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덴 형제의 도약
<자전거 탄 소년>
소년은 멈추지 않고 페달을 밟아나간다. 다르덴 형제도 멈추지 않고 소년을 쫓아간다. 이윽고 이어지는 믿을 수 없는 구원의 순간. “이제 다르덴 영화들은 익숙하다고 생각한 순간 찾아온 경이”(이동진)는 <자전거 탄 소년>을 올해 외국영화 1위에 올리기에 충분했다. 한때 유사한 형식의 범람과 엇비슷한 이야기들의 반복으로 혹 정체된 것이 아닌지 우려를 자아냈던 다르덴 형제였지만 <자전거 탄 소년>은 거장이 거장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절정의 순간을 통해 여실히 증명한다. 다르덴 형제는 <자전거 탄 소년>을 통해 변화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만든 따뜻한 동화, 처음으로 사용한 적극적인 음악 등 눈에 띄는 변화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간결한 캐릭터, 이야기, 형식으로 진동과 파열로 가득 찬 삶을 성찰해낸다”(김효선)는 평가처럼 이 영화의 본질은 “영화를 이끌어가는 다르덴 형제의 힘과 에너지”(김태훈)에 있다.
육중한 감동이 서려 있는 마지막 장면을 빼놓고 이 영화를 이야기할 순 없다. “소년이 벌떡 일어나는 마지막 장면의 감흥으로 다르덴 형제는 뱅뱅 돌던 자신들의 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도약”(남다은)한다. 그렇다. 도약이다. 부활, 면죄, 구원으로 연결되는 “압도적인 비극적 감정의 표현”(한창원)은 리얼리즘에 입각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줄기차게 움직이는 소년과 거기에 순연히 반응하는 여자. 그 행위의 표면만 순수하게 쫓는 카메라가 문득 인간 구원의 비밀을 낚아채는 어이없는 순간.”(김혜리) 그 끝에 다르덴 형제가 서 있다. 여느 때와 변함없는 모습으로, 동시에 처음처럼 새롭게. 리얼리티에 관한 동화는 리얼리티를 넘어 삶으로 확장된다.
자유의 체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자유의 체험’이 아닌가.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매우 신비롭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 사실을 일깨운다. 별개로 찍힌 연극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감상 중이던 13명의 배우가 기억에서 대사들을 불러내어 그 무대를 무한히 확장해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압도적으로 시네마틱한 순간들이 유령처럼 출몰한다. 그 순간들 앞에서는 교양이 전무한 관객의 마음도 마구 파도칠 테다. “알랭 레네의 최고작. 영화 안에서 가능한 모든 자유로운 이행들의 집결체. 그 해방감과 짜릿함, 무엇보다 감동.”(남다은) 이 단 하나의 평만으로도 몇 문장에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이 영화의 총체가 밀려온다.
롱테이크 미학의 최고봉
<토리노의 말>
“브레송과 드레이어도 흔들릴 허무의 폭풍.”(박평식) 이 20자평만으로도 <토리노의 말>에 깃든 적막과 혼돈의 깊이를 헤아리기에 충분하다. 벨라 타르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되리라 공표한 이 영화는 서서히 ‘무’(無)의 지경 속으로 빠져드는데, 그 과정에서 감독 특유의 롱테이크로 짜낸 안무 속에 숨막힐 정도로 리드미컬한 침묵들이 유영한다. “롱테이크가 취할 수 있는 미학의 최고봉을 영화 <토리노의 말>을 통해 살필 수 있다. 화면 구성의 엄정함이 아니라 ‘연출적 자세의 엄정함’이 이를 드러내는데, 이 포멀한 구성력이 결국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며 마지막에 폭발한다”(이지현)는 평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 운동의 소멸을 영화적 생성으로 치환해낸 시네아스트와의 이별을 섭섭해한 이들이 많았다.
이 세상 가장 따뜻한 위로
<늑대아이>
“이 영화의 어떤 신들 때문에 앞으로 살면서 마주할 어떤 체험들이 더 풍요로워지리라는 걸 예감했어. 비 내리는 아침, 이유도 말하지 않고 아스팔트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면 이제 나는 캐묻지 않고 우산을 씌워주게 될 거야.”(김혜리) 이 이상으로 영화가 인간에게 어떤 위안을 건넬 수 있을까. 전작들에 이어 또 한편의 사려 깊은 애니메이션을 내놓은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는, 늑대 아저씨와 사랑한 소녀가 홀로 늑대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모습을 어느 실사보다 세심한 미장센과 정밀한 카메라워크로 쓰다듬는다. 그 온기 가득한 손길만으로도 “미야자키 하야오 이후는 확실히 호소다 마모루!”(이동진)임을 확신하기에 충분하다.
섬뜩하고 우아한 최면술
<멜랑콜리아>
실제로 지독한 우울증을 앓았으며 그 경험을 영화적 추동력으로 변환해온 라스 폰 트리에 감독. 그만큼 ‘멜랑콜리아’ 행성을 능숙하게 탐험할 수 있는 이가 또 있을까. 지구 종말을 향해 비행하는 이 영화는 우울증에 관한 극단적인 비교행동학 실험을 방불케 한다. “우울증의 내적 재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외적 재난 앞에서는 오히려 우울증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함을 보여준다. 우울증자는 세상을 비이성적으로 비관하는 어리석고 약한 존재들이 아니라, 냉철한 시각으로 세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비범한 존재들이다.”(황진미) 그 깨달음에 대한 지지 중에는 “섬뜩하고 우아한 최면술”(박평식)이나 “표면의 평화와 이면의 어둠을 한몸에 품은 이미지의 숭고함”에 대한 찬탄도 있었다.
과대/과소 평가된 작품은?
올해 과대평가된 해외영화에는 2편이 꼽혔다. 먼저 조커를 잃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2편을 넘어서는 데 실패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진가에도 의심의 눈초리가 던져졌다. “염력을 잃은 듯한 크리스토퍼 놀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장병원)는 평이 대표적이다. 더불어 무성영화의 미학에는 끝내 근접하지 못했던 <아티스트>의 거품도 사그라졌다. “스크린에서 만나는 새삼스러운 흑백의 느낌도 좋았지만 딱 거기까지. 아직 우리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진짜’ 흑백무성영화들이 많이 있지 않은가.”(우혜경) 한편 리들리 스콧의 SF 귀환작 <프로메테우스>는 더 주목받았어야 마땅했다는 지적이다.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하는 시각적 시”(김영진)를 통해 “인류 기원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흥미롭게 풀어냈다”(김종철)는 것이 주된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