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소녀시대
2013-03-22
글 : 김혜리

*2월21일 일기에 <스토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등장했던 동네 슈퍼와 여관이 각각 편의점과 모텔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서울 시내치고 오래 한결같았던 두곳이 마치 영화에 담겼으니 이제 됐다는 듯 사라져버렸다. 거리는 변했지만 하굣길로 쏟아져 나온 여학생들은 다들 해원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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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씨에게.

해원아, 라고 불러보까 했지만 만약 홍상수 감독이라면 당신에게 존대를 할 것 같다는 짐작에 해원씨라고 쓰기로 합니다. “외롭고 슬프다가 무서워졌다”고 당신이 정리한 꿈과 산책을 따라가는 동안 해원씨가 여러 번 딱하고 예뻤습니다. 아니, 딱해서 예뻤고 예뻐서 딱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맨 처음 예뻤던 건 ‘해원’이란 이름이었어요. 저처럼 흔한 ‘혜’자가 이름에 든 여자는 ‘해’자가 가진 의연함과 아득히 푸른 기운을 동경하곤 합니다. 그렇게 남다른 이름을 궁리해 붙여준 부모라면 딸에게 유난스러울 것도 같은데, 해원씨는 영화 내내 고아처럼 보이더군요. 하지만 그래서 부쩍 정답기도 했어요. 제인 에어, 빨간 머리 앤, 알프스 소녀 하이디,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 소공녀 세라… 여자들의 어릴 적 상상 속 친구들은 어찌 된 노릇인지 죄다 고아 소녀들이잖아요. 몇년 만에 만났다는 어머니랑 당신이 서촌에서 반나절 다정하게 나들이 다니는 걸 보는데, 이상했습니다. 어머니랑 해원씨가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당신이 누구와도 단단히 연결되지 않은 사고무친(四顧無親)한 처지라는 사실이 마음에 점점 선연하게 사무쳤거든요. 차라리 부모에 관한 언급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당신이 고독한 사람이라는 걸 절감하지 못했을 거예요. 멀리 캐나다로 떠난다는 어머니가 딸인 당신에게 남긴 약속은 고작 “앞으로 맨날 널 생각할게”가 다였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해원씨는 “나중에 내가 꼭 엄마를 책임질게”라고 짐짓 장담하죠. 당신이 어머니에게 선물로 마련한 보이차를 건네면서 좋은 것이라고 강조하는 대신 “이거 나쁜 거 아니야”라고 깎아서 말하는 말투도 예쁜데 가련했습니다. 체념과 친해진 나이 든 여인의 말씨잖아요. 그렇게 담담히 굴다가 불쑥불쑥 영혼을 팔겠다는 둥 난 악마라는 둥 응어리를 모아 뱉는 극언을 던지니 더 예쁘고 더 가련할밖에요.

해원씨처럼, 저도 꿈을 깬 줄 알았는데 꿈이 계속되는 겹꿈을 꾸곤 합니다. 돌아보면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들을 제압할 만큼 세지 못해 심중이 복닥거리는 날, 깨어나기 끔찍해 가능한 한 오래 잠 속에 뭉그적거릴 때 그런 꿈을 꿨습니다. 현실로 돌아오고 나면 내 꿈에 왜 그런 사람들이 나왔는지, 어째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속내가 스스로에게 뻔해 남사스럽고 처량합니다. 하물며 남의 꿈을 구경하는 일은 마음의 누드를 엿보는 것 같아 영화를 보며 미안스러웠습니다. 당신의 백일몽은 투명합니다. 최악을 연습하고 최상을 어루만져봅니다. 제인 버킨을 꿈속 골목으로 데려온 건 배우지망생인 해원씨의 야심과 세상에서 제일 쿨한 모녀관계를 향한 동경이겠지요. 고개만 끄덕이면 청혼해서 당신을 다른 나라로 데려갈 수 있는 미국 교수는, 거리에서 스친 익명의 미남 청년과 사랑하지만 부자유한 유부남 애인을 뭉뚱그린 완전체겠지요. 거기 있음으로써 여기에 없음을 강조하는 그 사람들 옆에서 해원씨는 제일 환하게 웃더군요. 유일하게 현실과 꿈에서 차이가 없어 보이는 등산객 아저씨는 당신에게 아무 약속도 안 하고 막걸리 두잔을 따라주었습니다. 남한산성의 착한 아저씨를 보면서 저는 문득 <해변의 여인>의 문숙도 파란만장한 여행 마지막에 신두리 개펄에 빠진 그녀의 차를 밀어준 생면부지의 두 청년을 힘겨운 날 꿈에서 다시 만났을 거라고 상상하게 됐어요.

시사를 마치고 이 영화의 스탭 여러분이 들려준 대로, 극장에서 만난 많은 관객이 말한 대로 해원씨의 산책과 꿈은 제게도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대뜸 울게 하는 서러움은 아니었어요. 서촌에 내리던 비처럼, 남한산성의 안개처럼, 사직공원에서 엉거주춤히 뽀뽀하는 당신과 애인의 바지 밑단을 타고 올라오던 물 얼룩처럼 축축한 애처로움이었지요. 우산을 쓰고, 다리가 아파올 때까지 걸으면 견딜 만한. 저는 이 애처로운 습기 안에서 어떤 아늑함을 찾는 것밖에 우리에게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원씨, 아늑한 꿈속에 들여주어서 고맙습니다. 우리, 일기 열심히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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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의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 역시 누구의 딸도 아닌 소녀다. 다만 해원은 이리저리 소요하고 인디아는 직진한다. 정확히 말하면, 소요하거나 직진하는 것은 소녀들이라기보다 영화쪽이다. 오해가 없어야 한다. 이는 인디아가 보편적인 통과의례를 거쳐 착착 성장한다거나 박찬욱 감독의 연출이 단선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스토커>는 패스트리처럼 얇고 세심하게 쌓아올린 영화다. 주요 인물들의 동선이라든가 찰리(매튜 구드) 삼촌의 과거와 대과거와 인디아의 현재, 행위와 심리와 음향이 각각 계열을 이루며 정교하게 조립되어 있다. 편집 단계까지 갈 것도 없이 <스토커>의 ‘디자인’은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평이한 천성을 가진 실내 대화 장면을 보자. 정작 살인의 순간은 롱숏으로 촬영한 <스토커>에서 영화적 사건의 태반은 인물들의 대화가 차지한다. 식탁이나 거실에서 인디아와 이블린(니콜 키드먼), 찰리가 속내를 반만 드러낸 말을 주고받을 때 세 사람은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있지만, 정정훈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그 내부를 다시 작은 구획으로 나눈다. 때로는 집의 구조도 한몫 거든다. 벽과 가구에 몸의 일부가 가려진 채 열린 문을 통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세 사람은 모두의 목소리를 듣지만 상대방 중 한 사람의 모습은 보지 못한다. 다 같이 대화하고 있으나 셋 중 둘만의 비밀이 생길 수 있는 구도다. 여기에 크고 작은 단위로 구사된 밀도 높은 교차편집은 <스토커>를, 못을 사용하지 않고 아귀를 꼼꼼히 맞춰 짜낸 가구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므로 앞서 쓴 ‘직진한다’는 표현은 영화의 궤적이 직선을 그린다는 뜻이 아니라 인디아의 행보가 필연적으로 보였다는 인상을 가리킨다. 통상 교차편집은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전하거나 별개 사건을 인과 관계로 묶어주고 드물게는 같은 장소에서 다른 시간대에 일어난 일을 환기시키는 데에 쓰인다(<스토커>에는 셋 다 있다). 그리고 그 밖에 관객으로서의 다년간 경험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교차편집 기법의 암시를 꼽는다면, “이제, 클라이맥스가 임박했다”는 신호다. 음악을 들을 때 ‘아첼레란도’(accelerando, 점점 빠르게)의 마지막에 심벌즈가 장렬히 울리기를 기대하는 반응과 비슷하다. 마치 딸아이의 머리칼을 땋아주듯 영화의 가장 가는 올을 모아서 하나의 가닥으로 꼬고, 그것들을 다시 좀더 굵은 다발로 엮어가는 <스토커>의 전면적인 교차편집은, 영화를 보는 동안 내게 쉬지 않고 서사의 정점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는 엷은 환각을 자아냈다. 찰리 삼촌의 유년을 포함한 이 영화 속 모든 사건과 풍경들이 오로지, 열여덟살을 맞은 소녀 인디아 스토커의 각성을 예비하는 기나긴 설계로 보이는 위험한 착시 현상. 이처럼 미리 측량하기 어려운 잉여분의 효과를 실감할 때마다 영화의 모든 기법에는 페달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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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벨라는 에드워드와 일족이 되고 <렛미인>의 오스칼과 이엘리는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스토커>는 포식자 종족의 계보란, 선대를 후손이 먹어치움으로써 비로소 완전히 이어진다고 믿는다. 영화 속에 야생 독수리 다큐멘터리가 등장했을 때 찰리 삼촌은 불운을 예감했어야 했다.

<윈터스 본>의 리 돌리부터 <더 브레이브>의 매티,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의 캣니스, <비스트>의 허쉬파피, 그리고 이번 달의 인디아와 해원까지. 최근 들어 영화가 어른 영웅은 슈퍼 히어로들에게 맡겨버리고 정작 현실의 삶에서 영웅적 태도와 행동을 보이는 역할은 소녀들에게 전담시키고 있다는 의심(?)이 짙어지고 있다.

좋아요

<잭 더 자이언트 킬러>의 가디언 엘몬트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목놓아 주장한 윤회설이 맞아 혹시 다음 생에 은하계의 왕으로 태어난다면 근위대장 역할은 반드시 이완 맥그리거에게 맡기는 편이 좋겠다. <스타워즈> 속 오비완 케노비의 전력도 전력이지만, 니콜라스 홀트의 활약을 보러 <잭 더 자이언트 킬러>를 보러갔다가 맥그리거가 분한 ‘가디언’ 엘몬트의 리더십과 매력에 새롭게 반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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