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면 김민희 없는 <화차>(2012)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가 연기한 강선영은 비밀을 간직한 위태로운 여자였고, 위태로운 만큼 감싸주고 싶은 여자였다. 김민희의 얼굴은 강선영의 아슬아슬함이었고, 그것이 곧 <화차>의 긴장감이었다. 김민희도 <화차>가 자신의 경력에서 의미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강선영을 선뜻 내려놓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화차>가 끝난 뒤 세고 어려운 영화를 다시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러나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저마다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니 어느 순간 <화차>를 떠나보낼 수 있었어요.” 마침 <화차>와 전혀 다른, 말랑말랑한 연애담 <연애의 온도>의 ‘영’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행원 영은 사내연애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중이다. 직장 동료들 몰래 3년간 사귄 남자친구 동희(이민기)와 헤어졌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싫지만 출근하면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게 사내연애의 비참한 말로다. 동료들의 수군거림도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다. 게다가 전 ‘남친’의 페이스북에 몰래 접속해 발견한 그의 새 ‘여친’의 메시지도 영의 신경을 박박 긁어놓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가 다시 만나잔다. 가만있자, 사내연애가 아니더라도 이런 연애 후유증, 익숙하지 않은가. 딱 나와 당신들의 연애사다. 김민희 역시 시나리오를 읽고 난 뒤 자신의 연애사를 들킨 기분이었을 것이다. “큰 사건은 없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내용이었어요. 헤어진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며 다시 만나는 것도 재미있었고, 이야기 사이에 두 남녀의 인터뷰가 불쑥 끼어드는 것도 신선했고. 쉽고 가벼운 내용인데, 보고 나면 공감되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았어요.”
알랭 드 보통이 쓴 연애 에세이가 그렇듯이, <연애의 온도>는 영과 동희의 연애를 통해 두 남녀의 관계와 감정 그리고 행동을 고찰한다. 장르영화 속으로 들어가 캐릭터 연기를 해야 했던 전작<화차>와 달리 이번 작업은 “영화적 장치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보여줘야” 했다. 처음에 “다른 인물이 되는 것보다 실제 모습 중 일부분을 끄집어내는 게 훨씬 만만할 거라 판단”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활자로 설명된 영의 지문과 대사에 생명감을 부여하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화차>는 겁을 많이 먹고 시작했지만 막상 길이 열리는 순간부터 작업하기가 쉬웠어요. 반면 이번 영화는 길이 너무 많은 거예요. 시나리오를 읽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처럼 어떤 시퀀스에서 어떤 느낌으로 대사를 하느냐에 따라 감정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는 이야기니까요. 그게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무엇보다 헤어진 커플이 영화의 설정인 만큼 상대배우인 이민기와 친해지는 게 급선무였다. 촬영 전 두 사람은 <블루 발렌타인>을 함께 보았다. “영화의 주인공 라이언 고슬링과 미셸 윌리엄스가 촬영 전 함께 살면서 배역을 준비했다는 얘길 나눴어요. 우리도 3년이 넘은 커플의 ‘포스’가 나려면 그렇게 준비해야 한다 그랬죠. (웃음)” 두 사람이 선택한 건 합숙, 은 아니고 수시로 만남을 가지는 것이었다. “자주 만났어요. 대화도 많이 나눴고요. 첫 촬영부터 둘이 싸우는 장면이었는데, 그거 찍고 나니까 촬영이 진행될수록 편해지더라고요.” 그 덕분일까. 영화에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심한 욕을 할 정도로 싸우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자장면을 먹는 두 사람은 여느 평범한 커플과 다를 바 없었다. 평범하지만 고집스러운 캐릭터인 만큼 에너지 소모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장면을 공감하며 찍었다는 점에서 <연애의 온도>는 김민희에게 “표현하려는 욕심이 많았고, 그만큼 즐거운 작업”이었단다. “재미있게 작업했으면 그걸로 됐어요. 다음 작품요?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다만, 쉬지 않고 열심히 하고 싶어요.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없어요. <화차> 같은 무겁고 힘든 작품이 들어오더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즐겁게 도전할 거예요.” 실제 자신의 상당 부분을 드러낸, 김민희의 민낯부터 일단 확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