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아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세요?’라고 되묻는 표정. 이민기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얼굴이다. 어리둥절한 표정 연기에 있어서 이민기는 독보적이다. <해운대> <퀵> <오싹한 연애>에서 철딱서니 없거나 범상치 않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을 때의 그 얼굴들을 떠올려보자. <연애의 온도>에서도 이민기는 곧잘 그런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 표정이 이민기를 아니, 이동희를 결코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연애의 온도>에서 이민기는 여자친구 영(김민희)과 엮이기만 하면 감정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않는 남자 동희를 연기한다. 동희는 3년 동안 사귄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해방감을 느끼지만 금세 보고 싶다고 징징댄다.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쪼잔하게 복수를 감행하고, “홧김에”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는 충동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그게 다 영이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민기는 자기감정에 충실한 동희를 적극적으로 두둔했다. “재고, 계산하고, 뒤에서 찌르는 것보다는 솔직한 게 낫잖아요.” 그러면서 의상팀의 여자 스탭과 나눈 대화 한 토막을 들려준다. “전 동희가 한편으로 멋지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의상팀 스탭한테 물어봤는데, 서로 딴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동희, 정말 이런 애 없지?’ ‘그런 애 없죠.’ ‘죽이지?’ ‘네, 정말 최악이에요.’ (웃음)”
이민기는 <연애의 온도>의 “사실적 정서”가 자신을 움직였다고 했다. “분명 큰 사건이 없죠. 기승전결이 확실히 있는 게 아니고 공식이 분명한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책을 읽는 동안 두 인물의 감정을 죽 따라가게 되더라고요. 어느 순간 인물들과 공감하게 되는 거죠. 같이 화내고, 같이 웃고. 그 꾸밈없는 감정들이 사실적으로 전달돼서 오히려 신선했어요.” 꾸밈없다는 점에서 이민기와 <연애의 온도>는 닮았지만, 사실 이민기는 자신과 한참 동떨어진 인물을 연기해야 했다. 이민기는 살면서 첫사랑 때를 제외하곤 연인과 싸워본 적이 없으며, 헤어졌다 다시 만난 적도 없다고 한다. “(연애하면서) 나쁜 감정들은 안 쓰려고 했던 것 같아요. 화나고, 밉고, 성질난다고 쳐요. 그런 감정으로 왜 만나요. 그냥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섭섭한 게 생기면 미안하다, 신경 쓸게, 그렇게 사과하고 상대가 이해해주면 끝나는 거잖아요. 거기서 사과 안 받아주고 싸움 거는 사람은 안 만나야죠. 안 그런가? 그런데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번 작품 하면서 정말 연애를 한번 해본 것 같은 기분이 드나봐요.”
영화에서 빠져나온 이민기는 ‘연애’의 온도가 아니라 ‘삶’의 온도 변화를 체감하고 있는 중이다. 스물아홉살이 된 그는 “20대 초반에 가지고 있던 에너지들이 조금 없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 때는 정말 내일의 해가 뜨는 게 기뻤고, 자전거 타고 달리면서 음악 듣는 것 그 하나하나가 너무 좋았는데 지금은 그때의 감정을 회상하면서 ‘날씨 좋네, 자전거 타고 음악이나 좀 들을까’ 하는 거죠. 그러면 스스로 위안이 될까 싶어서.” 스물아홉의 이민기는 감동적인 순간을 찾아 떠나는 것을 즐겼던, 조금은 충동적이었던 스무살 시절의 이민기가 그리운 눈치였다. 최근의 감정상태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이민기는 무릎을 탁 치며, 요즘 자신의 행복지수가 그렇게 높지 않은 데에 다자이 오사무의 책들이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이민기의 가슴속에 아직 뜨거운 불덩이가 들어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그는 차기작(아직 제목을 밝힐 수 없다고 한다) 준비로 규칙적인 생활에 돌입했다. 매일매일 무술팀과 함께 운동도 하고 있다. 그 덕에 여가시간을 가질 짬이 없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뜨거워지기를 고대하며 주어진 일에 매진하는 이 시간이 결국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