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트레일러’(honest trailers)는 영화의 단점과 놀림거리까지 망라한 예고편 패러디로 ‘스크린정키스’ (이용자명 screenjunkies, www.screenjunkies.com) 사이트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표를 산 다음에야 대사가 없다는 걸 알게 되리라”고 시작하는 <레미제라블> 예고편은 아예 노래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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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감독의 자전적 영화 <가족의 나라>를 보고 종로 거리를 걸으며,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삶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속절없이 흘러가버릴 수 있는지 생각한다. 1950년대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동포 성호(아라타)와 일본에 남은 가족은 그들의 선택이 어긋났다는 사실을 진즉에 깨닫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가져올 본인의 행복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초래할 불행의 총합이 크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제자리에 멈춘 채 더 나빠지지만 않길 바란다. 수술해야 하지만 북한으로 돌아간 뒤의 부작용이 염려되어 방치할 수밖에 없는 성호의 머릿속 종양은 마치 <가족의 나라>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축소판 같다.
성호는 종종 상대의 눈을 보지 않고 대화한다. 당국의 지시에 따라 동생 리에(안도 사쿠라)에게 공작원으로 활동할 용의를 타진하는 장면이 그렇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을 믿지 않고, 진심으로 상대를 설복할 의사도 없는 성호의 말은 말이 아니다. 아들을 보낸 남편을 눈물로 원망하고 북에서 온 감시원을 저주해도 시원찮을 성호의 어머니가 선택한 최선은 고작, 감시원에게 양복을 선물하며 한줌의 호의를 구하는 것이다. 감시원에게 별 권력이 없다는 사실을 그녀도 모를 리 없다. 선명한 목표가 있다기보다 아무 일도 아니할 수는 없어서 하는 행동이다. <가족의 나라>의 인물들 역시 여느 영화 속 인물들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모임을 갖고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와 만남과 행위는,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으로부터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기에 뒤척임이나 움찔거림에 가까워 보인다. 산다기보다 부지(扶持)하는 삶. <가족의 나라>는 아침에 일어나 뭔가를 시도하고 실망하고 감동하는 평범한 일상의 메커니즘이 사치인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영화의 가장 이상한 점은, 그러면서도 영화 내부에서 카타르시스를 주거나 관객이 극장 밖으로 분노를 갖고 나가도록 유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점점 물이 흐려져가는 어항을 손도 못 쓰고 지켜보는 기분이다. 한없는 유예를 받아들이는 이 연출의 태도는 아마도 양영희 감독이 이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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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모히칸(<라스트 모히칸>)과 뉴욕 이민사의 ‘도살자’(<갱스 오브 뉴욕>), 황금광 시대의 화신(<데어 윌 비 블러드>)을 거쳐 급기야 링컨 대통령까지. 런던에서 출생한 아일랜드 국적자인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온몸으로 미국 건국사를 집필하는 중이다. 오래전 <전망 좋은 방>(1985)의 외알 안경을 걸친 샌님 신사가 <라스트 모히칸>(1992)의 근육질 전사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이후 더 놀랄 일도 아니지만, 대니얼 데이 루이스라는 배우는 영화마다 키마저 달라 보인다. 변신의 실질적 열쇠는 음성과 걸음걸이일 거라 짐작한다. 그의 링컨은 자애롭지만 뭔가를 꾹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예고편에서 처음 링컨의 음성을 접했을 때는 성대를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압박하는 연기 같아 거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늘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고려하고 있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이라는 ‘수동적인’ 영웅과 매우 잘 어울리는 발성이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영화 속 모습은, 미국영화에도 자주 나오는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의 희고 거대한 대리석상과 무척 닮았다. 당연한 일 아니냐고? 내 말은 그의 링컨이 아주 위대하고도 절대적으로 고독해 보인다는 뜻이다. 전장에서 병사들과 접견하는 링컨의 등 뒤에서부터 접근해 서서히 대통령의 얼굴을 드러내는 오프닝 장면의 카메라 움직임 역시 이같은 인상에 일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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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향한 관심의 8할을 점하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명인 연기에도 불구하고 4개월로 한정된 짧은 시간적 배경과 헌법 수정안 통과 과정을 꼬치꼬치 묘사한 시나리오는 <링컨>을 전기영화나 시대극보다, 정치스릴러로 기억하게 만든다. 때로 자질구레하고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장면들- 헌법 수정안에 가부를 표하는 의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는 신이라든가- 을 완주함으로써 <링컨>은 자명한 것을 실제로 자명하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전략과 타협의 절차가 필요한지 보여준다. 노예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당장 그들이 생계를 유지할 현실적 방도는 있냐는 질문에 <링컨>의 한 대사는 이렇게 답한다. “자유가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를 묻기 전에 자유를 찾는 게 먼저죠. 그렇게 치면 전쟁이 끝났을 때 평화에 대한 준비는 돼 있나요?” 자유는, 손해와 이익을 떠난 정언명령이라는 뜻이다. 링컨에게 “법 앞에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 노예제는 폐지돼야 한다”는 명제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을 넘어 현실이 되기까지는 저열함을 포함한 정교한 절차가 필요하고, 링컨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당신의 민주주의도 더럽혀진 깃발 아니냐고 묻는 남부 연맹 대표 앞에서, 적어도 우리는 혼돈을 그냥 내버려두고 포기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놀랍게도 정치는 궁극적으로 고귀한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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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 분노의 추적자>(이하 <장고>)를 보았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여전히 유희정신을 뽐내는 한편 165분이라는 호방한 러닝타임으로 작가적인 긍지도 내비친다. 웨스턴 장르의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화려하게 살리면서도, 과거 서부극이 외면했던 역사적 맥락-노예제도를 이야기의 복판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 타란티노 감독이 자부심을 표하는 대목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타란티노의 다음 인터뷰 내용은 나를 멈칫하게 한다. “<장고>에는 두 가지 유형의 폭력이 있다. 흑인 노예들이 245년간 견딘 야만적 리얼리티로서의 폭력이 있고 복수하는 장고의 폭력이 있다. 후자는, 영화적 폭력으로서 재미있고 쿨하고 즐길 만한 것이다.” 관객으로서 내 체험을 돌아보면 과연 그렇게 두 가지 폭력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칼로 자르듯 분리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고 연출자로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은 더욱 뜻밖이다. 예컨대 두 노예 중 한쪽이 죽기 직전까지 싸우게 하는 ‘만딩고’ 장면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링컨>과 <장고>는 모두 미국 노예제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룬 영화고 나름의 맥락이 있다. 스필버그는 노예제도에 관한 <아미스타드>(1985)와 <칼라 퍼플>(1997)을 연출한 적이 있다. 타란티노는 전작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히틀러 암살 작전이 성공하는 2차 세계대전의 가상 시나리오를 실현했고, <장고>에서는 굴레를 벗어나 카우보이가 된 흑인이 노예상과 무자비한 백인 농장주 집안을 쓸어버리는 ‘역사 다시 쓰기’를 시도했다. <링컨>은 흑인의 평등권을 인식하기까지 미국이 얼마나 큰 고통과 비용을 치렀는지를 백악관과 의사당을 중심으로 논하고, <장고>는 노예들에게 가해진 비인도적인 폭력과 그것이 부른 분노를 일깨운다. 다만 “노예제를 논란의 중심에 올려놓았다”는 감독의 자평에도 불구하고 “과연?”이라고 반문하게 되는 까닭은 타란티노 영화가 카타르시스를 생산하는 일정한 패턴 때문이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히틀러와 <장고>의 악덕 농장주는 어떻게 다른가? 이 영화들은 오늘날 공인된 악(惡)인 나치즘과 노예제도를 적의 자리에 불러다놓은 타란티노식 게임의 두 판본은 아닐까? 한편 타란티노 감독 본인이 극중 인물로 등장해 이야기의 흐름을 역전시킨 다음부터 질주하는 <장고>의 클라이맥스는, 살인마에게 줄곧 위협받던 여자들이 우르르 반격하는 <데쓰 프루프>의 마지막 장과 매우 흡사하다. “자, 당할 만큼 당했으니 이제는 갚을 차례다. 저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여태 잘 봤으니 지금부터 가해지는 어떤 응징도 우리는 죄책감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의미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오는 듯해서 겸연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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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링컨 부자
노예제를 폐지할 헌법 13조 수정안이 통과됐음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내내 어두운 서재에서 결과를 기다리던 링컨은 막내아들 테드를 감싸안고 창가로 다가가 그 소리를 듣는다. 스필버그 영화에서 하얀 역광 숏은 단골 아이템이지만, 영화 내내 반쯤 어둠에 잠겨 있던 링컨이 반투명한 커튼 뒤에서 햇빛을 받는 이 숏은 각별히 아름답다.