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스타일로 구분하면 이시영은 아웃복서, 정두홍 무술감독은 인파이터다. 아웃복서는 상대 선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유효한 타격을 노리는 스타일이다. 보통 리치(주먹이 닿는 거리. 팔이 길수록 리치가 길다)가 길고, 계속 움직여야 하는 까닭에 지구력이 좋은 선수 중에 아웃복서가 많다. 반면 인파이터는 상대 선수에 바짝 달라붙어 저돌적으로 게임을 풀어가는 스타일이다. 맷집이 좋고 하체의 힘이 강하며 강력한 펀치를 가진 선수 중에 인파이터가 많다. ‘아웃복서’ 이시영과 ‘인파이터’ 정두홍이 매치업을 가졌다. 물론 사각의 링 위는 아니다. 지나친 비유일지도 모르겠지만 처음 만난 둘의 대화는 그들의 복싱 스타일과 무척 흡사해 보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각각 무술감독, 주연배우로 작업한 <베를린>과 <남자사용설명서>는 2주 간격으로 맞붙는다(<베를린>은 1월29일 개봉했고 <남자사용설명서>는 2월14일 개봉예정이다).
정두홍_오늘(1월28일) 인천시청 복싱팀 입단 소식을 듣고 매우 부러웠다.
이시영_감사하다….
정두홍_무엇을 하든 처음 시작할 때 공포감이 가장 먼저 든다. 링 위에서는 특히 그렇고. 그런데 이시영씨의 시합 영상을 보니 공포심을 안 느끼는 것 같더라. 그게 참 멋졌다.
이시영_몇번을 물어봤다. <남자사용설명서> 프로모션 기간이라 이 인터뷰를 하는 건지, 아니면 감독님께서 정말 저를 만나고 싶어서 이루어진 건지 말이다.
정두홍_정말 궁금하고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복싱 얘기는 불편한가.
이시영_아니. 그런 것보다 간혹 의도와 다르게 기사가 나갈 때가 있었다. 가령, “다치면 어떡해요?”라는 질문에 “조심해야죠. 저라고 안 무섭겠어요”라고 대답을 하려다가도 그런 생각이 든다. 동료 선수 역시 똑같은 두려움을 안고 링에 올라가는 건데, 나라고 다를 건 없지 않나. 그래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싶다가도 그렇게 대답을 못하겠더라.
멋지다, 한두번 하고 관둘 줄 알았다
정두홍_편하게 하자. 이제는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시영씨의 진정성을 알 것 같다. 한두번 하고 관둘 줄 알았는데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멋지게 보이더라. 8년 전 나도 도전을 했었다. 나는 6개월 정도 준비하고 시합에 나갔다. 시합 직전 마지막 스파링 때 상대 선수의 주먹에 맞아 코가 깨졌다. 상대 선수를 데리고 있던 관장님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 무술감독이라고 복싱을 우습게 봤다는 거야. 난 열심히 했는데 말이다. 시영씨도 열심히 하는 거잖아. 무언가를 좋아하고, 열정을 가진다는 건 가식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시영_진짜 신기하다. 사람 일은 모른다고. MBC <베스트극장> 단막극에서 복싱 선수를 맡으면서 복싱을 시작하게 됐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복싱을 지금까지 계속할 줄 몰랐다. 사실 배우로서, 복싱 선수로서 모두 남들에 비해 늦게 시작했다.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다보니 더욱 열심히 하고, 간절해지는 것 같다.
정두홍_지난해 치렀던 경기 영상을 봤다. 앞손(가드하는 손이 아닌 공격하는 손)을 잘 안 쓰던데.
이시영_공격은 무조건 앞손으로 해야 한다. 지금은 많이 좋아진 거다. 예전에는 거의 안 썼다.
정두홍_왜 안 썼나.
이시영_힘이 없었다. 힘들어서 안 쓰다 보니까 나중에는 버릇처럼 진짜 안 쓰게 되더라. 지금은 시합 나가기 전에 앞손 쓰는 연습부터 한다.
정두홍_가드 내리기 힘들어서 그런 건가.
이시영_정말 손에 힘이 없었다. 그러니까 아직 복싱 선수로서 멀었다. 최근 열렸던 제66회 전국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겸 2013년 국가대표 선수 1차 선발대회를 준비할 때는 앞손 연습밖에 안 했다. 관장님도 가드를 일부러 못 쓰게 하고. 스텝이 많이 좋아지면서 이렇게 실력이 느는구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발 모두 피로골절 판정을 받으면서 시합 때 스텝을 거의 밟을 수가 없었다.
정두홍_테이핑은 안 했나.
이시영_아마추어는 안된다. 보이지 않으면 된다고 해서 테이핑을 한 뒤 긴 양말을 신고 링에 올랐다. 대회사 끝나고 깁스를 한 뒤 한달을 쉬었다. 쉬고 나니까 왼발은 다 나았다.
정두홍_(오른발에 냉찜질을 하고 있는 이시영을 보며) 오른발은 아직도 아픈가.
이시영_오른발은 아직 통증이 심하다. 다리만 안 아프면 아무 걱정도 없을 것 같다. 사실 뛰는 걸 되게 좋아한다. 원래 하루도 안 쉬고 뛴다. 한국체육대학교에서 뛰는데, 학생들 눈에 안 띄려고 관장님과 함께 더 일찍 나간다. 보통 새벽 4, 5시에 가서 뛴다.
열정에는 가식이 없는 법이다
정두홍_이제는 주변 사람을 의식하지 마라. 연기할 때 주위를 의식하지 않잖나. 똑같은 거다.
이시영_지금 여러 기사에는 열심히 한다, 뭐뭐 할 계획이라고 나와 있는데 사실 다리 때문에 몇달 못 뛰었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불안하다. 홍화씨가 뼈에 좋다고 해서 주문해서 먹었는데 소용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 다른 홍화씨를 주문했다.
정두홍_국산?
이시영_원래 먹었던 것도 국산이었다. 인터넷에 보니 국산이라 표기되어 있어도 대부분 중국산이라는 거다. 오늘은 감을 믿고 진짜 국산처럼 보이는 홍화씨를 주문해봤다.
정두홍_가시오가피도 뼈에 좋다. 내가 구해줄 수 있다.
이시영_정말? 구해달라.
정두홍_알겠다. 구하면 보내주겠다. 나 역시 그런 걸 많이 복용한다. 순발력, 점프력이 젊은 친구들에 뒤처지지 않아야 해서. 올해 마흔여덟살이라 관리를 해야 한다. 또, 간이 피곤하면 안된다. 간이 피곤하면 근력이 약해진다. 간이 좋으면 혈액순환이 잘되고, 그래야 운동할 때 근육이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 시영씨는 힘이 좋을 줄 알았는데 힘이 없다고 하니까 파워 훈련을 좀 챙겨야 할 것 같다.
이시영_힘이 없다는 건 핑계다. 힘은 좋은 편이다. 시합할 때 보면 어깨에 힘이 어찌나 많이 들어가는지. 거기 올라가면 힘이 안 들어갈 수가 없다.
정두홍_나 역시 프로 데뷔전 때 죽는 줄 알았다. 공이 울린 뒤 정확하게 15초 만에 코를 맞은 거다. 코가 깨진 지 이틀밖에 안 지났으니까. 너무 아파서 상대 선수를 빨리 끝내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 막 몰아치다가 결국 제 풀에 지쳤던 기억이 난다. 그때 체중을 11kg이나 뺀 뒤 나선 시합이라 더욱 힘들었다. 계체량 통과한 뒤 설렁탕만 먹었고. 시영씨는 뭐 먹었나.
이시영_아마추어는 계체량이 끝난 뒤 바로 시합에 나선다. 프로는 체중 재면 시합까지 하루가 남잖나. 그때 많이 먹으며 근육을 키우잖나. 반면 아마추어는 계체량 때 나온 체중 그대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시합을 이겨도 진이 빠진다.
씨네21_스타일이 아웃복서더라. 그건 본인의 체형에 맞아서 택한 건가, 아니면 훈련을 하면서 관장님이 그렇게 정해준 건가.
이시영_다른 선수들에 비해 키가 크고 리치가 긴 까닭에 아웃복싱을 하는 게 당연한 것 같다.
정두홍_나는 인파이터다. 잘 못 참는다. 원래 인파이터는 밀어붙이는 성격의 소유자가 많고, 아웃복서는 여유가 있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주로 택한다.
이시영_나 역시 처음에는 인파이터 스타일을 배웠다. 그런데 그게 도움이 안되더라. 신장이 큰 만큼 근육량이 적기 때문이다. 내 거리 안에서 풀어나가는 게 편하더라.
씨네21_시합 도중 상대 선수를 앞에 두고 가드를 종종 내리더라. 이유가 뭔가.
이시영_때로는 가드를 내리는 게 더 위협적이다. 가드를 내리면 상대 선수가 더 공격을 못한다. 물론 계속 내리고 있으면 막 들어오지. 요즘은 경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정두홍_관록이 쌓이면 지금보다 더 잘할 것 같다.
이시영_그럴 시간이 없다. 빨리 적응해서 시합을 뛰어야 한다. 감독님에게 궁금한 게 많다. 평소 스턴트 액션에 대한 로망이 있다. KBS 드라마 <포세이돈>(2011)에 출연할 때 대역을 안 쓰고 배우가 직접 하는 게 가장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감독님이 대역을 쓰자고 할 때 직접 하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가서야 내가 하는 게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두홍_재미있는 얘기를 해주겠다. 현재 할리우드영화 <라스트 나이트>(The Last Knights)를 프라하에서 촬영한 뒤 어젯밤에 한국에 도착했다. 극중 주연배우의 스턴트 더블을 맡았다. 지난해에 찍다가 올해 오랜만에 다시 만나 5회차를 찍은 거다. 이 친구가 그동안 쉬면서 운동을 안 했거든. 칼을 쓰는 액션인데, 이 친구가 걱정을 많이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다. “나 못 믿어? 저번에 내가 멋지게 보여줬잖아. 영화는 CG도 있고, 대역도 있어. 대신 네가 악당과 맞붙으려면 사자처럼 보여야 해.” 그래서 내가 뒷모습으로 찍고, 그 친구가 앞모습을 찍은 뒤 편집으로 붙였더니 모든 스탭들이 놀라워했다.
이시영_<포세이돈> 찍을 때 차를 빠른 속도로 운전하는 장면 등 액션장면이 무척 재미있었다. 언젠가 액션영화를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스턴트 액션도 미리 준비하고, 오토바이 면허증도 따놔야겠다 싶었다. 애크러배틱 운동도 따로 배우고.
배우란 액션이란 그리고 배우에게 액션이란
정두홍_부탁인데 절대 면허증도 따지 말고, 애크러배틱 운동도 배우지 마라. 애크러배틱은 어릴 때 하는 거다. 내가 시영씨 매니지먼트사라면 100% 반대할 거다. 왜 그런 줄 아나? 시영씨가 직접 액션 연기를 하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시영씨도, 영화도 모두 피해를 본다. 배우로서 시영씨가 해야 할 부분은 연기를 하면서 매력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폭력물을 폭력물이라 부르는 걸 싫어한다. 내 직업이니까. 지난 25년 동안 항상 이 사람을 어떻게 때려야 할지, 죽여야 할지만 생각해왔다. 어떤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한잔 마신다 치자. 그때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아나? 처음에는 경치 좋다,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다른 생각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어떻게 싸우다가 주인공이 어떻게 살아나고, 건물 위에서 떨어지던 중 이런 지형지물을 이용해 걸리게 하면 되겠다, 뭐 이런 생각 말이다. 그게 정서적으로 매우 안 좋다. (웃음) 배우 역시 마찬가지다. 배우도 어떤 역할에 집중하다보면 그 캐릭터로 변하잖나. 다음 역할을 위해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는 정신과 관련한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는데 아직 우리나라는 그게 부족한 것 같다. 어쨌거나 배우로서 매력을 보여주는 게 액션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시영_스턴트 액션을 직접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완벽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다. 액션의 기본 정도만 알고 있으면 편할 것 같더라. 여유만 있다면 감정도 함께 실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정두홍_액션 합이 아무리 복잡하고 많아도 하나만 집중하면 된다. 내가 때려야 할 사람.
이시영_그런 집중력도 어느 정도 몸에 배어 있어야 가능한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움직여서 저렇게 때리는 합만으로도 벅차니까.
정두홍_아까 말한 드라마에서 처음 액션을 한 건가? (이시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요령이 생길 거다. <남자사용설명서>에는 액션이 없나.
이시영_액션…. 나는 로맨틱코미디 장르를 많이 찍어왔다. <남자사용설명서>도 로맨틱코미디고. 이번 영화에는 때리는 장면이 있다.
정두홍_액션?
이시영_액션이라기보다 그냥 때리는 거. (웃음)
정두홍_큰일났네. 이시영씨가 그냥 때리는 거라면…. <베를린>과 2주 간격으로 개봉하는데, 한주만 미뤄주라. (일동 폭소)
이시영_<베를린>은 어땠나?
정두홍_엄청 힘들었다.
이시영_아직 못 봤다. 시사회에 초대받았는데 그날 우리 영화 홍보하느라 시간이 없어 보지 못했다. 엄청 보고 싶은데.
정두홍_나도 시영씨 영화 꼭 볼 거다. 영화하는 사람은 돈 주고 봐야 한다. <남자사용설명서>는 뭐가 힘들었나? 액션영화가 아니라 몸이 근질근질했을 텐데.
이시영_<남자사용설명서>는 밝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라 찍는 동안 액션이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은 안 들었다. 최근 남자를 만나본 적이 거의 없는, 지질한 CF 조감독 최보나(이시영)가 남자사용설명서를 우연히 얻는다. 처음에는 어설프게 써먹다가 나중에 완벽하게 설명서를 숙지하게 된다. 결국 남녀간의 사랑에 그런 설명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영화다. 연애에 미숙한 주인공 보나, 연애의 기술을 조금씩 알아가는 보나, 멋지게 변한 보나 등 단계별 보나의 모습을 각각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정두홍_말만 들어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나중에 무술감독으로 복싱영화를 하게 된다면 꼭 시영씨와 함께 하고 싶다. 훈련이 필요없을 것 같다.
이시영_엄청나게 영광스러울 것 같다. 그래도 열심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정두홍_아니다. 훈련 없이 카메라를 시영씨 앞에 대놓고 찍기만 하면 된다. 테크닉은 중요하지 않다. 액션은 아파야 하잖나. 아픔은 결과인데, 결과 앞에 들어가는 과정은 정말 아파 보이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관객은 그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시영씨는 복싱을 해봤으니까 아주 자연스러울 것 같다. 꼭 복싱영화로 만나자.
이시영_작은 역할이라도….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