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은 하정우의 감정 추이를 따라가는 영화다. 그가 연기하는 북한 비밀요원 표종성은 일명 ‘고스트’라 불리는 최고 실력파다. 당에 절대적인 충성을 서약한 그는 눈곱만큼의 허점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흔들림 없는 감정으로 살아온 그에게 시련이 닥친다. 결국 ‘첩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친형처럼 믿어온 상관과 목숨과도 같은 아내에 대한 불신이 싹트면서 최고 품질 기계의 매뉴얼에 균열이 생긴다. 그러면서 그 어디에도 조그만 흔적조차 남기지 않던 그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하정우가 말하길, 표종성의 정서는 바로 ‘무국적자’다. 정서적으로 영향을 준 영화들을 물었더니 손쉽게 상상할 법한 첩보영화들이 아닌 흥미로운 리스트를 댔다. 바로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2002)와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타인의 삶>(2006)이다. “베를린에 도착해서 그 공간의 느낌을 흡수하고자 애썼다. 표종성은 고향을 떠나 베를린에서 아내와 단둘이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제일 먼저 막연하게 떠올랐던 영화는 <피아니스트>다. 배경과 직업은 전혀 다르지만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는 그 쓸쓸한 고독이 닮았다. 두 번째는 <타인의 삶>이다. 밀고와 배신이 등장해야 할 이 영화에서 부부 극작가와 배우를 도청하던 비밀경찰은 결국 그들에게 감화받는다. 나 역시 시나리오의 표종성, 련정희 부부를 보면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멀리 베를린의 전경을 배경으로 홀로 서 있는 표종성의 이미지는 <베를린>의 핵심이다. 그래서 그런지 맥주의 본고장에서 술을 끊었다. (웃음) 나로서는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한 거다. 거의 매일 밤 9시나 10시에 잤다.”
배우들의 조합에 대해서도 물었다. 단지 대단한 배우들이 넷이나 모였다는 걸 넘어 풍기는 아우라가 범상치 않다. 이전에 다른 작품을 통해 호흡을 맞춘 적 없는 배우들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한석규 선배님은 술을 잘 안 드시고 혼자 계시는 걸 좋아하는 것 같고, 승범이나 지현씨도 풍기는 개성이나 인간미와 별개로 막 사교적인 사람은 아닌 거 같더라. 최민식, 김윤석 선배님 같은 분이 안 계신 관계로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 그런 게 없었다. 그런데 그 묘한 거리감이 바탕이 된 조합이 오히려 환상의 앙상블을 이룬 것 같다. 영화의 성격과 맞다는 생각도 들고.” 동시에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최민식에 이어 한석규와 호흡을 맞췄다는 것은 그에게 큰 자산으로 남았다. “배우를 처음 시작했던 얘기부터 지금 내 나이 때의 얘기까지,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눴다. 기억나는 것들을 다 시나리오에 메모해놨다. 빵집 테라스에서 단둘이 5시간 넘게 얘기한 적도 있는데, 아마 이런 게 해외 촬영의 특권 같은 거 아닐까. (웃음)”
이제 곧 <롤러코스터>로 감독이 될 그에게 자신의 연출작에 대해서도 물었다. <베를린> 촬영을 끝내고 4개월여 주어진 ‘방학’ 동안 뭘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영화를 찍자’로 결심한 것. 사실 매 영화를 끝내며 늘 똑같이 주어지는 휴가일 텐데 하필 왜 이번에 영화를 찍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을까. <베를린>에서 느낀 감흥과 여운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리라 손쉽게 추측할 수 있다. <롤러코스터>는 한류스타(정경호)가 탄 도쿄발 김포행 비행기가 예기치 않은 돌연변이 태풍에 휘말려 추락 위기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코믹 소동극이다. “원안의 주인공은 류승범인데, 실제로 나 역시 베를린에서 촬영을 끝내고 한국 돌아올 때 여러 번 취소되고 또 그전에도 무려 3번이나 착륙을 시도하다가 실패해 돌아간 경험이 있다. 쓰기 시작하니 미친 듯이 페이지가 넘어갔다. 소속사인 판타지오가 제작사로 나서고 <멋진 하루>와 <577 프로젝트>의 배우와 스탭들이 붙었고, 그리고 때마침 전역한 정경호를 캐스팅해서 대학 때 워크숍하는 기분으로 신나게 만들었다.” 하루를 열흘처럼 쓰기 위한 효율성을 위해 현장편집 기사를 2명이나 두고 매일 아침 7시에 집합한 강행군 끝에 이제 1차 편집본이 나왔다. <더 테러 라이브>를 끝내고 <군도>에 들어가기 전인 4월경 개봉이 목표다.
<씨네21> SNS를 통해 받은 독자들의 질문
-액션 연기가 힘들지 않았나요? <황해>와는 다른 ‘폼 나는’ 액션 같아요. _아오오니(미투데이)
=류승완 감독이 나더러 ‘액션하기 좋은 몸통’이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황해>의 ‘막싸움’과는 전혀 다른 컨셉이기 때문에 모든 걸 비우고 처음부터 지도받았어요. 주먹지르기부터 배우는 심정으로 차차 난이도를 높여나갔죠.
-‘먹방의 신’으로서 <베를린>에서는 어떤지?_밀크티(미투데이)
=련정희와 아침식사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야기상 밥이 잘 안 들어가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뭔가 좀 아쉬웠죠. 그래도 다른 장면들에서 분명 팬서비스는 있으니 직접 보시면….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