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치쿠 누벨바그의 기수, 일본 뉴웨이브의 전사로 불린, 전후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지난 1월15일 여든한살로 생을 마쳤다. 오시마는 프랑스의 장 뤽 고다르와 비교되며 일본의 고다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고다르는 영화가 먼저였고 그다음이 정치였지만, 오시마는 정치가 먼저였다. 세계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 위한 도구로 영화를 선택했던 60년대적 인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세계를 돌아본다.
오시마 나기사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은 <청춘 잔혹 이야기>(1960). 주인공인 기요시는 말한다. 화가 났다고. 세상 모든 것에 화가 났다고. 좋아하는 여고생 마코를 반강제로 범하고, 그녀를 앞세워 젊은 육체를 탐하는 중년 남자들을 폭행하고 돈을 뺏은 남자. 지난해 10월, 앞서 떠난 와카마쓰 고지 감독은, 17살에 집을 떠나 전국을 떠돌다 영화를 하게 된 이유를 “화가 나서”라고 말했다. 경찰 그리고 세상에 잔뜩 화가 나 있었다고. 그 시절, 그러니까 1960년대의 청년 오시마 나기사와 와카마쓰 고지는 이 세상에 화가 나 있었고, 그 울분과 열정을 영화에 쏟은 감독들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원하기에,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불태워버리는 영화로 치열하게 싸운 그들이 연이어 세상을 뜨고 나자, 그 불안하고 충동적인 60년대가 비로소 막을 내린 느낌이다.
오시마 나기사는 투사였다. 단지 일본만이 아니라 ‘국가’라는 구조 자체를 부정했고, 일본영화의 모든 전통을 뒤엎으며 조롱했고, 영화의 형식 자체를 재구성하려 덤벼들었다. “일본영화에 대한 나의 증오에는 확실히 일본영화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 오시마는 정제된 미학의 일본영화, 휴머니즘을 중시하는 일본영화 등을 힐난했다. 6살 때 아버지를 잃은 오시마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부정하면서, 굳건하게 자신만의 영토를 개척해갔다. 장 뤽 고다르는 <청춘 잔혹 이야기>야말로 진정한 누벨바그의 시작이라 찬양했고, 노엘 버치는 <백주의 살인마>를 에이젠슈테인의 <10월>에 견줄 만한 몽타주영화의 걸작이라 절찬했다. <감각의 제국> 이후 추락을 거듭한 오시마였지만, 그의 성취는 이미 60년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60년대의 종언과 함께 막을 내리고 거대한 화석이 되어버린 거인.
장 뤽 고다르와의 공통점을 묻는 질문에 오시마 나기사는 “첫 번째는 영화, 두 번째는 정치”라고 말했다. 그것은 공통점인 동시에 차이점이었다. 고다르는 영화가 먼저였고 그다음이 정치였지만, 오시마는 정치가 먼저였다. 오카야마에서 태어난 오시마는, 농림성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6살 때 사망하자 어머니와 함께 교토로 이주한다. 명문 교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오시마는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교토학생연맹의 위원장이 되기도 했다. 연극에도 관심을 기울여 ‘창조좌’라는 극단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졸업 뒤 오시마는 대학에 남으려고도 했고, 기자 시험을 치기도 했지만 모두 낙방하고 조감독 공채를 뽑는 쇼치쿠에 지원한다. 당시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들은 감독과 스탭, 배우 등을 직원으로 고용하는 시스템이었다.
오시마 나기사는 27살에 <사랑과 희망의 거리>로 감독 데뷔를 한다. 당시 일본 영화계는 철저한 연공서열 관행을 따랐기에 적어도 10년은 조감독을 해야 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시마가 이른 데뷔를 하게 된 이유는, 기성 감독들의 지시를 받고 열심히 일하는 조감독에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치열하게 시나리오를 썼고, 그 작품으로 감독 데뷔도 가능했던 것. 하지만 쇼치쿠 내부의 복잡한 사정도 있었다. 당시 경쟁사였던 도에이는 참바라영화(칼싸움이 등장하는 협객영화-편집자)로, 닛카쓰는 태양족 영화와 액션물로 인기를 끌었지만 쇼치쿠는 별다른 개성과 히트작 없이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쇼치쿠 대표였던 기도 도시로는 20대 후반의 조감독인 오시마 나기사, 시노다 마사히로, 요시다 요시시게 등을 대거 감독 데뷔시킨다. 과감한 선택은 적중하여 ‘쇼치쿠 누벨바그’라고 불리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지만, 닛카쓰의 스즈키 세이준처럼 영화사의 의도를 뛰어넘은 도발과 파격으로 60년대 중후반 오시마를 비롯한 젊은 감독들 태반이 쇼치쿠에서 나가게 된다.
<청춘 잔혹 이야기> <일본의 밤과 안개> 오시마 영화의 정수(精髓)
오시마 나기사의 데뷔작 <사랑과 희망의 거리>(1959)부터 삐거덕거리기는 했다. 제목은 오시마의 의도와 달리 ‘희망적’인 단어들로 채워졌고, 비극적인 결말 때문인지 슬그머니 허름한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그러나 1960년 오시마 나기사는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은 <청춘 잔혹 이야기>와 <태양의 묘지> 그리고 ‘정치영화’ <일본의 밤과 안개>를 만들면서 순식간에 ‘일본영화의 미래’로 떠오른다. 오시마의 ‘영화’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청춘 잔혹 이야기> 단 한편으로도 가능하다. 재미로 중년 남자의 차에 탔다가 겁탈당할 뻔한 여고생 마코를 대학생 기요시가 도와준다. 마코는 집을 나와 기요시와 동거하고, 기성세대와는 다른 그들만의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시하라 유지로가 주연했던 <태양의 계절> 이후 ‘태양족 영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차후 도쿄도지사이자 극우 정치인이 되는 이시하라 신타로의 소설에서 이름을 따온 ‘태양족’은 기성의 도덕과 질서를 거부하며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진 젊은 세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태양족은 그저 반항적인 제스처에 불과했다. 오시마 나기사는 ‘태양족’이란 허상을 비웃는다. 그리고 처절하게, 이미 세상에 패배한 자신들의 모멸감을 곱씹어댄다.
기요시의 친구는 미일안보조약을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하면서도, 숱한 여성들을 농락하고 버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기요시는 ‘화가 나서’ 중년 남자들을 폭행하며 돈을 뺏고, 형수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 마코의 언니는, 마코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한다. 젊을 때 학생운동에 참여했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찾아 돌아섰던 마코의 언니는 한때 연인이었던 의사 아키모토를 찾아간다. 공산당 활동가였던 그는 여전히 가난한 이들을 진료해주고 있지만, 주변의 동지들은 모두 떠나갔고 불법 낙태수술로 겨우 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들 역시 세상을 바꾸려 했고, 그럴 수 있다고 믿었던 세대였다. 하지만 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서로를 상처 입히며 떠나갔다고 아키모토는 말한다. ‘세상은 잔혹했고, 사랑은 끝났어.’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맞선’ 마코의 싸움은 조금 다르지만, 그 역시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자 기요시는 답한다. “우리는 달라. 우리는 꿈이 없으니까, 당신들처럼 되지 않을 거야”라고.
<청춘 잔혹 이야기>는 패배의 만가다.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패배를 직감한 싸움. 경찰에 잡혔다가 거짓으로 반성을 하고, 형의 돈을 받아 빠져나온 마코와 기요시는 허청거리며 거리를 걸어간다. “너를 지켜줄 수가 없어.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도구가 되거나, 몸이라도 팔아야 해. 혼자든 함께든 같아. 우린 실패할 거야. 실패할 거라면 혼자가 나아.” 그 말을 남기고 기요시는 떠난다. 그리고 기요시와 마코는 각각 다른 장소에서 쓸쓸하게, 홀로 죽어간다. <청춘 잔혹 이야기>의 도입부에는 한국의 4.19 시위 영상이 삽입되어 있다. 대통령을 끌어내린 민중의 힘. 오시마는 한국의 4.19를 보며 무엇을 꿈꾸었을까? 우리도 지배자 혹은 천황을 끌어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청춘 잔혹 이야기>를 보면, 아마도 반대였을 것 같다. 우리는 불가능해. 이미 우리는 패퇴했고, 홀로 고독한 싸움을 펼치다가 외롭게 죽어갈 거야, 라고.
<복수는 나의 것>의 이마무라 쇼헤이는 자신이 농부라면, 오시마 나기사는 사무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마무라는 매춘부, 농민, 범죄자, 예인 등 사회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정치적인 발언보다는 그들의 생명력 자체를 파고들었다. 반면 오시마는 결연하게 사회의 시스템에 대해 직접적인 발언과 공격을 감행했다. 적을 향한 칼을 들고 싸운다는 점, 자신이 믿는 사상이나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운다는 점에서 오시마는 사무라이였다. 하지만 그에게 주군은 없었다. 장 르누아르의 “나는 영화라는 공산주의 국가의 시민이다”라는 말을 사랑한 오시마는 주인 없이 아니 주인을 부정하고 떠도는 낭인에 가까웠다.
<일본의 밤과 안개>는 안팎으로 오시마 나기사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영화다. 한 결혼식에서 각각 신랑과 신부의 친구들인, 구좌파와 신좌파가 모여든다. 그리고 50년대의 투쟁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격렬하게 이루어진다. 단지 내용의 파격만이 아니라, 한 숏에서 과거와 현재를 접합하거나 조명만으로 인물을 교체하는 등 사진, 연극, 영화의 형식들을 뒤섞으며 혁신적인 ‘정치영화’를 만들었다. <일본의 밤과 안개>는 3일 만에 극장에서 내려졌고, 오시마는 격노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상황은, 영화가 내려진 뒤 실제 오시마의 결혼식에서 벌어졌다. 피로연이 열린 자리에서 오시마를 비롯한 하객들이 쇼치쿠를 성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쇼치쿠의 간부들이 즐비한 자리에서 벌어진 소동은 마치 <일본의 밤과 안개>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얼마 뒤 쇼치쿠는 그들이 기회를 주었던 젊은 영화인들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오시마는 “난 포기하지 않는다.… 일본영화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격문을 쓰고 쇼치쿠를 퇴사하여 조감독, 시나리오작가 등과 함께 영화제작사 ‘창조사’를 설립한다.
저널리즘 정신이 담긴 <잊혀진 황군> <교사형>
한 독특한 형식으로 담아낸 <윤복이의 일기>(1965), 좌절된 미래에 짓눌려 살인마가 된 남자를 통해 압도적인 성과 폭력을 그려낸 <백주의 살인마>(1966),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사형당한 재일동포 학생의 실화를 그린 <교사형>(1968) 등 오시마의 영화는 국가를 위시한 모든 ‘아버지’를 부정하고 전통적인 형식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증명하려 했다. ATG와 함께 1천만엔 영화의 첫발을 내디딘 영화 <교사형>에서 오시마는 블랙코미디, 다큐멘터리, 판타지를 뒤섞으면서 단지 일본이 아니라 ‘국가’의 죄를 묻는다. 그의 형식 파괴는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과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한 필연적인 그릇이었다. 오만하고, 불손하고, 자기 파괴적인 욕망에 시달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힘. 그 힘은 와카마쓰 고지, 이마무라 쇼헤이와 일맥상통하지만 각자 구현하는 방식은 현저하게 달랐다. 그들 중에서 오시마는 가장 위태로웠고, 그의 투쟁은 실존주의적인 방황에 가까웠다.
한때 기자를 지망했던 오시마 나기사는 자신의 작업에서 저널리즘의 정신을 결코 잊지 않았다. <잊혀진 황군> 등 사회적 이슈를 파헤치는 TV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재일 조선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잊혀진 황군>은 전후에 한국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로 일본과 한국 어디에서도 보상을 받지 못한 상이군인들의 이야기였고, <교사형>은 억울하게 죽어간 조선인 학생을 통해 일본 내에 아웃사이더로 존재하는 ‘재일 조선인’을 들여다본다. “우리에게 재일 조선인은 거울과 같은 존재다… 추한 일본인의 모습을 재일 조선인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추어 봄으로써 일본인들도 조금은 인간적으로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 여름날의 누이>(1972)를 끝으로 오시마 나기사는 창조사를 해체한다. 1972년 2월, 일본 전공투 운동의 몰락을 상징하는 아사마 산장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은 1960년대의 화려한 자살이었다. 이후 오시마는 외국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탐미주의와 실존에의 도피이기도 했다. 1936년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베 사다 사건을 소재로 한 <감각의 제국> (1976)은 프랑스 자본으로 제작되었고, 실제 성기가 드러나는 성애장면을 촬영한 뒤 바로 프랑스로 필름을 보내 현상, 편집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성기는 물론 음모조차 보여줄 수 없는 당시 일본에서는 파격적인 도발이었고, 재판에도 회부되었다. 오시마는 “두 남녀의 섹스는 사회적 속박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필연적인 충동”이라고 말했지만, <감각의 제국>은 어떤 열정보다는 도피에의 충동이 압도적인 영화였다. 사회적 긴장이 아니라 개인의 끝없는 추락을 보여주는. 칸에서 감독상을 준 <열정의 제국>(1978)도, 데이비드 보위와 비트 다케시가 출연한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1983)도 씁쓸한 범작이었다.
1996년 런던 히드로공항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뒤에도 <고하토>(1999)를 만들었지만 오시마의 필모그래피에서 더이상 전진은 없었다. 일본과 프랑스에서 문화훈장을 받고, 2006년에는 영화저작권이 왜 감독에게 없는지를 문제 제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란 무엇인가>에 등장하여 여전히 혈기어린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일본영화감독협회 70주년 기념식장에 전 이사장 신분으로 단상에 오른 뒤 더이상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2013년 1월15일 폐렴으로 사망.
70년대의 화려한 추락, 마지막 싸움터는 섹스
오시마 나기사는 뼛속까지 60년대적인 인간이었다. 정치적인 운동의 일환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임무를 다했다. 그러면서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청춘 잔혹 이야기>에서 털어놓듯, 그들은 이미 꿈이 사라진 세대였다. 꿈이 사라졌기에 더욱 격렬하게 싸우고, 한줌의 희망을 움켜쥐려 질주했지만 70년대가 되면서 화려하게 추락한 그들. <감각의 제국>과 <열정의 제국>에서 보여준 개인적 쾌락과 열정에 대한 퇴폐적인 찬미는, 어쩌면 오시마가 유일하게 성역이라 느낀 부분일 수도 있다. 아키모토가 말하듯 예정된 패배이지만, 유일하게 다른 유형의 근원적인 싸움으로서. 집단, 조직이 패배한 시대에 개인이 덤벼들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싸움터는 어쩌면 섹스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60년대가 닫히면서 이미 오시마 나기사는 텅 비어버린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생명력을, 오시마는 볼 수 없었다. 그조차 오시마에게는 관념의 아수라장이었으니까. 그 관념조차 낡아버린 시대에, 우리는 어떤 꿈을 꿀 수 있을까. 이제 어떤 영화가 우리에게, 박제가 되어버린 꿈을 보여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