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마지막 금요일. 아침부터 진풍경을 목격했다. <호빗: 뜻밖의 여정> 일본 정킷에 참석할 40여명의 한국 기자들이 트렁크를 이끌고 공항이 아니라 롯데시네마에 모인 것이다. 보통의 영화 정킷이 출발하기 며칠 전 국내 모처에서 시사회를 열거나 정킷이 열리는 장소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으로 출발하는 당일 아침 진행된 이날의 시사회는 무척 이례적인 경우. “오늘 보신 영화는 저희 직원이 LA에서 받아와 새벽 5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따끈따끈한 작품”이라고 수입사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의 남윤숙 이사가 덧붙였다. <호빗>의 후반작업이 워낙 촉박하게 끝났기 때문에 시사회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대규모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트렁크를 끌며 극장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새 여정을 시작하는 <호빗> 시리즈의 정서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두고 “영락없는 ‘반지원정대’”라며 농을 건네기도 했다.
이날 공개된 영화는 총 3부작으로 진행될 <호빗> 시리즈의 첫편, <호빗: 뜻밖의 여정>(이하 <뜻밖의 여정>)이었다. 제작이 중단되고, 감독이 기예르모 델 토로에서 피터 잭슨으로 교체되는 등 수많은 난항을 겪으며 비로소 시작된 프로젝트이지만, <반지의 제왕> 시리즈 이후 9년 만에 다시 보는 중간계 호빗마을 샤이어는 여전히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와 데칼코마니 같은 장면으로 영화의 도입부가 흘러간다. 100살이 훌쩍 넘은 빌보 배긴스(이안 홈)가 자신의 모험담을 담은 레드북을 쓰고 있다. 하지만 모험의 바통을 이어받는 건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인 그의 어린 조카 프로도(엘리야 우드)가 아니라 그로부터 60년 전, 간달프의 제안으로 뜻밖의 여정을 시작한 젊은 날의 빌보(마틴 프리먼) 자신이다. 어둠의 세력이 세계를 잠식하기 전, 샤이어의 백엔드에서 안락하게 지내던 빌보 배긴스에게 마법사 간달프(이안 매켈런)가 찾아와 모험을 제안한다. “샤이어의 호빗들은 모험에 별로 관심없다”며 간달프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그날 밤, 빌보의 집에 낯선 손님들이 찾아온다. “당신에게 봉사하겠습니다”라는 이상한 인사를 건네며 호빗굴에 들어닥친 열세명의 난쟁이들은 부어라 마셔라 하며 빌보의 음식들을 모두 축내 그의 화를 돋운다. 설상가상으로 간달프는 빌보가 사악한 용 스마우그로부터 빼앗긴 난쟁이들의 보물을 되찾는 모험의 열네 번째 멤버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 아직 모험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었던 빌보는 다음날 아침 짐을 꾸려 난쟁이들, 간달프와 함께 보물이 있다는 외로운산으로 기나긴 여정을 떠난다.
애초에 원작자 톨킨이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베드타임용 동화책으로 완성한 작품인 만큼 <호빗>의 1부 <뜻밖의 여정>은 어둡고 비장했던 <반지의 제왕>보다 한층 가볍고 밝은 분위기의 영화다. 우선 모험의 목적부터 다르다. <반지의 제왕> 프로도의 모험은 중간계의 명운이 걸린, 피할 수 없는 여정이었다. 절대반지를 소유하고 있는 한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불의 산을 오르는 일은 불가피해 보였다. <뜻밖의 여정> 속 빌보의 모험은 보다 사적이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건 절대적이고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하나의 목표가 아니라 개인적인 모험심이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돌아오게 된다면 전과 같진 않을 것”이라는 간달프의 말처럼 변화를 갈망하는 빌보의 마음이 <호빗> 시리즈의 여정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다보니 빌보가 계속 머물 수도 있었을 샤이어의 맛있는 음식과 안락한 의자를 그리워하거나 비에 젖은 야영지의 조악함을 투덜거릴 여유도 생기는 것이다. <뜻밖의 여정>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보다 소박하고 귀엽게 느껴지는 이유다.
호빗의 모험에 동행하는 이들의 개성도 <반지의 제왕>과는 사뭇 다르다. 프로도의 동반자였던 아라곤이 전사로서의 강인함과 반지원정대 리더로서의 단단한 내면을 갖춘 인물이었다면, 빌보와 함께하는 난쟁이족의 왕자 소린(리처드 아미티지)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리더다. <뜻밖의 여정>에서 그는 용 스마우그에게 나라를 잃고 변방을 떠돌며 삶을 연명하는 힘없는 왕자이지만, 황금과 보석이 넘치는 나라 에레보르의 후계자로서 누리던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한다. 그 당시 형성됐을 소린의 거만함과 쉽게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은 외로운산을 향한 여정에 반드시 필요한, 다른 종족(<뜻밖의 여정>에서는 엘론드(휴고 위빙)가 이끄는 요정족이다)에게 도움의 손길을 빌리는 행동조차 주저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소린은 빌보와 더불어 <호빗> 시리즈를 통해 성장이 기대되는 인물이다. 간달프조차 “난쟁이 똥고집에 질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하는 소린의 융통성없는 모습이 시리즈를 거치며 어떤 변화를 겪는지 지켜보는 것도 <호빗>의 관전 포인트가 되겠다.
빌보 배긴스와 골룸의 첫 만남
큰 목적의식 없이 시작한 모험이고, 원정대는 결함 많은 인물들로 가득하지만 <뜻밖의 여정>은 결코 가볍게 웃어넘길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무엇보다 피터 잭슨의 연출력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는 톨킨의 소설 <호빗>(총 19장) 중 첫 여섯장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에레보르의 평화로운 하늘을 날던 용 모양의 종이연이 어느새 용 스마우그의 모습으로 변해 모든 것을 불사르는 영화의 첫 장면부터 <뜻밖의 여정>은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무려 5억달러가 들었다는(영화 역사상 최고가다) 이 영화의 제작비가 결코 허투루 쓰인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반지의 제왕>과 마찬가지로 수려한 뉴질랜드의 로케이션과 수공예 방식의 정교한 프로덕션, 엄청난 CGI 물량공세에 힘입은 <뜻밖의 여정>은 세 마리 트롤과의 좌충우돌 격투 신으로부터 요정의 터전 리벤델의 환상적인 모습, 드넓은 황야에서 펼쳐지는 오크족과의 스펙터클한 추격 신, 거대한 미로 같은 고블린 왕국에서의 혈투,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소나무숲에서의 목숨을 건 싸움까지 원작의 만듦새에 걸맞은 상상력을 덧입히는 데 성공했다. 2시간5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결코 길지 않게 느껴질 정도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점은 등장인물의 모험 사이로 깊게 파고드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피터 잭슨은 <뜻밖의 여정>에서 유독 클로즈업과 바스트숏처럼 상황과 인물을 가까이서 조명하는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마치 등장인물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피터 잭슨의 이런 미학적인 선택은 <호빗> 시리즈가 영화 사상 처음으로 선보이는 기술인 하이 프레임 레이트(HFR)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1초에 48프레임, 말하자면 기존 영화 프레임의 2배를 담아내는 HFR은 사람이 실제 이미지를 보는 것과 가장 흡사한 방식의 생동감을 영상으로 구현하는 기술이다. 아쉽게도 11월30일 관람한 <뜻밖의 여정>은 극장 사정으로 HFR 시스템을 반영하지 않은 3D 버전으로 상영됐다. 하지만 관객에게 실사에 가까운 상상력의 산물을 목도하는 것을 넘어서 마치 그들 자신이 원정대의 일부가 되는 듯한 영화적 체험까지 가능하게 하려는 피터 잭슨의 야심만큼은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한편 소설 <호빗>을 기반으로 한 피터 잭슨의 각색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추억하는 팬들이 그리워할 인물들을 위해 한 자리를 비워두었다. “<반지의 제왕>과 <호빗>을 관통하는 일관성을 주고 싶었다”는 피터 잭슨의 말처럼, 원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뜻밖의 여정>의 곳곳에 포진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요정의 왕국 리벤델에서 열리는 백색회의다. 원작 소설에선 난쟁이족 일행이 요정왕 엘론드로부터 외로운산의 비밀 통로에 대한 정보만 얻고 리벤델을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뜻밖의 여정>에선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의 중요한 조력자였던 마법사 엘론드와 갈라드리엘(케이트 블란쳇), 사우론의 사악한 기운에 사로잡혔던 백색마법사 사루만(크리스토퍼 리)이 리벤델에 모습을 드러낸다. <반지의 제왕>의 시대로부터 60년 전, 같은 장소, 같은 인물이 참석하는 백색회의는 앞으로 다가올 어둠의 시대를 예고하는 듯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 누구보다 더 반가울 얼굴은 바로 골룸(앤디 서키스)이다. 지난 세편의 영화를 통해 영화사에 길이 남을 악역 캐릭터로 아로새겨진 골룸은 보다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뜻밖의 여정>에 모습을 비춘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반지의 제왕>에서 대사로만 짐작할 수 있었던 빌보와 골룸의 첫 만남이 비중있게 묘사된다. 고블린의 동굴에서 근근이 목숨을 연명해가던 골룸은 길을 잃은 빌보에게 수수께끼 내기를 제안한다. 네가 이기면 길을 가르쳐주고, 지면 잡아먹겠다는 말과 함께. 빌보가 골룸의 수수께끼를 풀고 절대반지를 손에 넣을 때까지,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듯 배우 마틴 프리먼과 앤디 서키스가 주고받는 대사와 호흡에 온전히 기대는 이 장면은 <호빗>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대목 중 하나로 자리잡을 것이다.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로는 보지 않았으면 한다”
이쯤에서 영화를 보기 전 모두가 궁금해했던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래서 <뜻밖의 여정>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명성에 걸맞은 영화인가. 이전 세편의 영화와 연결고리를 잃지 않으면서 원작의 상상력을 효과적으로 스크린에 투영했고, HFR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성취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뜻밖의 여정>은 새로운 프랜차이즈의 시작으로 꽤 만족스러운 영화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분명 있다. <반지의 제왕>이 방대한 원작을 짜임새있게 압축하며 권력을 둘러싼 등장인물의 내면까지 심도있게 들여다보았다면, <뜻밖의 여정>은 짧은 원작의 분량을 장시간의 영화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다소 이야기가 늘어지는 부분이 있고(빌보가 모험을 떠나는 초반부가 특히 그렇다), 매력적인 사건들이 차례로 관객의 눈을 홀리지만 정작 모험을 함께하는 캐릭터간의 유대관계가 충분히 설명되진 않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밖의 여정>은 2013년, 2014년에 연달아 개봉 대기 중인 시리즈의 2부 <호빗: 스마우그의 황폐>와 3부 <호빗: 또다른 시작>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톨킨의 복잡다단한 원작을 기반으로 블록버스터영화 제작에 동원할 수 있는 최상의 질료를 사용해 이 정도 퀄리티의 판타지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이는 여전히 피터 잭슨이라는 믿음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나는 관객이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로 <호빗> 시리즈를 보지 않았으면 한다”는 그의 말처럼 피터 잭슨의 새로운 프랜차이즈는 연말에 극장을 찾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를 제공한다. <뜻밖의 여정>은 12월13일 여섯 가지 버전(2D, 3D, 3D HFR, 3D HFR IMAX, IMAX 3D)으로 극장 개봉한다. 이어지는 지면에서는 12월1일 열린 일본 기자회견, 한국 매체와의 인터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