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토리텔링 기법에도 변화를
2013-01-08
글 : 김혜리
<라이프 오브 파이> 리안 감독의 생각

리안 감독이 <라이프 오브 파이>의 연출을 수락한 시점은 <아바타>가 세상에 나오기 9개월 전이었다. <아바타>의 감각적 충격을 맛보기 이전에 이미 리안은 3D라는 시각상의 확대가 영화적 스토리텔링 기법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짐작했고, 나아가 이 신기술을 예술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산업적으로 성사 가능성이 희박한 기획을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라이프 오브 파이> 개봉을 앞두고 2012년 11월5일 내한한 리안 감독은 풍랑으로 파이(수라즈 샤르마)가 탄 화물선이 침몰하고 날치떼가 갑판을 덮치는 신, 호랑이와 대치하던 파이가 맹수의 입에 생쥐를 던져넣는 신 등 클립을 영화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골라 3D로드쇼에서 한국 기자들에게 소개했다. 다음은 이튿날 이루어진 그와의 인터뷰에서 오간 3D영화에 관한 문답이다.

-영화 도입부의 매우 아름다운 타이틀 시퀀스에서 동물원의 동물들을 다분히 정적으로 보여준다. 3D영화의 도입부로서 예외적인 이미지들이다. 마치 “여러분 리안식 3D영화의 포인트는 이것입니다”라고 예고하는 것 같았다.
=알아봤다면 다행이다. 모든 이미지에 3D에 대한 코멘트가 들어 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소재는 인도산이지만 이 이야기에는 서구적 심지어 유대교적인 면마저 있으며, 모든 종교에 포함된 실낙원의 서사, 성장담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성장하려면 구원이 필요한데 이미 우리는 불완전하고 순수하지 않으니 어떻게 신에게로 돌아가고 외적, 내적 순수를 회복할 것이냐에 관한 물음이 있다. 그래서 나는 파이가 바다에서 잃어버린 폰디체리 동물원을 낙원으로 제시하고 바다에서 그것을 파이가 잃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타이틀 시퀀스는 파이가 사는 파라다이스를 그려낸 다음 각각의 개별 숏에 3D적인 포인트를 만들어넣은 것이다. 나로서는 3D가 새로운 요소였으니까. 예를 하나 든다면 곰은 볼륨감이 큰 3D로 찍은 사실적 세계지만 곰 뒤쪽의 그림은 평평하다. 2D도 심도는 있지만. 모든 동물 숏은 저마다 이유가 있다.

-2년 전 타이중 세트에서 프리비(previsualization: 3D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동영상 콘티)로 보았던 침몰장면이 결국 성공적으로 완성된 걸 보니 반갑다. 내한 프레스 로드쇼에서도 이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화물선 침몰 시퀀스가 <라이프 오브 파이> 중 연출자로서 가장 자랑스런 장면이라고 말하겠나.
=로드쇼에서 공개한 세 장면 모두 자부심을 느낀다. 2D로 찍었다면 절반도 효과적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영화는 하나의 정서적 여행이므로 궁극적으로 관객의 생각을 자극했느냐에 성패가 달렸다. 거기에서 실패한다면 도중에 뭘 했든 영화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기술적으로는 침몰 시퀀스가 가장 긍지를 느끼는 대목인 건 맞다. 동물 연기 일부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고, 만들기 까다로웠다. 자랑스러웠던 점은 우리가 동물을 동물로서 다루고 가능한 한 의인화를 피했다는 점이다.

-처음 <라이프 오브 파이>의 3D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바다 스펙터클을 제외하면 과연 이 이야기가 3D를 필요로 하는지 의구심이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3D를 통해 시각적으로만 한 차원을 더하는 게 아니라 스토리텔링에 한 차원을 더할 수 있으면 목표달성이라고 표현했다. 3D와 스토리텔링의 차원은 어떻게 연결되나.
=<라이프 오브 파이>는 스토리텔링의 의미를 검토하는 이야기다. 물론 ‘신을 믿게 만들어줄 영화’라는 광고 카피는 좀 허풍이다. (웃음) 어떤 영화나 책도 당신을 갑자기 교회 혹은 조직된 종교에 귀의하게 할 순 없다. 이것은 다만 이야기의 환각성, 입증할 수 없는 것을 믿게 하는 힘에 관한 영화다. 우리는 어째서 끝없이 이야기를 전하고 듣고 공유하는가? 이야기는 우리의 존재, 커뮤니케이션, 삶의 의미를 결정(結晶)시킨다. 영화는 이미지라는 환영에 의존하고 거기 기울이는 우리의 주의도 환각이지만 당신은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그 환각 안에 머무른다. 필름메이커들은 관객이 영화 도중 일어나 극장을 나가지 않도록 클라이맥스와 흥분을 넣고 능력이 닿는 모든 일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환각(illusion) 내부에서 환각을 돌아볼 수 있을까? 나는 그러기 위해 스크립트에 구조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나이 먹은 파이를 화자로 등장시키기로 했다. 원작을 읽으면서도 16살 소년의 목소리가 아니라 원숙한 사람의 내레이션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요컨대 파이는 1인칭인 동시에 3인칭인 것이다. 여기에 3D, 물의 표현, 미지의 대상을 그리는 새로운 시각적 흥분을 더하면 영화화가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만약 이 영화가 2D로 방향을 잡았다면 나는 연출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3D로 찍는 데에 더 든 돈은 2500만달러다. 보통의 문학 각색 영화라고 보면 가능하지 않았을 예산이다.

-뜻밖이다. 나는 스튜디오가 3D로 방향을 잡고 당신을 설득했을 거라 짐작했는데.
=보통은 그렇다. 필름메이커들은 3D를 주저하거나 불편해하고 스튜디오는 티켓 값이 비싸니까 3D를 원한다. 하지만 그건 대부분 액션영화고 어떤 스튜디오도 드라마틱한 아트영화나 문예물에 그런 제작비를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

-3D에 비판적인 평자들은 3D가 두눈의 초점을 강제로 맞추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몰입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3D는 이제 막 시작하는 기술이고 2D는 백년 넘은 역사가 있어 고도로 세련된 테크놀러지다. 같은 이유로 2D에 대해서는 더 알아야 할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 30, 40년간 새로운 건 없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3D는 영화언어로서 아직 고착되지 않았기에 창작에 있어서도 수용에 있어서도 흥미진진하다. 판단하기 이르단 소리다. 어쨌든 내게 3D는 새로운 예술 양식으로 보인다. 물론 장비가 더 발달하고 접근성이 높아져야 할 거다. 안경은 나도 질색이다. (웃음) 무엇보다 비용이 저렴해져서 젊고 독립적인 감독이 3D에 손을 댈 수 있는 날이 오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질 거라고 본다.

-인디 3D영화를 말하는 건가.
=그거다. 나는 드라마 표현에서 2D보다 3D가 뛰어난 면이 있다고 확신한다. 3D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공간의 볼륨에 피사체를 배치하는 일은 거의 스테이징(staging)이다. 더 높은 밀도와 폭넓은 거리감을 통제하게 된다. 매우 효과적인 극적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3D 연출이 편집이나 사운드 편집에도 끼치는 영향이 있나.
=사운드는 모르겠다. 음향은 스테레오로 진화한 지 오래니까 큰 변화는 없다. 요즘은 천장에서도 소리가 나와 관객을 둘러싸지 않나. 조금 있으면 극장 바닥에도 스피커가 매설될 것 같다. 그동안 2D에 익숙해진 나와 스탭들은 자꾸 3D영화라는 조건을 잊어 꽤 어려움을 겪었다. 조명의 경우, 아직은 큰 차이가 없지만 지금까지 없던 깊이와 그늘이 생겨남에 따라 앞으로는 방식이 바뀌리라 생각한다. 다만 나는 3D영화에서는 마스터 숏과 미장센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리라 예상한다. 몽타주는 그다음 자리일 거다. 그냥 개인적 생각이니 틀릴 수도 있지만 3D는 확실히 더 많은 시각정보를 담는다. 리허설에서 배우 연기에 만족했지만 컨트롤 부스에 돌아와 3D 모니터링하고 나면 다시 배우에게 가서 연기의 스케일을 줄여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빈번히 있었다. 프레이밍도 달라질 거다. 그러나 여태까지는 2D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장차 3D를 독자적인 미디엄으로 취급하게 할 변화들이 일어날 것이다. 렌즈의 선택과 화면심도의 관계, 상이 맺히는 평면이 결정되는 방식부터 다르니까. 3D에서는 스크린 가장자리가 소실되는 경향도 있다. 2D만큼 프레이밍이 똑 부러지지(solid)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2D도 현실이 아니긴 마찬가지다. 현재 3D에 관해 코멘트하는 사람들의 다수가 완벽히 기술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저런 주장을 하고 있으며 그래서 많은 언급이 불공평하거나 나태하다고 본다. 게으른 사고나 모호한 인상, 오랜 버릇에서 나온 판단이 많다는 소리다. 3D로 만들어진 훌륭한 영화들이 생각의 변화를 가져올 거다. 물론 그렇다 해도 어떤 이들은 끝내 3D를 좋아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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