 자칫 썰렁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사뭇 진지한 이병헌이 하니 웃겼던 장면이다. 어쨌든 무더웠던 올여름, 촬영하느라 다들 고생이 많았다. 오죽하면 류승룡이 사극 복장에 선글라스를 꼈겠나 싶어 웃다가도 주춤하게 된다.
이곳이야말로 재난의 현장
<연가시>
“다그치고 보채고 달래고 찍는 데도 한계가 있다.” 박정우 감독의 토로가 생생하다. 감염자들이 물에 빠진다는 설정 때문에 <연가시>는 현장 자체가 그야말로 재난이었다. 전문배우도 아닌 보조출연자들을 엄동설한에 대거 물에 빠뜨려야 했다. 속으로야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는 스케줄이었다. 감독이 못된 척이라도 해야지 간신히 촬영이 진행되는 강행군의 연속. 특히 어린 희생자를 연출하기 위해 박정우 감독은 자신의 9살난 아들까지 설득해 물에 빠뜨렸다. 어린이는 저체온증으로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안다면 오싹한 결정이다. 올여름 450만 관객을 동원하며 대한민국을 연가시 감염의 공포에 떨게 한 화제작이 만들어지기까지 빠듯한 예산, 열악한 현장과의 사투가 뒤따랐다. <주유소 습격사건>을 비롯해 코믹 시나리오로 승승장구하던 박정우 감독이 감독 데뷔 뒤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흥행에 성공한 첫 작품이기도 하다. “이것마저 성공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전공 분야인 코미디를 할까 했다”는 박정우 감독. 당신의 저력을 보여줬으니 이제 맘 편히 코믹하셔도 되겠다.
역시 배우는 다르군요
<화차>
올 연말 가장 바쁠 여배우를 꼽아본다면, 단연 김민희다. 도통 그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화차>의 강선영은 압도적이었고, 한국영화의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캐릭터가 되었다. 살인 뒤 피칠갑을 한 채 방바닥을 기어가는 여자. 자본주의의 덫에 걸려 괴물 강선영이 되어가는 그 변화의 중심을 김민희는 소름끼치도록 정갈하게 표현해냈다. 물리적, 감정적 요동이 가장 큰 <화차>의 장면을 촬영하던 날 김민희는 전날부터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촬영 때는 어떻게 그 장면을 찍었는지도 몰랐고, 촬영 중엔 발목을 삐었는데도 인지하지 못했으며, 촬영이 끝나곤 바로 기절했다고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흐른 뒤엔, 밥을 아주 잘 먹었다는 귀여운 후일담이다. 펜션장면만큼이나 부담이 컸을 긴박한 용산에서의 한컷. 환한 웃음 뒤에도 역시 고민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을 것이다. 촬영에 들어가면 100% 캐릭터의 옷을 입지만, 끝나면 훌훌 털어버릴 줄도 아는 프로페셔널의 모습이다. 연기를 할 때 그녀의 모습에는 ‘스타’보다 ‘직업인’이라는 표현이 적역이지 싶다. 18억원 저예산으로 242만 관객의 호응을 얻은 <화차>의 성공 뒤에 배우 김민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