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경이로운 단 하나의 꿈
<다른나라에서>
아름다움의 어떤 고결한 경지에 이른 영화. <다른나라에서>를 지지한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그렇게 느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다른나라에서>가 단연 올해의 영화 1위다. “아름다움을 본다는 행위가 동질적인 것 안에 내재된 풍요한 이질성을 분별해내는 과정이라면, 홍상수만큼 우리의 미감에 기여하고 있는 예술가는 없다. 이번에는 ‘another’와 ‘different’의 윤무”(김혜리)라고 말한 평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의 작은 해변인 모항에서 감독 홍상수와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함께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인데, 완성된 영화는 그 사건의 중요함을 넘어 새로운 미적 활기까지도 성취해냈다. 외국 배우를 주연으로 두고 영어 대사까지 등장한다는, 어쩌면 위험요소가 됐을지도 모를 그 점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새로운 영화적 활로로 바뀌었고 그 결과 많은 이들에게 갈채를 받는 데까지 이르렀다. 홍상수 감독은 예의 그 빛나는 연출 감각으로 이자벨 위페르와 그녀에 버금가는 한국 배우들의 우아한 협연을 지휘해냈다. 안느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세명의 다른 프랑스 여인이 차례대로 한국을 찾는 이야기, 라고 내용은 요약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요약이 쉽지 않으니 오히려 이런 찬탄을 전하는 게 더 좋겠다. “가장 상투적인 언어들의 향연을 가장 아이 같은 놀이로 만들고서 거기서 가장 맑은 반언어적인 순간들을 성취한, 정말로 잊고 싶지 않은 청량한 꿈. 홍상수의 다른 꿈, 아니, 새롭고 경이로운 단 하나의 꿈.”(남다은) 많은 이들이 올해 <다른나라에서>를 그렇게 생각했다.
강력한 캐릭터 이야기의 추진력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살아 있었다. 1980년대 우리의 형님과 아버지가 단발머리를 하고 다니던 그때에,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던 그때에, 어쩌다 부산의 폭력조직에 휩쓸려 들어간 한 남자의 일대기를 그린 이 영화가 올해 우리에게서 끌어낸 호응은 예상외로 대단했다. “윤종빈 감독이 추구해온 남자들의 세계의 절정판이다. 한국사회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한면을 보여줬다”(이현경), “삶에 대한 강한 집착력을 지닌 인물에 대한 호소력 넘치는 묘사”(김종철), “일반 상업영화 가운데 가장 드라마 구성력이 좋았다”(한창호) 등의 호평이 넘쳐났다. 그러니까 우선 영화가 재미있다는 말이다. 2012년에 나온 대중 장르영화로서 첫손에 꼽힌 셈이다. 미국 갱스터영화 장르의 창의적이고 매끄러운 번안과 수용도 작용했겠지만, 영화 자체가 내장한 강력한 캐릭터의 호소력과 힘있는 이야기의 추진력을 무엇보다 가장 큰 매력으로 꼽아야 할 것 같다. 당대 한국사회에 관한 단상까지도 끌어낸다는 평가를 받았으니 한마디로 재미있는데 의미까지 있는 영화로 기록된 것.
시대를 향한 솔직한 발화
<남영동1985>
<남영동1985>는 영화의 제목이 가리키는 그때 그 장소에서 벌어졌던 무섭고 소름 끼치는 고문에 대한 증언이다. <부러진 화살>에 뒤이어 곧장 이 영화에 착수한 정지영 감독은 화려한 영화적 화법 대신 공감을 끌어낼 만한 자기만의 진솔한 화법을 전면에 내세운다. 고문을 당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면 고문당하는 장면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일면 단순해 보이는 그 화법의 저돌성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강력한 영화, 바닥까지 흔든다”(이동진), “군더더기 없이 돌진하면서 정교하게 핵심을 찌른다”(김효선) 등이 가리키는 바는 <남영동1985>가 매우 굵고 힘있게 말걸어오는 영화라는 사실이다. “시대를 바라보는 직설화법, 주저없다”(이화정)는 평가도 그래서 나온다. 한 평자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정리된다. “나는 이 영화가 구체적인 현실정치의 맥락에 개입하려는 영화 외적 열망만큼이나 내재된 솔직한 발화에 반응한다. 용서, 화해, 관용, 통합 등의 수사보다 중요한 것은 솔직함이다.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직시하고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을 섞이지 않는 상태로 견뎌낼 때 우리는 진화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정치영화 <남영동1985>의 진정한 가치이자 힘이라고 생각한다.”(김영진)
부조리, 복수 그리고 구원
<피에타>
“2012년의 화두가 된 영화”(남동철),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개인의 복수에 그치지 않고 처절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길을 모색하는 영화”(김지미), “사랑과 속죄와 구원이라는 기독교 신학의 통찰을 지금 여기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의 사건을 통해 풀어내는 영화”(황진미), “동시대적인 테마, 곧 보편적인 테마(호모 사케르)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 표현은 청계천 기계상 골목이라는 매우 특별한 지역성을 갖고 있는 점도 돋보였다”(한창호).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를 1위로 강력 지지한 평자들의 평이다. <피에타>는 김기덕 감독의 정식 국내 복귀를 알리는 작품으로 애초부터 큰 관심을 모았고 게다가 베니스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더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지지하는 평자들의 말에 따르자면 이 영화의 진짜 가치는 해외 영화제 수상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사회의 부조리를 말하는 가운데 도덕적 복수극과 윤리적 통찰까지도 함께 어우러지도록 한 바로 그 성과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세상은 움직인다
<두 개의 문>
용산참사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은 “소리치지도 않고 이죽거리지도 않으면서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받침점”(듀나)으로 올해 큰 주목을 모았다. “영화가 사회를 움직이게 한다는 건 여전히 흥미롭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그다지 새로운 점이 없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끌어낸 ‘형식에 대한 논란’은 한국영화 전체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이지현)와 같은 의견을 끌어냈다. 부족한 것도 있지만 성취가 더 크다는 뜻이다. 혹은 “악의 실체를 끝내 대면하지 못한, 끝내 실패한 자리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필연적인 실패의 윤리”(남다은)라는 의견도 있다. <두 개의 문>은 점점 잊혀가고 있던 용산참사 문제를 다시 길어올렸다. 게다가 흔히 상상하게 되는 피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도리어 가해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로써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문제의 핵을 찔러 우리의 마음의 문을 끝내 두드렸다.
<다른나라에서> 압도적 1위 2위와 3배 격차
설문 총평과 올해의 한국영화 6∼10위
올해의 영화 1위를 차지한 <다른나라에서>에 대한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2위를 차지한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와의 격차는 거의 세배수에 가까웠다. 반면 2위와 3위는 다소 치열한 경합이었다. 지지자들의 양상은 약간 달랐다. <범죄와의 전쟁…>을 1위로 꼽은 필자는 참여자 총 30인 중 1명뿐이었지만 2위로 꼽은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3위로도 고르게 선정되면서 두터운 점수를 쌓았다. 3위 <남영동1985>의 경우는 강력한 지지자들의 후원이 있었다. 이 작품을 1위로 선정한 이들만 4명이었다. 4위 <피에타>도 강력 지지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는 양상을 보였다. 5명의 필진이 <피에타>를 자신들의 리스트에서 1위로 뽑았으니 그것으로만 따지면 3위를 차지한 <남영동1985>보다 더 강력한 지지자들이 있었다는 뜻이지만, 그에 비해 5위권 안에 <피에타>를 아예 넣지 않은 필자들도 많았다. 그게 다소 뒤처진 요인이었다. 5위를 차지한 <두 개의 문>은 올해 베스트5에 든 유일한 독립영화다. 가령 지난해에 <두만강> <무산일기> <파수꾼>이 2위부터 4위까지를 차지했던 것에 비하면 특기할 만한 일이다. 자, 그럼 이제는 아깝게 한국영화 베스트5에 들지 못한 6위부터 10위까지의 영화를 한번 알아보자.
6위에는 <은교>와 <로맨스 조>가 공동으로 올랐다. <은교>는 충무로 대중영화 안에서도 작가성을 잃지 않는 정지우 감독의 영화다. 그래서 “정지우의 영화는 이미지로 표현하기 힘든 것을 표현한다. 이를테면 쓸쓸함과 관능”(장병원), “인간의 욕망에 대한 깊이있고 확대된 성찰. 아름다움에 대한, 젊음에 대한, 곧 시간성에 대한 욕망. 아름다움과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과 화두를 감독은 영상 언어로 적절하게 잘 시각화해냈다”(김태훈)라는 평가를 얻었다. <로맨스 조>는 올해의 신인감독으로도 선정된 이광국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야기의 대담한 구조와 신파적인 감수성의 근사한 화학작용”(남다은)이라는 평이 보여주듯이 많은 평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 것 같다. 8위는 <건축학개론>. “사실 이 영화의 플롯은 ‘첫사랑’이라는 모호한 대전제뿐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낭만적 개념을 손에 잡히게끔 전환한 작품이 바로 <건축학개론>이다. 군더더기 없는 화면 구성과 상징을 물리적 표상(이를테면 첫사랑의 아이콘이 된 수지)으로 바꾸는 감독의 미장센 등 의심할 바 없이 올해 최고의 웰메이드 상업영화다.”(이지현) 9위에는 <말하는 건축가>가 올랐다. “밥을 짓고, 글을 짓고, 건물을 짓고, 삶을 짓는다.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 안에 담긴 진심을 일깨우는 영화. 진심에서 진심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길 위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감응(感應)의 순간”(송경원)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사과>로 깊은 인상을 주었던 강이관 감독의 작품 <범죄소년>이 10위를 차지했다. “강이관은 여전히 벼랑 끝에 몰린 인간의 구석진 곳을 위악을 떨지도 않고, 위선을 떨지도 않고, 위계를 부여하지도 않으면서, 담담하게 끌어안는 법을 알고 있다”(남다은)는 호평을 얻었다.
과대/과소 평가된 작품은?
올해의 과대평가된 한국영화로는 <피에타>가 꼽혔다. 그해의 가장 뜨거웠던 화제작 중 하나가 종종 과대평가작에 오르기도 하니 특이한 일은 아니다. “더 둔탁해진 김기덕의 시”(김영진)는 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에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이 영화의 장점은 ‘김기덕’이란 브랜드를 완성시킨 것 외에는 거의 없다. 성취에 비해서는 과도하게 호평받았다”(이지현)와 같은 의견은 <피에타>의 미학적 성취를 얼마간 인정한다 해도 그 칭찬이 좀 지나쳤다는 뜻인 것 같다. 한편, 과소평가된 영화로는 세편이 나란히 꼽혔다. 민병훈 감독의 <터치>, 곽경택 감독의 <미운오리새끼>, 이승준 감독의 <달팽이의 별>이다. <터치>는 꽉 짜인 드라마와 긴장감 넘치는 감정선이 강점이다. <미운오리새끼>는 영화 특유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친근한 이야기 전법이 장점이다. 한편 <달팽이의 별>은 소소하고 담담하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러브스토리로 회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